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판단에 물러선 경찰...대통령 집무실 인근 시위 가능해져
경찰은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한 이래 대통령 집무실 반경 100m 내 집회 금지 기조를 유지해 왔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라 100m 이내 집회가 금지된 ‘대통령 관저’에 ‘대통령 집무실’도 포함된다는 해석에 따른 것이었다. 더불어 “대통령의 신체적 안전은 국가적 중대 사안”이라 대통령 집무실 주변 경호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펼쳤다.하지만 이를 두고 시민단체 등에선 “법을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처음으로 대통령 집무실 인근 집회를 금지할 수 없다고 결정한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김순열 부장판사)는 관저에 집무실이 포함되기에 집회를 제한한다는 해석은 통상적인 의미를 벗어난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경찰의 금지통고로 인한 공공복리와 행진을 허가함으로써 얻어지는 공공복리를 비교했을 때 행진 허용의 공공복리가 더 크다고 봤다.
법원은 이어진 금지통고 집행정지 행정소송들에 대해서도 “대통령 집무실의 기능, 안전, 시민 불편 등을 고려하더라도 집시법 제11조를 ‘대통령 집무실’에 적용하긴 어렵다”며 집무실 100m 이내 집회를 금지한 경찰 조치가 부당하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법원의 결정문에는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에 따라 대통령집무실을 관저로 해석할 경우 헌법상 기본권인 집회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며, 이 사건의 집회와 규모, 장소 등을 고려했을 때 공공공복리를 해칠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더불어 국회나 법원 인근에서 집회가 제한되기에 대통령 집무실 인근 집회도 제한돼야 한다는 주장에도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강동혁 부장판사)는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닌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하는 국회의원이나(헌법 제46조),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해야 하는 법관(헌법 제103조)과는 달리 국가의 원수로서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와 고충을 직접 듣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를 증진하는 국가 정책을 수립하여야 하는 대통령 직책의 특수성”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법원의 연이은 집회 허용 결정에도 경찰은 지난주까지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무실 인근 집회 금지 통고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하지만 일관된 법원의 결정에 결국 입장을 번복했다. 서울경찰청은 지난 8일 “사법부의 결정을 존중해 ‘전쟁기념관 앞 인도상 소규모 집회’ 등 법원에서 제시한 범위 내 집회에 대해 개최를 보장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경찰은 집무실에서 20m 떨어진 전쟁기념관 앞 인도 위 300~500명 안팎 집회는 허용할 것으로 보인다. 또 시위대나 집회 참여자들이 행진할 경우, 집무실 앞을 지나가는 것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이 조치 또한 집무실 100m 이내라 하더라도 신속하게 이 지역을 통과하는 경우 행진하는 형태의 집회, 시위가 가능하다고 법원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법에 따라 집회는 허용해야 하지만 불법 시위에 대해선 엄정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학교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경호 인력을 더 투입해야 하는 것과 함께 허가된 집회 시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행위에 대해선 엄정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며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대통령의 안전과 일반 시민들의 공공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더불어민주당, 사생활 침해 수준 집회 금지 법안 제출
한편 지난 3일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 앞 시위를 막기 위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개정안이 제출됐다.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날 한병도 민주당 의원은 사생활을 침해하는 수준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집회나 시위의 준수 사항에 개인의 명예를 훼손·모욕하는 행위, 개인의 인격권을 현저하게 침해하거나 사생활의 평온을 뚜렷하게 해치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더불어 악의적 표현으로 청각 등 신체나 정신에 장애를 유발할 정도의 소음을 발생해 신체적 피해를 주는 행위를 금지하도록 했다.
한 의원은 법률안 제안 배경에 대해 "최근 전직 대통령 사저 앞에서 벌어지는 시위로 해당 마을 주민들이 불면증과 환청, 식욕부진 등을 호소하며 병원 치료를 받는 등 사생활의 평온이 뚜렷하게 침해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정청래 민주당 의원도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장소에 전직 대통령 사저를 추가하는 내용의 집시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민주당의 행보에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전직 대통령 사저와 대기업 본사, 광화문광장 등에서 이뤄진 극렬한 시위에 참여해온 민주당이 입장이 바뀌어서야 집시법을 개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2017년 10월부터 4개월간 이명박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벌어진 시위가 있다. 당시 막말이 난무하던 시위에서 민주당은 시위를 독려하고 당 인사들이 직접 시위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더불어 시민 불편 등을 고려하지 않는 집회 문화가 생긴 것은 문재인 정부 당시 경찰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친정부 단체의 막무가내식 집회들을 묵인한 결과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문재인 정부 시절 불법시위 사법처리 건수는 2015년과 2016년 각각 491건, 512건에서 2018년과 2019년 173건과 204건으로 급감했다.
이러한 민주당의 행보에 시민들도 우려를 표하고 있다. 서울 중구에 거주하는 노무사 준비생 A씨(28)는 "시위의 기본적 성격은 위악이다. 사저 앞에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면 경호팀이나 경찰이 제지할 일이지 법으로 막아선 안된다"며 "문 대통령을 지키고 싶으면 다른 방안을 내야지 시위의 자유를 막아선 안된다"고 역설했다.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B씨(31)도 "(개정안의 방향성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민주당의 태도에 실망했다. 여당일 때는 가만히 있다가 자기들이 불리하게 되니까 개정안을 추진하는 모습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