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가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번복하면서 관련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각지대에 놓인 성폭행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과 반발을 우려해 판례를 통해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고 있다.
9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 따르면 직장 내 선후배나 학교·문화예술계 사제 관계에서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가 잇따라 보고되고 있다. ‘폭력·협박’ 없이 생기는 성폭력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과 판례를 통해 점진적으로 입증 책임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성폭력 구성 요건 지나치게 좁아···비동의 강간죄 필요"
실제로 협의회에서 2019년 1월부터 3월까지 전국 66개 성폭력상담소가 접수한 강간 상담사례 1030명 중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사례가 71.4%(735명)에 달했다.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행사된 성폭력 피해 사례는 28.6%(295명)에 그쳤다. 이은의 변호사는 “비동의 강간죄가 명시적으로 확인된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건 오해”라며 “실질적으로 성폭력인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구제하기 위해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성범죄는 ‘블랙박스’에서 벌어진다고 할 만큼 피해자 진술 외에 다른 증거가 적고 피해 발생 후 기간을 두고 고소가 이뤄지는 사례가 많다. 특히 권력 관계에서 물리적인 저항 없이 장기간 발생한 성폭력은 더욱 입증하기 힘들다. 2018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행 사건에서 1심 재판부가 “위력 행사 정황이 없다”며 내린 무죄 판결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업무상 위계·위력에 의한 간음죄’ 조항으로 처벌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업무상 위력’을 입증하기도 쉽지 않다는 반론도 적잖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는 '업무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빠져나가기도 한다”며 “강간 구성 요건에 ‘폭행·협박’이 있어 다른 강간 범죄도 좁게 해석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도입 시 부작용···판례 쌓으며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반면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 반발을 불러와 성폭력 처벌 인식에 오히려 악영향을 끼친다는 목소리도 적잖다. 형법 개정보다는 판례를 통해 강간죄 입증 책임을 점진적으로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안 전 지사 성폭행 사건 이후 ‘위계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널리 인정되는 추세라고 짚었다. 안 전 지사 2심 재판부는 상하관계에서는 사회적 지위나 권세 자체가 '위력'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원심을 뒤집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미 폭행·협박 유무에 무게를 두던 잣대가 당사자 간 합의 여부로 옮겨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신민영 형법 전문 변호사는 "이론상으로는 검찰이 협박·폭행 등 강간 구성 요건을 입증하기 어렵지만 현재 입증 책임이 상당 부분 완화돼 있다"고 말했다. 유왕현 변호사(법무법인 새서울)도 "과거와 달리 대법원이 부부 사이에도 강간을 인정하는 등 사회 인식 변화와 발맞춰 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간 입증을 좁게 해석하는 관행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입법만 이뤄질 시 백래시(backlash·사회 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괜히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하려다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수사기관과 재판부에서 동의 여부를 중요하게 다루도록 점진적으로 판례를 쌓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전날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범죄를 의심받는 사람이 현장에서 동의가 있었다는 것을 법정에서 입증하지 못하면 억울하게 처벌받게 된다. 상대방 내심을 파악하고 입증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울 것"이라며 비동의 간음죄 도입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우선돼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