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전쟁은 한 나라의 흥망(興亡)만이 아니라 국제 정세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러시아는 전쟁에 패하거나 경제 침체가 심각하면 혁명적 변혁이 일어난 역사가 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혁명(러일전쟁 패배), 1917년 볼셰비키 혁명(1차 세계대전 패전·경제 침체) 그리고 구소련 해체(아프가니스탄 침공 후과)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최소 28개국(25개국은 나토 회원국)에서 수십억 달러 상당의 무기와 군사 장비를 공급받았다. 전쟁 초기 16개국에서 의용군 1000여 명이 참전 지원을 하는 등 러시아를 상대로 전 세계가 전쟁을 벌이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독특한 전쟁인 러시아 의용군우크라이나 전쟁 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제로섬 게임이 되고 있다. 2024년 종신 집권을 노리는 대선을 앞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정치생명을 걸고 전쟁을 시작해 이미 병합을 선언한 우크라이나 동부 4개 주는 포기할 수 없는 전리품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수천 명의 민간인 사망자와 1800만여 명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하고, 수도를 포함해 영토의 5분의 1을 러시아에 점령당해 크림반도를 포함한 영토의 완전한 수복을 위해 결사항전(決死抗戰) 태세다. 두 나라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러시아가 어떻게 될지, 전 세계적 권력 지형에 어떤 변화가 올지 궁금하다. ‘푸틴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번 전쟁의 주도자 푸틴을 해부한다.
히틀러가 주도한 역사상 최악의 포위 작전 ‘레닌그라드 봉쇄’로 죽음이 덮친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성장한 푸틴은 국가보안위원회(KGB)에서도 어릴 때와 같이 “되도록이면 싸움에 휘말려서는 안 되지만 일단 시작하면 끝을 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술회했다. 러시아가 아닌 ‘푸틴’과의 싸움이라 불릴 정도로 전 세계를 상대로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호전적 성격의 잔혹한 독재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거칠면서도 신중하고 계산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배경에는 원한과 호전성으로 똘똘 뭉친 그의 개인사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푸틴은 어떻게 치명적인 원한을 품게 됐는가’라는 포린폴리시(FP) 기고문에서 윌리엄 타우브만 미국 애머스트 대학 교수는 푸틴의 무모한 듯 보이는 전쟁 개시 결정은 원래 그의 성장기에서 배태된 ‘억울할 때면 남을 비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그의 성격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연합통신, 2022.7.18.) 푸틴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레닌그라드 뒷골목 싸움에서 투쟁심과 승부 정신을 배운 골목 대장으로 성장해 일찍이 ‘약육강식(弱肉强食)’ 법칙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친서방 행보를 보이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東進)으로 러시아 목에 칼을 들이대는 미국의 도전적 확장정책에 대한 응전인 오늘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레닌그라드 뒷골목에서 60여 년 전 잉태된 셈이다.
도시 뒷골목에서 ‘약육강식(弱肉强食)’ 법칙 터득한 불량소년 푸틴
푸틴은 흑룡(黑龍)의 해라는 임진년(壬辰年)인 1952년 10월 7일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노동자 출신 41세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1911~1999)과 어머니 마리야 이바노브나 푸티나(1911~1998) 부부는 모두 1911년생. 부부는 872일간 계속된 나치 독일군의 레닌그라드 봉쇄 과정에서 첫째 아이 알베르트를 어릴 적에 잃었다. 둘째 아이 빅토르는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전쟁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부부는 전쟁 후 41세에 얻은 늦둥이 푸틴을 오랜 고통 끝에 찾아온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애지중지(愛之重之)했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은 1차 세계대전, 러시아혁명과 내전을 겪은 군인 출신. 소련 해군에 징집돼 잠수함 부대에서 복무하다 다시 육군으로 1941년 재징집돼 서른 살에 레닌그라드에서 벌어진 독·소 전쟁에서 독일군 포격으로 한쪽 팔이 절단된 상이군인이었다. 할아버지 스피리돈 이바노비치 푸틴(1879~1965)은 레닌과 스탈린의 다차(주말별장)에서 일하는 전속 요리사였다.
