[임병식 칼럼] 국정은 산으로 …무책임한 여의도 정치

2023-04-0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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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서울시립대 초빙교수/객원 논설위원]



예상했던 대로 윤석열 대통령이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 요구를 의결했다. 사실상 거부다.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 힘겨루기가 현실화된 모양새다. 국회에는 양곡관리법 외에도 인화성 강한 법안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지금과 같은 대치 국면이 계속될 경우 대화와 타협은 기대하기 어렵다. 행정부와 거대 야당 간 충돌은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다.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 정치는 전쟁터가 된다. 또 국정동력은 바닥난다. 직면한 경제 현실을 감안할 때 절제와 존중이 실종된 여의도 정치는 무책임하다.

레비츠키 교수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를 작동하는 두 가지 핵심 규범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제시했다. ‘상호 관용’은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존중하는 태도다. 상대도 얼마든지 선거를 통해 통치할 권리를 갖는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또 ‘제도적 자제’는 권력을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미 공화당과 민주당은 두 규범을 토대로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해 왔다. 둘은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고, 시한부 권력을 정파적 이익에만 활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 당시 대법원 판사 증원 무산은 좋은 사례다. 대공황 당시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돌파하기 위해 대법관 증원을 시도했다. 그는 대법원에서 뉴딜정책이 번번이 가로막히자 대법관 증원을 통해 우회로를 노렸다. 그러나 자신이 소속된 민주당조차 “독재를 향한 걸음”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무산됐다. 민주당은 여당으로서 권한을 남용하는 대신 제도적 자제를 선택함으로써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야당 또한 제도적 자제를 잃지 않았다. 1800~2005년까지 대통령이 임명한 연방 대법원 판사와 각료에 대한 야당 보이콧은 9건에 불과했다. 대법관 임명 동의는 1880~1980년까지 90%에 달했다. 1986년 공화당 레이건이 임명한 대법관 ‘스캘리아’는 극단적 보수주의자였다. 당시 민주당은 거부권 행사에 필요한 상원 의석을 47석 이상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 의원은 전원 찬성표를 던졌다. 그들이라고 힘 자랑하고 싶은 욕구가 없었을까. 트럼프 등장 이후 미국 정치도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잃은 채 진영싸움에 가담하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미국 민주주의에서 절제와 관용은 여전히 강력한 덕목이다.

영국 캐머런 총리 내각과 독일 슈뢰더 내각은 상호 존중을 보여줬다. 2010년 5월, 캐머런이 이끈 영국 보수당은 노동당 13년 집권을 끝내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하지만 과반의석에 모자라 단독 정부 구성이 어려웠다. 보수당은 좌파성향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시도했다. 이질적인 두 정당은 상호 존중을 토대로 연정에 합의했다. 보수당과 캐머런은 ‘영국을 위해 단합한다(United for Britain!)’라는 기치 아래 자유민주당에 많은 것을 양보했다. 비례대표제 도입에 합의했고, 부총리를 포함해 장관직 5개를 자유민주당에 배분했다. 보수당 캐머런과 자유민주당 클레그는 총리와 부총리 자격으로 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섰다. 한 주 전까지 정책 차이를 보이며 거칠게 공방했던 이들은 “새로운 정부가 탄생한 것일 뿐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시작임을 알린다”고 선언했다.

서로 다른 정치성향에도 불구하고 둘은 존중과 협업을 통해 영국을 위기에서 구했다. 고질적인 재정적자를 해결하고 기업투자 환경을 개선하고 일자리를 늘렸다. 연정기간 동안 재정적자는 3분의 1로 줄인 반면 기업투자 증가율은 1.53%에서 3.84%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일자리 증가율과 고용률 또한 EU 평균과 비교할 때 2~3배 이상 높았다. 독일 슈뢰더 총리 또한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며 지지층이 반대하는 노동 개혁을 단행했고, 정권교체에 성공한 기민당과 메르켈은 정책 기조를 이어갔다. 이전 정권에서 추진한 정책이라면 덮어놓고 뒤집는 우리와 달리 독일 정치는 국익을 위해 상대를 존중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기까지 과정을 복기하자면 여의도 정치에서 상호 존중과 제도적 자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거대 야당은 의석수를 앞세워 밀어붙이고, 정부여당은 포퓰리즘이라며 반대만 했다. 민주당은 식량주권과 농민 피해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밀어붙였지만 결과는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초래했다. 여의도 정치는 상호 존중은커녕 힘겨루기 장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민주당은 노동조합법(노랑봉투법)과 방송법, 의료법도 강행한다는 방침이다. ‘행정 대 입법’ 대결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정부는 법안의 부작용에 대해 국회에 지속적으로 설명해 왔지만 제대로 된 토론 없이 일방적으로 통과시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민주당 강행 처리를 직격했다. 앞서 민주당은 상임위 단독 의결과 본회의 직 상정을 통해 지난달 23일 양곡법 개정안을 일방 처리했다. 그동안 정부여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농업 생산성과 농가 소득을 높이려는 농정 목표와 배치된다며 반대해왔다. 윤 대통령은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며,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막대한 혈세를 들여 모두 사들여야 하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고 거듭 비판했다.

거부권 행사 이후 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정권은 끝났다”(정청래 최고위원)며 격하게 반발했고, 대통령실 앞에서 규탄 시위를 벌였다. 민주당이 강행 처리하는 동안 국민의힘은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며 타협과 대화에 소극적이었다. 윤 대통령 또한 야당과 대화를 외면한 채 마지막 카드를 선택했다. 여당과 야당, 용산 모두 상호 존중과 제도적 자제를 잃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양곡관리법 외에 노동조합법 개정안과 방송법을 놓고도 대치 중이다. 국민의힘은 거부권 행사 의지를 내비친 상태고, 민주당은 밀어붙일 태세다. 대통령실 또한 거부권 행사에 무게를 싣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강대 강’은 지지층 결집에는 도움 될망정 국정은 산으로 갈 게 뻔하다. 국민은 안중에 없는 몰염치한 정치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권력을 남용할 경우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상호 존중과 제도적 자제를 상실한 여의도와 용산 사이에 먹구름이 짙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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