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SK ICT 연합은 사피온의 신규 지분투자 유치를 놓고 다수의 글로벌 벤처캐피탈과 협의 중이다. 협의와 함께 김윤 새한창업투자 파트너를 사피온코리아의 기타비상무이사로 선임했다.
사피온은 SK텔레콤·SK하이닉스·SK스퀘어가 지난 1월 결성한 'SK ICT 연합'이 총 800억원을 투자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설립한 AI 반도체 설계기업(팹리스)이다. 각 사의 초기 지분율은 62.5%·25.0%·12.5%이며, AI 반도체 연구·개발을 위해 국내 법인인 사피온코리아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미국 법인과 한국 법인 모두 국내에서 손꼽히는 AI 반도체 전문가인 류수정 대표가 이끈다.
사피온은 SK ICT 연합을 주도하는 박정호 부회장의 첫 번째 사업 목표다. SKT의 반도체 개발 능력(팹리스)과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 능력(메모리·파운드리), SK스퀘어의 투자·운영 등을 결합해서 나온 시너지 효과로 전 세계에서 통하는 팹리스를 육성한다. AI 반도체로 국내 반도체 기업의 취약점으로 여겨지는 비메모리 분야를 선도하고, SK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찾으려는 경영 전략이다.
SK ICT 연합은 이번에 투자받게 되는 자금을 2세대 AI 반도체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과 인력 확보에 투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피온은 지난 2020년 국내 최초로 개발한 AI 반도체 'X220'을 시장에 선보였다. AI 실행에 사용되는 기존 GPU보다 연산속도는 1.5배 빠르고, 전력 소모량은 80% 수준에 불과해 업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GPU보다 절반가량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SKT, NHN 등을 고객으로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내년에는 AI 실행(추론)뿐만 아니라 학습까지 가능한 2세대 모델인 'X330'을 출시할 계획이다.
국내에선 새한창업투자가 사피온에 대한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새한창업투자 관계자는 "사피온 지분 투자를 두고 SK ICT 연합과 논의를 한 것은 사실이다. 구체적인 투자 액수나 시기는 정해진 바 없다"고 말했다.
새한창업투자는 1989년 설립된 국내 1세대 벤처캐피탈로 쿠팡, 크래프톤, 우아한형제들(배민), 비바리퍼블리카(토스) 등에 잇따라 투자를 단행하며 국내 ICT 업계의 큰 손으로 떠올랐다. 올해는 AI 반도체와 사피온코리아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투자 논의를 시작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영입으로 김 파트너는 CTO와 기술 고문에 이어 자회사 이사회 멤버로서 SKT와 인연을 계속 이어가게 됐다. 비록 내부에서 AI 반도체 개발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AI 모델 구현에 필요한 기술적인 조언을 하고 사피온코리아가 해외 AI 전문가를 지속해서 영입할 수 있도록 류 대표와 협업을 이어갈 전망이다.
SK ICT 연합은 AI 반도체 사업의 중요성을 고려해 정희영 SKT 사업개발 담당도 사피온코리아의 기타비상무이사로 전진 배치했다. AI 반도체 사업 진행을 두고 외부 투자 유치를 담당할 전망이다.
AI 반도체는 AI 모델(소프트웨어)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전용 하드웨어다. 기계학습과 인공 신경망에 최적화된 구조를 활용해 전력은 적게 소모하면서 더 빠르게 AI를 실행할 수 있다. AI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AI 반도체 시장도 함께 급성장하고 있다. 현재는 미국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와 구글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지만,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다른 빅테크도 자사 AI 반도체를 공개하며 시장 진출을 선언한 상황이다.
한편, SKT에서 분사 당시 50여명의 인력으로 시작한 사피온코리아는 올 1분기 대규모 경력 공채를 실시하며 반도체 개발 인력을 크게 충원했다. 늘어난 인력에 맞춰 사업 거점도 경기도 분당 SK플래닛 사옥에서 판교이노밸리로 옮기고 SK 계열 팹리스로서 본격적인 사업 행보에 나선다.
SKT 관계자는 "사피온은 SK ICT 연합으로부터 대규모 초기 투자를 받아 당분간 운영자금에 대한 걱정이 없는 상황이다. 현재 새한창업투자와는 지분 투자 논의를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