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주의 몰락(下)] '정치자금법'의 역설…정치 신인·원외 인사에 족쇄 '부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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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돈 정치' 풍토…'차떼기' 사태 계기 '오세훈법'으로 투명성 확보 시도

정치환경 변하며 되레 정치진입 막아…전문가들 "비용 줄이고 시각 바꿔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2018년 7월 23일 진보 정치 아이콘으로 통하던 노회찬 정의당 당시 원내대표가 목숨을 끊었다. 정치권은 충격에 휩싸였다. 국회의원이 아니라 원외에 있을 때 받았던 정치자금 4000만원이 비극의 발단이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권에서는 정치자금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때 들불처럼 번졌다. 하지만 현재까지 성과는 미미하다. 여전히 ‘돈 있는 사람’만 정치하는 풍토가 여전하다.
 
이는 2004년 개정된 일명 ‘오세훈법’(정치자금법)의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 사건은 2002년 16대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선거운동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LG, 삼성, SK, 현대차, 롯데 등 대기업에서 불법 정치자금 823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한나라당에는 트럭으로 현금을 받았다는 뜻으로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이 씌워졌다.
 
정치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터져 나왔다. 이를 계기로 정치자금법·정당법·공직선거법 등 3법을 합쳐 오세훈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2004년 3월 12일 국회를 통과했다.
 
오세훈법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치자금 모금 통로로 지적된 지구당을 폐지하고 법인 또는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 행위 금지, 중앙당 후원회를 비롯한 정당 후원회 금지, 정치자금 기부 실명제와 정당 회계보고 절차 등이 강화됐다.
 
무엇보다 특정 단체를 통해 후원금을 모으는 행위를 막아 개인 후원을 통해서만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게 했다. 개인의 정치자금 기부 상한선도 하향 조정됐다. 국회의원 연간 후원금은 1억5000만원(선거가 있는 해엔 3억원)으로 제한됐다. 대가성 뭉칫돈이 오가는 ‘돈 정치’를 차단하고 소액 다수 기부를 활성화해 정치자금을 투명하게 관리하자는 취지였다.
 
오세훈법은 당시엔 ‘돈=당선’이란 공식을 깨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금권선거 차단, 정경유착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니 20년 가까이 정치 환경이 바뀌면서 이제는 법의 유통기한이 끝났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실물 현금 거래가 현저히 줄고 계좌이체 등 금융거래가 투명해진 상황에서 정치자금에 투명성을 높이겠다고 도입한 제도가 오히려 정치 신인에 대해 도전을 가로막는 장벽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보다 정치자금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강화됐고, 정치 무대도 다양해진 만큼 정치인들에 대한 활동 제약을 풀자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현역 의원과 원외 정치인 간 차별이 크다는 게 문제다. 현역 의원은 지역사무소를 차릴 수 있고 언제든 정치후원금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원외 정치인은 서글프다. 지역사무소를 둘 수 없고 정치후원금은 선거 120일 전 예비후보 자격을 가질 때에만 모을 수 있다. 선거운동 기간도 현역이 길고, 후원금 상한액도 현역은 원외 정치인에 비해 두 배나 된다.

게다가 지구당이 폐지되면서 원외 인사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투명 인간이 됐다. 국민을 만날 수 있는 합법적인 통로가 없다 보니 원외 인사들은 자연스럽게 야인 취급을 받으며 떠돈다. 자연스럽게 민의를 반영하기도 힘들다. 합법적으로 돈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 보니 노 원내대표 같은 비극이 발생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야권 당협위원장은 “정치권 신인들이 현 상황에서 지역구 활동을 하는 것은 자비로 맨땅에 헤딩하는 셈”이라며 “돈은 묶더라도 입은 풀어줬으면 하는데, 원외 정치인에게도 상시 선거운동을 허용해 활동할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역시 오세훈법을 손볼 때라고 입을 모은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크라우드 펀딩 등 정치 신인도 자금을 모아서 데뷔할 여건이 좋아진 것이 사실이고, 선거에서 15% 득표율을 올리면 선거비용도 다 보전받을 수 있다”면서도 “이렇게 변화한 정치 여건에도 실제 선거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근본적으로 밥값, 홍보 문자 비용 등 천문학적인 선거비용을 줄이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정치자금을 보는 시각을 달리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정치자금법 하나 때문에 후원을 못 받아서 정치를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초선, 비례 등 원내 진출 비율이 꽤 되는데 신인 정치인도 정책과 인물론이 받쳐준다면 후원금과 지지자들이 모일 것이니 결국 능력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구당 부활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운영의 묘를 보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당협위원회 체제로 바뀐 것은 현지 토호 세력의 짬짬이와 부정한 돈이 흘렀던 창구로 지구당이 활용된 사례를 타파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양 교수는 “지구당이나 당협이나 사실상 하는 일이 같다”며 “과거 대표자 한 명이 위원장을 뽑던 형식을 탈피한 만큼 정당 민주주의의 근간으로서 당협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고 제언했다.

박 평론가도 “지구당 부활은 반대한다”면서 “지역 토호 세력이 지구당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면 지역 이슈에만 갇히게 된다. 중앙당도 지역구와 멀어지고 청년 정치인들이 설 자리도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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