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한국의 일본 의존도가 높은, 가장 아파할 1~3번을 콕 집어 수출을 차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자국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이 안정적 수출선을 놓치는 등 피해가 커지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그동안 ‘자립화’ 구호만 외치고 행동하는데 굼떴던 한국 기업들과 정부를 변화로 이끌었다. 기업들은 소부장의 공급처 다변화와 국산화에 적극 뛰어들었다. 정부도 핵심 소부장 경쟁력 강화와 대·중소기업간 협력모델 구축 등 정책으로 뒷받침했다.
실제로 4년 가까이 지난 지금, 민관이 힘을 모으자 소부장 대일 의존도는 20%p 가까운 감소폭을 보이고 있다.
포토레지스트의 의존도는 93.2%에서 77.4%로 15.8%P 감소했으며, 불화수소는 41.9%에서 7.7%로 34.2%P 감소하면서 사실상 탈(脫)일본에 성공했다. 불화폴리이미드는 44.7%에서 33.3%로 11.4%P 낮아졌다.
정부가 지정한 소부장 으뜸기업들도 크게 성장했다. 43개 으뜸기업 중 유가증권시장이나 코스닥에 상장된 상위 6개 중소·중견 기업의 시가총액은 지난 4년간 6배가 뛰었다.
SK머티리얼즈는 해외 의존도가 100%였던 기체 불화수소 국산화에 성공했고, 일본 의존도가 92%였던 포토레지스트는 벨기에·독일 등으로 공급처를 다변화하는 한편 국내 생산기업이 공장 증설에 나섰다. 일본 의존도가 94%로 높았던 불화 폴리이미드 또한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양산을 시작해, 이를 이용해 만드는 한국의 CPI필름의 수출액이 4년간 25%나 신장하는 쾌거를 이뤘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잠자고 있던 한국을 깨운 격이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한국의 소부장 부문 ‘탈(脫)일본’의 전환점이 됐고, 다급해진 일본 업체들이 자국 정부에 수출 물량을 원상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등 화해 제스처를 보내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정부의 한일관계 개선 움직임에 따라 새로운 변수가 생겨났다. 자립화에 고삐를 죄던 한국의 움직임에 또다시 일본 기업들이 끼어들게 된 것이다. 한일 정상회담 이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한 일본을 상대로 한 WTO 제소를 철회하기로 하면서 일본 기업들의 한국 수출길이 더욱 수월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내 소부장 기업들의 약진에 장애물이 다시 등장한 셈이다.
하지만 일본의 소재들이 다시 국내에 들어온다고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된다. 내친 김에 대일 의존도를 낮추도록 고삐를 죄어야 한다. 반도체·디스플레이 3대 규제 품목의 수급 안전에 만족해선 안 된다. 전기전자를 비롯해 금속재료, 기초화학, 섬유, 세라믹, 탄소, 자동차·항공, 조선해양, 바이오 등 키우거나 미래 먹거리 산업의 소부장 국산화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소부장 자립화는 글로벌 공급망이 와해되면서 부품 조달이 차질을 빚는 상황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국제통상에서 자국 보호주의가 더욱 강해진 지금,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같은 수출 규제가 언제든 발생할 수도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조립 세트 산업에는 강점이 있지만, 그 원천인 소부장에선 일본·독일 등 기술강국에 뒤진 게 사실이다. 또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기술이 부족하다며 국산화를 지레 포기했다. 중소기업이 애써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내놓아도 국내 대기업이 외면해 이를 상용화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일본의 수출 보복에 한차례 홍역을 치른 우리는 늦게나마 소부장 강국의 대열에 한걸음을 내딛었다. 일본이 60년 가까운 세월동안 쌓아온 기술을 단숨에 따라 잡을 순 없지만, 자립화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정부의 국산화 기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사업화 연계 기술개발(R&BD) 사업의 적극 추진, 해외기업의 R&D 센터 및 생산기지 유치를 통해 소부장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적극 지원한다면 일본의 60년을 따라잡을 수 있다. 민과 관, 대기업과 중소벤처기업이 함께 뛰면 가능한 일이다. 소부장의 자립화는 국가 경제의 근간을 튼튼히 할 수 있는 버팀목이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