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정치권, 사법권에서 많은 검찰 개혁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만 모두 다 필요 없는 말들입니다. 한승헌 변호사님께서 주창하신 법과 양심의 가치와 교훈, 실천,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검찰 제도개혁 논쟁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님의 삶이 대안이라고 믿습니다. 상식을 잃어버린 시대, 변호사님의 빈 공간이 더욱 아쉽습니다." - 함세웅 신부
동백림 간첩단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100건이 넘는 굵직한 시국사건을 맡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한 '1세대 인권 변호사' 고(故) 한승헌 변호사(전 감사원장) 추모 노제가 25일 거행됐다.
'산민(山民) 한승헌 변호사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이하 장례위원회)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를 이날 오전 9시부터 고인이 졸업한 전북대 본부 앞 광장에 마련하고 오후 2시 노제를 진행했다.
노제 사회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전북지부장인 김용빈 변호사가 맡았고, 김용택 시인이 추모시를 낭독했으며 왕기석 명창이 추모곡을 불렀다. 하관식은 오후 4시 장지인 광주 5·18 민주묘지에서 진행됐다.
한 변호사는 지난 20일 별세했으며 장례는 5일 동안 민주사회장(葬)으로 진행됐다. 전날 오후 5시에는 전 민변 회장인 정연순 변호사 사회로 추도식이 열렸고, 발인은 이날 오전 6시 50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2호실에서 진행됐다.
추도식에서 첫 번째로 조사(弔詞)를 낭독한 함세웅 신부는 "한승헌 변호사님이 검사로서, 변호사로서, 문인으로서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주제어가 있다. 법과 양심, 법은 무엇이고 양심은 무엇인가"라며 "한 변호사님은 사회적 규범인 법을 따라 과연 법관들과 검찰들이 바로 집행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물으셨고 또 법을 넘어서서 양심이 우선한다는 가치를 강조하셨다"며 고인을 기렸다.
추도식에 참석한 고인의 전주고 후배 김기만 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은 "한승헌 선생님, 참스승이 드문 시대에 사회생활 62년이 온통 삶의 귀감(龜鑑)이셨다"며 "'선한 영향력'에서 아마도 당대 최고가 아니셨을까. 평생 몸무게가 55㎏㎏을 넘은 적이 없었지만 선생님은 한 시대의 거인(巨人) 중 거인"이라고 말하며 한 변호사를 회고했다.
고인은 전북 진안군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전북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현 사법고시) 8회에 합격한 뒤 법무관을 거쳐 서울지검·법무부 등에서 근무하다 1965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분지(糞地)>라는 책을 써 반공법 위반으로 처음 기소된 작가 사건, 이른바 '분지 필화사건'(1965)을 시작으로 그의 50여 년 인권 변호 활동은 시작됐다.
이후 동백림 사건(1967), 통일혁명당 사건(1968), 민청학련 사건(1974), 1·2차 인혁당 사건(1964·1974) 등 군부독재 아래 엄혹했던 시기에 탄압받는 양심수와 시국사범을 앞장서서 변호했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한 변호사는 1975년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규남 의원을 애도하며 '어떤 조사(弔辭)'라는 제목의 수필을 신문에 발표한 뒤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기도 했다. 해당 사건은 재심 끝에 2017년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고인은 시집 <인간귀향> <노숙> <하얀 목소리>와 자신이 맡았던 시국사건들을 술회한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에세이 모음집 <피고인이 된 변호사> 등 도서 40여 편을 펴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100건이 넘는 굵직한 시국사건을 맡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한 '1세대 인권 변호사' 고(故) 한승헌 변호사(전 감사원장) 추모 노제가 25일 거행됐다.
'산민(山民) 한승헌 변호사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이하 장례위원회)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를 이날 오전 9시부터 고인이 졸업한 전북대 본부 앞 광장에 마련하고 오후 2시 노제를 진행했다.
노제 사회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전북지부장인 김용빈 변호사가 맡았고, 김용택 시인이 추모시를 낭독했으며 왕기석 명창이 추모곡을 불렀다. 하관식은 오후 4시 장지인 광주 5·18 민주묘지에서 진행됐다.
추도식에서 첫 번째로 조사(弔詞)를 낭독한 함세웅 신부는 "한승헌 변호사님이 검사로서, 변호사로서, 문인으로서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주제어가 있다. 법과 양심, 법은 무엇이고 양심은 무엇인가"라며 "한 변호사님은 사회적 규범인 법을 따라 과연 법관들과 검찰들이 바로 집행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물으셨고 또 법을 넘어서서 양심이 우선한다는 가치를 강조하셨다"며 고인을 기렸다.
추도식에 참석한 고인의 전주고 후배 김기만 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은 "한승헌 선생님, 참스승이 드문 시대에 사회생활 62년이 온통 삶의 귀감(龜鑑)이셨다"며 "'선한 영향력'에서 아마도 당대 최고가 아니셨을까. 평생 몸무게가 55㎏㎏을 넘은 적이 없었지만 선생님은 한 시대의 거인(巨人) 중 거인"이라고 말하며 한 변호사를 회고했다.
고인은 전북 진안군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전북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현 사법고시) 8회에 합격한 뒤 법무관을 거쳐 서울지검·법무부 등에서 근무하다 1965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분지(糞地)>라는 책을 써 반공법 위반으로 처음 기소된 작가 사건, 이른바 '분지 필화사건'(1965)을 시작으로 그의 50여 년 인권 변호 활동은 시작됐다.
이후 동백림 사건(1967), 통일혁명당 사건(1968), 민청학련 사건(1974), 1·2차 인혁당 사건(1964·1974) 등 군부독재 아래 엄혹했던 시기에 탄압받는 양심수와 시국사범을 앞장서서 변호했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한 변호사는 1975년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규남 의원을 애도하며 '어떤 조사(弔辭)'라는 제목의 수필을 신문에 발표한 뒤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기도 했다. 해당 사건은 재심 끝에 2017년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고인은 시집 <인간귀향> <노숙> <하얀 목소리>와 자신이 맡았던 시국사건들을 술회한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에세이 모음집 <피고인이 된 변호사> 등 도서 40여 편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