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아파트 공사장의 미켈란젤로 … 난 건설일용직

2022-07-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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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 건설노동자]





우선 내게 칼럼을 연재할 수 있게 허락해 준 아주경제 신문사 측에 감사를 드린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글을 쓸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다. 나로서는 무한한 영광이지만 자칫 이러한 판단이 독자들에게 실망감을 줄 수도 있을 텐데 사측으로서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보통 글쓰기는 학자나 고위공무원 등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쓰는 것이지 나처럼 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사람에겐 기대하지 않는 게 통념이기 때문이다. 의외적인 어쩌면 황당한 이 기회를 잘 활용해서 건설현장과 노동자들의 생활과 생각을 전달하고 나아가 건설노동자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도록 탁마해 보고자 한다.
 
절차탁마(切磋琢磨)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학문이나 인격을 수양한다라는 근사한 용어인 이 '절차탁마'라는 말은 사실 노동 용어다. 기록에 의하면 공자와 자공의 대화 중 군자의 덕을 칭송하며 '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마치 옥돌을 자르고 갈고 쪼고 다듬 듯하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말을 생각해 보면 우선 거친 돌을 자르고 갈고 닦으며 다듬는 노동이 먼저 있었다. 당시도 아마 석공은 미천한 직업이었을 것이다. 매일같이 돌을 깨고 다듬느라 먼지 구덩이 속에서 그의 손은 상처투성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석공의 기능이나 기술이 아니라 작업 과정을 보고 하나의 용어로 개념정리하는 지식인의 능력이다. 거친 돌을 가공해 밝고 빛나게 하는 그 노동자의 노력보다도 그 노력의 과정을 인간의 학문적 수양과 인격의 도야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만드는 개념화 작업, 이 차이성이 요즘도 우리 사회가 그 구성원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나는 일용직 건설노동자로서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를 자르고, 깨고, 갈고, 다듬는 작업을 하는 말 그대로 절차탁마하는 할석공이다.

할석이라 하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공정이다. 건축용어뿐만 아니라 대개의 전문용어가 대부분 일본어에서 왔는데 돌이나 콘크리트를 깬다는 '하쓰리'라는 말을 한자어로 바꾸어 표현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본다. 건설 현장에선 할석팀과 한 조가 되어 움직이는 견출이라는 팀도 있다. 견출은 '미다시'라는 일본어를 그대로 한자음을 차용해 쓰고 있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새로운 용어나 개념을 만들지 못하니 현장에선 한자어든 영어든 혹은 일본어든 편하게 쓰고 있는 말들이 많이 있다.

할석공은 건물의 기초공정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함께한다. 아마 건물을 짓는 데 가장 오랫동안 관여하는 공정이라 할 수 있다. 할석공으로서 일하며 느끼는 것은 건축은 '방을 짓는 일'이다. 주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사각방을 만드는 데는 잣대를 가지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벽면의 수직과 수평관계를 살펴야 한다.
 
바르다는 의미

할석공으로 매일같이 하는 일이 벽면이 제대로 수평과 수직을 이루었는지를 확인하며 굽은 것은 깨고 갈거나 미장을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한 우리 할석팀장은 눈으로만 봐도 벽이 굽었는지 휘었는지를 알아본다. 그러나 난 아직 그 정도 수준에 이르지 못해 언제나 잣대를 대 봐야 한다. 잣대를 대보며 생각하는 것이 과연 ’바르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바르다의 의미를 국어사전은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비뚤어지거나 굽은 데가 없다'이다. '면이 바르다'처럼 눈에 보기에 똑바르다는 뜻이다. 둘째, '말이나 행동 따위가 규범·사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사실과 어긋남이 없다'이다. 원칙을 지킨다는 의미로, '경우가 바르다' 같은 표현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늘 지지 않고 햇볕이 잘 든다'이다. '양지가 바르다'란 표현에서처럼 잘 보이고 공개적이란 의미가 있다. '바르다'의 세 가지 뜻을 한데 묶으면 '원칙을 반듯하게 지키며 소통을 밝게 한다' 정도쯤 될 것 같다. 내 보기엔 이 바르다의 의미 또한 노동과정에서 나온 말 같다. 나처럼 벽면이 수직이나 수평이 되어있는지 살피는 과정에서 여러 의미로 확대된 듯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사용하는 바름은 노동현장에서 수평 수직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바름’이라는 말과는 좀 다른 거 같다. 기준이 되는 원칙을 중요하게 보는 거 같은데, 원칙, 원형이란 무엇인가를 따지고 들면 대답하기 좀 모호하다. 특히나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정의, 정도, 공정이란 말의 어의조차 변해왔기 때문이다.

