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의 시대] [르포]"길 건너엔 30억 아파트인데··· 월세 10만원도 버거워" 강남 구룡마을·노원 백사마을 가보니

2023-02-2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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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서울] 재개발은 뒷전…열악한 환경 속 버팀의 연속인 구룡·백사마을 주민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지구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새롬 수습기자]


"여긴 바깥 세상과 다른 곳이에요. 우리는 서울시민도, 강남구민도, 개포동 주민도 아니죠. 그렇지만 언젠간 떳떳한 강남구 주민으로서 안락한 집에 살아보고 싶어요."

초고가 아파트와 저가 아파트로 부동산 계급갈등이 심화되는 서울에도 '제3지대'가 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얘기다. '강남의 마지막 쪽방촌'으로 불리는 이곳에서도 유독 비좁은 골목을 통해 굽이굽이 들어가야 나오는 4지구를 21일 기자가 찾았다. 이곳은 지난달 20일 일어난 화재 여파로 아직도 까만 잿더미로 뒤덮여 있었다. 
시커멓게 타버린 가재도구들과 판자, 헝겊, 연탄 등을 밟고 올라서자 화재 현장 한쪽에 붙은 '구룡마을 화재민 비상대책위원회' 현수막 옆으로 15~20㎡ 남짓한 임시천막이 보였다. 화재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의 거처였다. 전기가 연결되지 않아 바닥에 스티로폼을 겹겹이 쌓아 올렸고, 보온덮개로 잿더미를 겨우 가린 모습이었다. 

구룡마을4지구 주민 박모씨(74)는 "화재로 집 잃은 사람들끼리 여기서 지내야 한다. 말은 임시 거처지만 언제까지 여기 있게 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임시 천막 안에는 보금자리를 잃은 90대 노인 두 명이 난로 앞에서 추위를 피하며 눈을 감고 있었다.  

박씨는 "원래 집터였던 잿더미 위에 움막이라도 짓고 살겠다는데, 그건 나라에서 안 된다더라"며 "불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앞으로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 대책이 없다"고 토로했다. 다른 4지구 주민 A씨는 "좁고 씻을 데도 없고 불편하지만 이곳에서 최대한 버티는 것 말고는 별 수 없다"며 씁쓸히 웃었다. 

구룡마을은 1980년대 말 올림픽을 앞두고 도심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모여들며 형성된 26만4500㎡ 규모의 '무허가 판자촌'이다. 재개발 논의는 지난 30년간 수차례 나왔지만, 보상 내용 등 관계자들 간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으며 오랜 시간 쳇바퀴만 돌았다. 

그러는 동안 방치된 이곳 주민들의 주거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졌다. 판잣집은 비닐, 스티로폼, 담요 등 불에 잘 타는 소재로 얽혀있었고 판자를 감싼 덮개와 천막은 바람에 힘없이 나부꼈다. 골목 폭은 사람 한두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마을 어귀 '주민 쉼터'로 쓰이는 천막에 있던 한 주민은 "좀 전에는 갑자기 강풍이 불어 텐트가 날아갈 뻔했다. 그대로 깔려 죽는 줄 알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소식을 듣고 모여든 주민들은 벽돌과 돌, 가스통 등으로 천막을 다시 땅에 고정하느라 분주했다. 

구룡마을에 30년 넘게 살아온 김근례 구룡마을자치회 부회장(76)은 "재래식 화장실이라 냄새가 지독하고 여름에는 구더기가 나온다"며 "여름엔 물난리, 겨울엔 화재 위험으로 맘 편히 살 수가 없다. 여기 살면서 1년에 한 번씩은 큰불을 겪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B씨(70대)는 "여름에는 집 안까지 물이 차고 겨울에는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게 일상이다. 수도‧전기도 지겹도록 고장 난다"고 하소연했다. 

