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장관은 “사드가 한·중 관계의 전부가 아니다”는 점을 명제로 깔았다. 그는 “소위 (사드) 3불은 우리에게 구속력이 없다”며 전임 정부에서 사드를 협상한 분들이 직접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사드와 관련하여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도 회담 내용을 게재했다. 양측이 각자 입장을 표명했고, 서로의 안보 관심사를 중시하면서 문제를 철저하게 처리하는 데 노력하고, 이 문제가 더 이상 양국의 관계 발전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한·중 양국 간에 이견과 공통된 의견을 모두 확인하는 자리였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회담이 논란이 된 것은 왕위 외교부장은 이른바 ‘5개 요구(應當)’ 사항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 측에 한·중 관계가 앞으로 30년간 발전하기 위해 이를 준수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그의 발언이 일제히 타전되면서 국내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다. 그가 주장한 5개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독립자주를 견지하면서 외부 간섭을 받지 말아야 한다(应当坚持独立自主 不受外界干扰).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중대 관심사에 관심을 돌봐야 한다(应当坚持睦邻友好 照顾彼此重大关切). 개방과 ‘윈윈’ 관계를 견지하면서 공급망 안정을 수호해야 한다(应当坚持开放共赢 维护产供链稳定畅通). 평등존중을 견지하면서 서로 내정간섭하지 말아야 한다(应当坚持平等尊重 互不干涉内政). 다자주의를 견지하면서 유엔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应当坚持多边主义 遵守联合国宪章宗旨原则).
우리 국민이 분개한 이유는 한두 가지 때문이 아니다. 우선 첫 번째 요구 때문이다. 중국은 2019년 한·중 외교장관회담 때부터 이 문제를 줄곧 제기해왔다. 우리가 독립자주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사 결정이 외부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중국이 제시한 5개 요구 중 4번째, 즉 중국이 서로 내정간섭을 하지 말자는 부분과 어폐가 있다. 중국이 우리를 독립자주국가로 존중하지 않는다는 모순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이 제기한 내정간섭은 자국 인권문제와 대만 문제 상황을 더 염두에 둔 발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국이 우리를 독립자주국가로 인정한다면 첫 번째 같은 발언은 독립자주국가에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유엔헌장과 관련된 발언도 문제가 있다. 이런 발언이 중국의 외교적 수사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중국은 대부분의 국제 갈등과 분쟁 현안에서 이를 예외 없이 강조한다. 유엔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세계가 따라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주장할 뿐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언행불일치를 줄곧 보여왔다. 가장 비근한 예로 우크라이나 전쟁 때 중국이 유엔에서 보여준 행위가 대표적이다.
중국은 유엔헌장의 취지와 원칙에 따라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하자고 수없이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유엔이 유엔헌장에 따라 러시아의 침공 행위에 대해 제재를 채택하려는 시도에 중국은 반대표를 던지며 이를 무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유엔헌장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국가의 주권과 영토주권의 원칙을 존중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무고한 희생자가 매일 발생하는 상황을 중국이 목도하면서도 러시아를 책망하지 않는 것은 유엔헌장의 원칙을 무시하는 처사임이 분명하다.
