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그 단계에 맞춰 북한의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구상’을 지금 이 자리에서 제안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북한은 나흘 뒤 김정은의 여동생이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인 김여정 이름으로 “검푸른 대양을 말리워(말려) 뽕밭을 만들겠다는 소리”라고 맞받아쳤다. 이어 그의 성명에는 이런 구절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남쪽 동네에서 우리의 반응을 목 빼들고 궁금해하기에 오늘 몇 마디 해주는 것.” “하나마나한 헛소리를 했을 바에는 차라리 입을 옹 다물고 있는 편이 체면을 유지하는 데 더 이로웠을 것.” “역사의 오물통에 처박힌 대북정책.” “부질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에게 보내줄 것은 쓰거운(쓴) 경멸뿐.”
김여정 성명은 급기야 “윤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고까지 하면서 “우리는 절대로 상대해주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혀 둔다”고 했다. 이 성명은 북한 최고 권위 매체인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에 전문이 보도됐다.
북한이 대외적으로 자신들 입장을 전하는 방식에는 크게 성명과 담화가 있다. 성명이 담화보다는 좀 더 공식적이고 무게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북한의 성명과 담화를 발표하는 대표 부처로는 대외관계를 담당하는 외무성과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통일전선부(통전부), 그리고 남북 간 대화창구로 주로 이용되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등을 꼽을 수 있다. 조평통은 2016년 국가기관으로 승격되면서 내각 소속이 됐지만 실제로는 통전부 지휘를 받는다고 한다. 사안에 따라서는 국가보위성(정보기관)이나 군 총참모부 등도 성명을 낸다.
북한이 발표하는 주요 대남 성명은 통전부가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 군 선전·선동 부문에서 장교로 근무하다 탈북한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의 전언이다.
“1970년대 초반 통전부에 성명, 담화, 그 외 선전·선동에 필요한 글들을 쓰는 작가들이 일하는 부서가 만들어졌다. 나와 평양에서 같은 인민학교에 다닌 최하림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최승칠은 김정일의 ‘영화예술론’을 사실상 집필한 것으로 유명했다. 최승칠은 통전부 작가실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평론가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통전부 작가실은 김일성종합대 어문학부,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3년마다 한 번씩 뽑는 특설반), 그리고 각 지역 사범대 어문학부 출신 중에서 글 잘 쓰는 인재들을 발탁한다고 한다.
통전부 작가실에서 만들어진 성명, 담화들은 국가보위성, 군 등 각 기관의 성명, 담화를 작성하는 부서로 보내져 거기서 기관 특성에 맞게 다소 손질을 한 뒤에 발표된다. 남북 회담 등에 자주 등장했던 김성혜 전 통전부 통일전략실장은 조평통에서 글을 잘 쓰는 일꾼이었다고 한다.
북한이 한국이나 미국을 향해 내놓는 성명이 과거보다 더욱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표현으로 뒤덮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북핵 문제 등으로 남북, 북·미 관계가 더욱 악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성명의 주체가 여성으로 바뀐 이후 성명의 어조가 변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해 흥미롭다. 대남 관계는 김여정이, 대미 관계는 최선희(현 외무상)라는 두 여성이 책임지면서부터 북한 성명의 어조에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아니라 히스테리컬한 측면이 드세졌다는 지적이다. 김여정은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남 관계 전면에 나서 개인 이름으로 된 성명 등을 통해 한국을 맹공하고 있고, 최선희 역시 2018년 2월 외무성 부상에 취임하면서부터 대미 관계 실세로 등장해 미국 비난 성명을 날리고 있다.
김성민 대표는 “김여정 성명에서는 야시꼬운(비위에 거슬리고 얄미운) ‘못된 여자’ 말투가 느껴진다. 그래서 통전부에서 만들어온 성명을 김여정이 직접 손 봐서 발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정보기관에서 일하다 탈북한 한 고위 인사도 “최근 김여정 성명을 읽다 보면 김여정이 직접 내용을 보태거나 고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면서 “기존 성명, 담화보다는 대담한 표현, 즉 김여정만이 할 수 있는 표현과 어조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어쨌든 김여정 성명에 대해서는 ‘그동안과는 급이 다른 독설’이라는 평이 일반적이다.
2014년 3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투표소에 등장하면서 공식 데뷔한 김여정은 2019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에 임명되었다. 김여정 이름으로 담화가 처음 발표된 것은 2020년 3월 3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보도된 ‘청와대의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을 표한다’는 제목의 담화였다.