언젠가 일본에서 운전하다가 도로 바닥에 止まれ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정지선 앞에 멈추다는 의미의 止자가 적혀있는 것을 보고 바르다라고 하는 의미는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닐까싶었다. 즉, 어떤 선을 넘기 전에 좌우를 살피고 넘어가도 되는지 확인한 후에 지나가는 행위.
 
천원지방(天圓地方)

어쨌거나 잣대를 들고 끊임없이 벽면이 수평과 수직관계를 이루었는지를 살펴보는 나는 동양의 세계관이랄까 우주관인 천원지방을 생각한다. 후원전방이라는 묘지형태나 만다라의 그림, 첨성대, 연못의 구조물이 이러한 표현물이라고 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사각)지다는 이 말은 추상적 세계만이 아니라 현상계 또한 이러하다는 인식으로 지리상의 발견 이후 비과학적인 말이 되어버렸지만, 이 말은 아직도 우리의 정신세계를 구조화하는 말일 것이다. 천과 지를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아니라, 무형세계와 유형세계,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정신과 몸을 표상하는 의미로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를 구조화하는 개념으로선 유효하다고 본다.

요즘 내가 일하는 아파트가 사각형이어서 그런지 마감 공정에 들어가면서 이 말이 더욱 실감난다. 방에 몰딩과 걸레받이를 붙이기 위해서는 벽면이 수직이 되어 있어야 하고, 타일과 도배를 붙이기 위해서는 기둥과 기둥 사이가 수평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구조물 자체가 이렇게 바르게 되어 있어야 다음 공정이 차질 없이 진행된다. 그런데도 벽면이 아직도 수평 수직이 되어 있지 않아 계속 수정하고 있다면 다음 공정팀에게 지장을 주는 것이며 폐를 끼치는 것이다. 이제는 타 공정과의 관계성도 중요하다. 물질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이며 이는 정신적 관계다. 정신적 관계에선 직선이 아니라 원형적 관계 즉, 원만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몸은 올바른 방을 만들기 위해 직선운동을 해야 하지만, 마음은 관리자나 관련 타 업체와 원만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둥글둥글해져야 한다. 물론 작업할 때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화를 내거나 마음이 거칠어질 때도 내 마음을 원만하게 만들어야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건설근로자의 자존감

할석공으로 일하며 나의 관심은 건설근로자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라고 하면 대개 인생사에서 실패한 분들이 이쪽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래서 마치 인생 패배자들의 집합소 같이 보인다. 물론 일찍부터 이 분야에 들어와 일한 분들은 지금은 기술과 기능이 풍부하여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분도 있지만 대개 저학력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그래서 자기 비하의 의미를 포함해 건설노동자를 막노동꾼이라고 부른다. 막노동이라는 말에는 막살아 온 사람들이 하는 노동, 혹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약간 비하의 의미가 붙어있어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렇게 좋게 보아주지는 않는다. 그만큼 자존감이 매우 낮은 직종이기 때문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품위나 가치를 지키려는 마음상태를 말한다. 그에 비해 자존감은 자신을 스스로 가치있게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자존심은 남과 상대적인 관계의 말이라면 자존감은 나 스스로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내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높으면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도 없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타인과 다툴 일도 없다. 이제는 사회에서 ‘노동자의 망치는 판사의 망치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라는 달콤한 말에 위로받기보다는 노동자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개의 용어가 그렇듯이 새로운 용어나 개념은 인간이 육체노동을 하며 만들어진다. 앞에서 말한 지식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절차탁마’나 ‘바름(옳음)’이란 말처럼 육체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최진석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독립된 주체가 되는 길은 육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인간은 육체를 통해서만이 타인과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구별된다.’ 육체노동을 하는 건설노동자가 이 말에 가장 근접해 있다. 어쩌면 건설노동자야말로 인간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독립된 주체로 설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필자 소개 - 이두수(54)는 5년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노동 현장의 삶과 애환을 그림과 글씨로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전 시민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8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자신이 깎아낸 벽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노동자의 뒷모습에서 나는 가끔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본다/이두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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