사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북한의 핵 위협이 남한과 그 주변 국가, 심지어 미국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중국이 원하는 한반도의 비핵화 원칙을 제대로 준수한 우리나라에 돌아온 대가가 북핵 위협이라는 사실도 중국은 너무나 잘 안다. 중국은 주한미군이 한국 측 협조하에 배치한 사드가 북한 핵 위협에 국한된 사실 또한 명확히 잘 알고 있다. 중국 스스로가 미국의 사드와 유사한 미사일방어체계를 자체 개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드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중국이 사드의 성능, 기능과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 핵 위협의 증대로 오늘날 사드가 한·중 관계에 갈등 요인이 된 데에 중국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는 중국이 과거에 미국과 약속한 사안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1970년대 초 관계 정상화 협의 때부터 한반도의 남북한과 관련된 일련의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당시 협상 의제에는 유엔과 관련된 한반도 문제(유엔의 한반도통일부흥위원회 해산)에서부터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 해체 문제까지 모두 포함되었다. 그러나 미·중 양국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유지에 이견이 없었기에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 해체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이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통해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인식은 1971년 10월 10~26일 베이징에서 열린 저우언라이 전 총리와 헨리 키신저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논의에서 처음 드러났다. 저우 총리는 한반도의 안정과 현상유지 파괴의 원흉이 일본과 남한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 해체를 주장했다. 이에 키신저는 중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으나 그 후과로 일본이 한반도에 발생한 권력 공백을 채우는 역할을 자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저우언라이에게 먼저 동맹의 보호국(patron state, 미국과 중국)이 동맹 의존국(client state, 남북한)에 억제력을 발휘해 미·중 양국이 이들의 직접적인 충돌을 예방하는 견제 세력의 역할을 하면서 이들의 갈등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는 데 주력할 것을 제안했다. 즉, 미국이 남한을 관리할 것이니 중국은 북한을 관리하자는 내용이었다. 한반도 안보 상황에 미·중 양측이 군사적·외교적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 필요성과 당위성에 인식을 같이한 결과였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에서도 미·중 양국의 한민족에 대한 이해의 진면모가 드러났다. 1972년 2월 23일 닉슨은 저우언라이와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 저우언라이는 미국과 중국 각자가 영향력을 발휘해 동맹국을 통제하는 데 일찍이 동의한 바를 다시 상기시켰다. 이에 닉슨은 한민족이 매우 감정적으로 충동적이고 야만적이고 호전적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미·중 양국이 이들에게 영향력을 발휘는 것에 있다고 맞장구쳤다. 미·중 양국은 남북한의 충동적이고 호전적인 행동을 통제하면 6·25전쟁과 같은 사건의 발생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만약 한반도가 미·중 양국의 충돌 장소가 되면 이는 양국의 우둔함을 증명할 뿐이라고 부연했다. 이런 결과는 6·25전쟁 한 번으로 족하기 때문에 닉슨은 반드시 재발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중 양국의 협력이야말로 과거의 불행한 상황의 재연을 억제하는 목적이라고 부연했다. 중국은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주한미군과 한·미 동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필자는 이 대목과 관련해 국내 첫 미중관계사 책 <한국인을 위한 미중관계사: 6·25전쟁에서 사드 갈등까지> 표지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후 미국은 남한의 대북 도발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남한의 핵무장 계획마저도 무산시켰다. 더욱이 북한의 무력 도발에도 평시 작전 지휘권이 미국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남한은 독자적으로 무력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중국은 이후 발생한 북한의 대남 도발을 억제는커녕 북한에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수수방관하는 자세와 태도로 모든 것을 일관했다. 더 나아가 북한의 핵 개발이라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중국은 북한을 ‘관리’하겠다는 미국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중국이 북한을 무책임하게 방임한 사이에 북한의 핵무기 위협 수준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와 미국 대륙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중국이 미국과의 ‘약속’ 불이행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이런 약속이 미국과 서명한 조약도 아니고 문서로도 존재하지 않는 구두의 합의 사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0년대에 약속한, 이미 오래전 이야기라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른바 사드 ‘3불’ 역시 마찬가지의 경우에 해당된다. 사드 ‘3불’ 역시 과거 정부가 당시 양국이 처한 상황과 현안(문재인 전 대통령의 방중 가능성 타진)을 해결하기 위한 구두 합의에 불과한 것이다. 중국의 대북 관리 소홀로 북한의 빈번한 도발과 핵 개발이 지속되면서 중국이 견지하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이 이미 무의미해졌지만 미·중 관계는 계속 발전했다. 사드가 한·중 관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것은 더 이상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이 아니다. 중국도 이제 이런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한의 핵 위협에 우리가 독립자주국가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방어능력 증강이 필수다. 이를 중국도 존중해야 한다. 중국이 북한을 관리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약속이 구두 합의든 신사협정이든 상관없다.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고수하려면 우리의 생존전략도 존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자신의 한반도 정책 원칙에서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주재우 필자 주요 이력
▷베이징대 국제정치학 박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 ▷브루킹스연구소 방문연구원 ▷미국 조지아공과대학 Sam Nunn School of International Affairs Visiting Associate Profess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