어린 시절 폭력배가 길거리에 넘쳐나고 쥐들이 들끓는 서민들의 낡고 허름한 공동 주택에서 성장한 청소년기의 푸틴은 자서전에서 인정했듯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또래 불량학생들과 어울리며 물건을 훔치거나 패싸움에 가담해 난투극을 벌이는 등 크고 작은 비행을 저지르던 문제아였다. 험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학교생활도 순탄치 않아 소련 공산당 어린이 조직인 피오네르 동맹에 한참 늦게 가입했다.
전후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며 겨우 지역 공산당 중간 간부로 승진한 그의 부친과 독실한 정교회 신도이자 시간제 일거리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던 모친은 당시 어린 푸틴의 행실을 교정하려 노력했으나 처음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는 개구쟁이로 공부도 못하고 학교 규율도 잘 지키지 않는 불량소년이었던 그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서 달라졌다. 부모의 꾸준하고도 엄격한 가정교육과 푸틴과 가깝던 운동 코치들의 지도 덕분에 푸틴은 고학년 시절부터 모범적인 학생으로 거듭났고 부진했던 성적이나 당 활동에서도 우수한 모습을 보이는 결기를 보여줬다.
그는 자서전에서 불같은 호전적인 성격으로 자신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동네 소년들과 싸우는 거친 어린 시절을 통해 강한 투쟁심과 승부 정신을 배웠다고 털어놓았다. 왜소한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초등학교 5학년인 12살에 레슬링과 유도를 혼합한 러시아 무술인 ‘삼보(sambo)’를 배우기 시작했다. 유도를 연마한 푸틴은 18살 무렵 유단자가 돼 전국 주니어 유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유도 애호가 푸틴은 전문가들과 공저로 두 번째 유도 교본을 출간하는 등 2000년 9월 일본 방문 당시 유도 발상지인 도쿄 고도칸(講道館)을 예고 없이 찾아 선수들과 즉석에서 대련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푸틴은 총리 시절이던 2010년 우리나라를 방문해 용인대에서 유도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도(柔道)의 특징인 유능제강(柔能制剛), 즉 상대방 힘을 역이용해 무너뜨리는 ‘부드러움이 능히 굳셈을 이긴다’는 원리를 익혔다. 돈도 배경도 없던 한미한 출신인 그는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굽히고 펼 줄 아는’ 능굴능신(能屈能伸)하는 유연한 처세로 대권을 거머쥔 셈이다. 특히 공산 혁명 후 유도가 금지되자 러시아의 메치기, 태클 등 격투술을 합쳐 만든 무술인 ‘삼보’의 간교함과 공격성을 닮은 그의 성격은 통치술과 정치 행태에 접목돼 ‘마초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는 경험을 통해 싸움이 불가피할 때는 '먼저 때려야 한다. 정말 많이 때려서 상대가 일어나지 못할 정도여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푸틴의 초등학교 은사는 “그는 자신을 배신하거나 못되게 구는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독사(毒蛇)를 설 건들면 반드시 되무는 원리를 일찍이 터득하고 철저히 상대를 유린해야 한다는 싸움 법칙을 익힌 것이다.
조종사가 꿈이었던 16살 소년 푸틴은 1968년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소련 비밀첩보 요원의 활약상을 그린 '방패와 칼'이라는 영화를 본 뒤 첩보 요원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당시 옛 소련 스탈린의 공포통치 시절 정보기관으로 악명을 떨친 KGB 건물에 대담하게 들어가 KGB 요원이 되는 방법을 근무 장교에게 물었다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치거나 학위가 있어야 한다는 대답에 어떤 학위를 따는 게 가장 좋은지 재차 묻자 대답은 법학이었다. 이에 자극받은 그는 1970년 중상위권 실력이었으나 운 좋게 경쟁률이 40대 1쯤 되는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법학과에 진학해 1975년《국제법에서 가장 선호하는 국가의 교역 원리》를 주제로 논문을 써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규율과 질서를 바로잡는 법학 공부에 흥미를 느껴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1975년 졸업 후 검찰청에서 변호사로 일할 수도 있었으나 소년 시절 꿈대로 바로 KGB에 지원해 채용되었다. 10대 시절 스파이 영화를 보고 ‘스파이 한 명이 수천 명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그는 KGB의 과거 범죄행위는 과거의 일이고 오히려 국민이라면 국가 안위를 위해 마땅히 KGB에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길거리 청년에 불과했던 푸틴에게 KGB는 소련 공산당과 연고가 없어도 안위를 보장받으며 출세할 기회를 보장했다.