“어떻게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짓거리 하나하나가 다 그렇게도 구체적이고 완벽하게 바보스러울까.” “참으로 미안한 비유이지만 겁을 먹은 개가 더 요란하게 짖는다고 했다. 딱 누구처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해 남북 화해의 전령사 같은 이미지를 과시했던 그녀가 이처럼 표독스러운 언사를 날리자 우리 국민은 경악했다. 이전 북한 성명과는 확실하게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후 김여정의 독설은 갈수록 심해졌다. 지난 4월 당시 서욱 국방장관에게는 ‘미친놈’ ‘대결광’ ‘쓰레기’라고 했다.
북한은 왜 이렇게 김여정을 내세워 독설을 퍼붓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김여정이 젊은 여성이지만 어지간한 남성 못지않은 배포와 담대함을 지닌 지도자라는 사실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김여정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거침없이 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위상을 확보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북한이 노리는 것은 북한이 이렇게 마음대로 비아냥대고 조롱하고 경멸해도 한국은 아무 소리 못할 만큼 북한에 종속돼 있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선전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북한은 과거 한국 진보 정권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비난 수위를 조절했지만 문재인 정권 때는 이마저도 무너졌다. 2019년 8월 11일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시작되자 북한은 즉각 외무성 미국 담당 국장 ‘권정근’ 명의의 담화로 이렇게 조롱했다.
“바보는 클수록 더 큰 바보가 된다고 하였는데 바로 남조선 당국자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똥을 꼿꼿하게 싸서 꽃 보자기로 감싼다고 하여 악취가 안 날 것 같은가. 저들이 삐칠 일도 아닌데 쫄딱 나서서 새벽잠까지 설쳐대며 허우적거리는 꼴이 참으로 가관이다. 겁먹은 개가 더 요란스럽게 짖어대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며칠 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임기 내에 비핵화와 평화 체제를 확고히 하고 그 위에 평화경제를 시작해 통일로 나아가겠다”고 밝히자 조평통 대변인은 이렇게 대꾸했다.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다. 정말 보기 드물게 뻔뻔스러운 사람이다. 아래 사람들이 써준 것을 그대로 졸졸 내리읽는 남조선 당국자가 웃겨도 세게 웃기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북쪽에서 사냥총 소리만 나도 똥줄을 갈기는 주제에 애써 의연함을 연출하며 북조선이 핵이 아닌 경제와 번영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역설하는 모습을 보면 겁에 잔뜩 질린 것이 역력하다.”
그래도 ‘문재인’이라는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윤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고 했다. 북한의 천박한 말폭탄이 이제 아무런 제한구역 없이 무차별 난사되면서 대남 압박 무시 전략이 당분간 더욱 거세진다는 것을 예고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각종 대외 성명은 아무리 급이 낮은 것이라 할지라도, 또 아무리 마구잡이로 쓴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는 단어 하나까지도 북한 정권의 의도와 계산이 정확히 반영돼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미니 박스]
“북한의 선전선동 기관은?”
“달걀에도 사상을 재우면 바위를 깬다.”
북한에서 사상의 힘을 강조할 때 자주 쓰는 표어다. ‘사상’을 전달하는 선전·선동을 얼마나 중요한 사업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북한의 선전·선동 체계는 북한 전역에 거미줄처럼 짜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당, 행정기관, 군대, 학교 어디든 선전·선동 담당 부서가 있으며, 북한의 모든 미디어, 출판, 예술, 교육 등도 모두 당의 사상과 방침을 전달하는 나팔수 노릇을 한다.
북한은 노동당이 먼저 ‘보도지침’을 작성하면 전국의 보도기관과 창작기관 등에 하달한다. 이 지침에 따라 기사와 창작물들이 만들어지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보도물 등은 주민들의 정치학습 등에 활용되기도 하고 외부를 향한 스피커가 되기도 한다. 북한의 대외 성명도 당의 선전·선동 전략과 원칙에 철저히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북한 당국은 최근 ‘혁명의 나팔수’라고 치켜세우며 선전·선동 기관 일꾼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효과가 예전 같지 못하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고난의 행군’ 등을 겪으면서 당의 사상만을 따르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달걀에도 자본주의를 재우면 바위를 깬다’로 바꿔야 할까?
조윤영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 △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석·박사 △뉴시스 도쿄특파원 △<北朝鮮のリアル(북한의 현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