지난달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곳을 찾아 "반복되는 화재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재개발"이라고 언급하는 등 최근 들어 구룡마을 재개발 논의는 다시 물살을 타고 있다. 서울시는 조만간 토지보상 공고를 내고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의 공영 개발 방식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하지만 서울시와 구룡마을 주민 간 갈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주민들은 오랫동안 한 터전에서 살아온 만큼 재산권 인정과 분양권 등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시는 무허가 건축물이라 분양권을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 일부 토지주들은 인근 아파트 땅값 시세에 준하는 보상을 원하는데, SH공사는 감정평가에 따른 공시가격 기준으로 보상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SH공사가 구룡마을 주민들에게 제공하는 위례신도시 소재 임대아파트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주민은 개발된 구룡마을 내 입주권을 원하고 있어 SH임대주택으로의 이주를 꺼리는 실정이다. 

50대 주민 C씨는 "여기서 30년 넘게 살던 사람들을 몰아내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좋아진 구룡마을을 차지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며 "분양권 또는 그에 준하는 토지보상금을 원한다"고 했다. B씨는 "30년간 여기서 고생했는데 보상 조건이 어느 정도는 충족돼야 나가지 않겠냐"며 "오래 살았으니 재산권을 인정해줬으면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화재가 난 구룡마을 4지구 임시 거처에서는 길 건너 개포 래미안포레스트와 래미안블레스티지, 디에이치아너힐즈 등 전용 84㎡ 기준 매매가 30억원대에 달하는 고급 단지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공사 중인 한 고층아파트를 올려다보던 주민 이모씨(70대)는 "젊을 때 아이 셋을 데리고 들어와 평생을 여기서 고생만 했다"며 "마을이 빨리 개발되고 제대로 보상받아 몇 년이라도 좋은 곳에서 편히 살다 눈 감고 싶다"고 말했다.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 골목 풍경 [사진=임종현 수습기자]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알려진 노원구 백사마을도 재개발 사업이 오랫동안 늘어진 탓에 주민들의 불편이 커지고 있었다.

중계본동 104번지에 위치한 백사마을은 지난 2008년 1월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 2009년 정비구역으로 지정됐다. 이후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사업 시행자로 참여했지만 주거지 보전 사업으로 인한 사업성 저하 논란 등으로 2016년 시행사 자격을 포기했다. 이후 SH공사가 새로운 시행자로 나섰지만 사업은 표류 중이다.  

재개발이 곧 될 것이라는 생각에 주민 대부분은 이곳을 떠났다. 동네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사람보다 개와 고양이를 더 자주 마주칠 정도로 마을은 고요했다. 폐허가 된 빈집들 벽에는 빨간 스프레이로 그려진 동그라미와 함께 공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뚜렷한 재개발 사업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마을에 남은 주민들은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올해 겨울은 이들이 버티기엔 유독 추웠다.   

백사마을에서 40년 넘게 거주한 주민 김모씨(77)는 "기름보일러가 있지만 기름값이 너무 비싸 쓸 수 없다. 보일러 쓸 돈으로 월세를 내야 한다"며 "연탄이 유일한 난방 수단"이라고 말했다. 마을 골목에는 다 쓴 연탄재가 비닐에 담긴 채 쌓여있었다.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조모씨(64)는 "재개발 소식을 들어도 이제 별 생각이 없다"며 "여력이 돼야 이주하는데, 그럴 형편이 못 된다"고 했다. 조씨는 무덤덤하게 말을 뱉고선 작업장에 쓸 지게를 만드는 데 열중했다. 

백사마을 언덕길 정면에는 수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지만, 주민들에게는 '다른 세상'이다. 보증금 500만원, 월세 10만원으로 살고 있는 노모씨(82)는 "이 이상으로 돈을 낼 수 없어 이사를 갈 수 없다"고 했다.

KB부동산 시세 기준으로 최근 백사마을 옆 '현대6차' 아파트 전용 85㎡의 임대 매물은 보증금 5000만원, 월 임대료 90~100만원이다. 노씨가 살고 있는 집의 10배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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