그는 KGB 근무 중 해외 파견자는 기혼자(旣婚者)여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서둘러 결혼을 한 뒤 해외정보국 요원으로 독일에 파견돼 활동하다(1985~1990년) 옛 소련 붕괴 뒤 귀국했다. 동독 드레스덴의 KGB 지부에서 복무하는 동안 중령으로 진급했다. KGB 생활을 15년 이상 한 때문인지 그는 보안 감각이 뛰어나고 사려가 깊으며 일단 목표를 결정하면 반드시 이를 달성해내는 추진력이 강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KGB의 해외 부문에서 스파이 공작. 인물 포섭 등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1990년 동독에서 레닌그라드로 귀환했으나 소련 붕괴에 따른 극심한 국가적 혼란으로 한때 전도가 막막했다.
직장 잃은 38세 KGB 요원에서 택시기사 거쳐 대통령까지 10년
국가사회 시스템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귀국한 그도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을 느끼며 갈팡질팡했다. 경제가 파탄 난 당시 많은 이들이 그랬듯 무허가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이어 가기도 했다. 푸틴 스스로 국영방송 다큐멘터리에서 ‘1991년 소련 붕괴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였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에게 비극이었듯 나에게도 비극이었다”고 말했다. “달빛을 보며 택시를 몬 적도 있었다”며 “생계를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가용으로 택시 영업을 했다. 솔직히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쾌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소련 붕괴는 곧 역사적인 러시아의 종말이었다”며 “국가는 40%의 영토를 잃었고, 비슷한 규모의 산업생산력과 국민을 상실했다”고 했다. 특히 “소련 붕괴와 함께 러시아인 2500만여 명이 하루아침에 국경 너머, 독립한 옛 소련 위성국들에 남게 됐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등지에 흩어져 사는 러시아인들을 염두에 둔 이 발언을 보면 오늘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국외 러시아인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으로 표현한 속내가 드러난다.
옛 소련 붕괴로 30대 후반에 직장을 잃고 생업을 위해 방황하던 푸틴은 KGB의 ‘활성 예비역’으로 전환해 위장 활동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모교인 레닌그라드대학 국제 관계 담당 부총장직을 맡았는데, 이 자리는 학생과 방문객 감시를 위해 마련된 KGB 몫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앞길이 불확실한 KGB를 떠나 정치경력을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자신에게 대학 재학 시절 조교수로 상법을 가르쳤던 레닌그라드대학(소련 붕괴 뒤 19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으로 개명) 은사인 아나톨리 솝차크 교수가 1990년 5월 레닌그라드 시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자 그의 보좌관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
사하로프, 옐친 등과 지역 간 대의원 그룹을 형성하며 개혁파의 저명 인사로'러시아 연방 헌법'을 작성한 솝차크 교수가 의장직을 그만두고 1991년 5월 초대 레닌그라드 시장 선거에서 당선된다. 숍차크 시장은 푸틴을 시청 산하 대외관계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외 관계와 외국인 투자 촉진 사업을 맡겼다. 1991년 6월부터 5년 임기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을 역임한 솝차크 시장은 레닌그라드를 역사적 지명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변경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솝차크 시장 배려로 상트페테르부르크시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푸틴은 도박산업을 유치하고 국유기업의 원자재를 팔아 식량과 맞바꾸는 계약을 추진했으나 괄목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시 감찰위원회는 석연치 않은 계약을 두고 부패 의혹으로 해고를 권고했으나 푸틴을 신뢰했던 솝차크 시장은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보호했다. 한편 푸틴은 드레스드너 방크, 도이체 방크 등 외국 자본을 들여오는 데는 꽤 성과를 거뒀다. 생산공장 특별지구를 조성해 하이네켄, 펩시, 코카콜라 등 유력 기업을 유치한 실적으로 1994년 제1부시장으로 승진한 푸틴은 KGB에 사표를 제출했다.
음지(陰地)에서 살아야 하는 KGB 스파이가 꿈이었던 푸틴의 본격적인 정치 인생이 시작되었다. 당시 영웅지상(英雄之相)도 아니고, 특별히 두각(頭角)도 드러내지 않아 본인은 물론 주변 그 누구도 푸틴이 10년 뒤 최고 권좌에 오를 잠룡(潛龍)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