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⓹춘향의 낭군이 조성한 관방제 숲

2021-12-1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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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월산 골짜기를 내려온 계곡물이 여러 물줄기와 합해져 담양천을 이룬다. 담양천은 영산강의 상류다. 용추봉 용소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담양을 가로질러 남도 300리를 거쳐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담양천은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여드는 데다 제방이 부실해 비가 많이 올 때마다 마을이 침수하는 물난리가 연례행사였다. 조선 영조 32년(1756년) 담양 부사였던 이석희(李錫禧)가 편찬한 《추성지(秋成誌)》는 관방제림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추성은 담양의 옛 이름이다. 

북천(北川)은 용천산(龍泉山)에서 물이 흘러내려 담양부의 북쪽 2리를 지나며 불어 넘쳐 해마다 홍수가 나 내와 담양부 사이에 있는 60여호를 휘몰아 사상자가 나왔다. 부사 성이성(成以性·재임 1648년 7월~1650년 1월)이 법을 만들어 매년 봄에 인근 백성을 출역시켜 제방을 쌓아 수해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관방제림의 둑길은 전국에서 가장 보존이 잘돼 천연기념물이 됐다. [사진=황호택]

1861년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1804~1866)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담양 일대를 흐르는 영산강의 유로(流路)에 '북천(北川)' '죽록천(竹綠川)' '동강(桐江)' 등의 이름을 달아놓았다. 조선 시대에는 유로의 구간마다 다양한 이름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용천산(龍天山)은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와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용산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풍수지리상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관방제림(官防堤林)은 조선 인조 28년(1648년) 담양 부사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1595∼1664)이 처음 제방을 축조했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철종 5년(1854년) 부사 황종림(黃鍾林)이 제방을 중수(重修)했다. 관에서 주도해 쌓은 제방이라 이름이 관방제림이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도 홍수로 무너진 제방을 보수하고 나무를 심었다는 중수비가 남아 있다.  
 관방제림에는 느티나무, 푸조나무, 팽나무, 벚나무, 은단풍 등 낙엽성 활엽수 160그루가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보호수에는 모두 번호가 붙어 있다. 번호는 177번까지 있지만 17그루가 고사한 것이다. 
 

관이 주도해 조성한 강둑이라는 의미로 관방제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진=황호택]

고사목에는 벚나무가 많다. 화려하고 꽃을 많이 피우는 식물들의 공통점은 수명이 짧다는 것이다. 162번과 164번 느티나무도 뿌리가 마르고 이파리가 나지 않아 고사목 판정을 받았다. 담양군은 가능하면 후계목으로 수명이 길고 강한 느티나무를 심을 계획이다. 

원형 보존 잘된 아름다운 제방림

 관방제림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나무는 푸조나무로 100그루가 넘는다. 푸조나무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따뜻한 해안의 해발고도 700m 이하 지대에서 자라는 아열대 식물이다.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는 월동(越冬)이 불가능하다. 습기가 없는 땅에서는 생육이 잘 안되기 때문에 담양천 같은 천변에서 잘 자란다.  
 2021년에는 푸조나무 수십 그루가 5월에도 잎이 돋아나지 않아 담양 사람들의 애를 태웠다. 이해 1월 초 담양의 기온이 영하 19도까지 떨어지면서 푸조나무의 나뭇가지가 동해(凍害)를 입었기 때문이다.  
 전남에는 완도 갈지리, 곡성읍 읍내리와 오곡면 외천, 광양 인서리, 광주 경양제 등에 제방림이 있지만 관방제림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고 규모도 제일 커서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됐다. 
 

 관방제림 둑 밑으로 담양천이 흐른다. 천변에 메타세쿼이아를 심고 데크길을 조성했다. [사진=황호택]

관방제림은 아름다운 숲길이 2km나 이어진다. 옆으로는 담양천이 흐른다. 관방제림을 구경하러 담양을 찾는 이들이 많을 만큼 담양의 상징물이 됐다. 2004년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관방제와 담양천 사이에 메타세쿼이아를 심고 산책용 데크와 자전거도로를 조성해 놓았다. 관방제 맞은편 제방에는 플라타너스 길이 있다. 
 담양천의 제방을 쌓아 상습 수해 지역을 물난리에서 구해준 성이성 부사는 다른 임지에 가서도 선정을 베풀었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이듬해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을 지냈다. 외직으로 합천, 담양, 창원, 진주, 강계 등 다섯 고을의 원(員)을 지냈다. 강계 부사를 할 때는 삼세(蔘稅)를 모두 면제해주어 백성들로부터 ‘관서활불(關西活佛)’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담양부사 성이성은 춘향전 모델

성이성은 어렸을 때 남원부사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와 남원에서 자랐다. 연세대 국문과 설성경 명예교수는 《춘향전》의 원작자를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조경남(趙慶男·1570~1641) 진사라고 지목한다. 조 진사는 조선 선조·인조 시대의 국내외 상황과 정세를 담은 야사집 《난중잡록(亂中雜錄)》과 《속잡록(續雜錄)》을 저술했다. 설 교수는 《춘향전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남원부사를 지낸 성안의(成安義·1561~1629)의 아들 성이성이 ‘조경남 작 춘향전’의 이 도령 모델이라는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12~16세 때 남원에서 살면서 조경남으로부터 글을 배운 성이성은 아버지가 광주(廣州) 목사로 발령이 나면서 남원을 떠났다. 성이성은 1627년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그 후 호남지방에 암행어사로 두 번이나 내려온다. 
 성이성이 쓴 《계서일기(溪西日記)》에는 첫 번째 암행어사로 내려갔을 때 스승 조경남을 만나 광한루에 함께 누워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두 번째 암행어사로 갔을 때는 조 진사가 죽고 없어 두 아들과 만났다. 오후에는 광한루에서 늙은 기녀 여진(女眞)과 늙은 아전 강경남을 맞았다. 이날 광한루에서 소년시절 일을 돌이키며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관방제림에는 성이성 부사 시절에 심은 300년 수령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사진=황호택]

조경남은 《속잡록》에서 명나라 장수가 조선에 와서 정치가 혼란한 것을 보고 읊었다는 한시 ‘오륜전비(伍倫全備)’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향내 나는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요(淸香旨酒千人血)
잘게 다진 진귀하고 맛좋은 음식은 만백성의 살이다(細切珍羞萬姓膏)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燭淚落時民淚落)
풍악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성이 높다(歌聲高處怨聲高)


 성이성의 5대손인 성섭은 《필원산어(筆苑散語)》에 고조(高祖)가 암행어사가 되었을 때의 행적을 적어놓고 있다. 암행어사가 어느 곳에 이르렀는데 호남 열두 고을 수령들이 크게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술잔과 쟁반이 어지러웠고 기녀와 악공들의 춤과 노래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처럼 둘러쌌다. 정오 무렵 암행어사가 걸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음식을 청하니 사또들이 자리를 허락했다. 그리고 암행어사가 운자(韻字)를 청하니 ‘기름 고(膏)’와 ‘높을 고(高)’라고 했다. 성이성 어사가 지은 시는 춘향전에 나오는 것처럼 원시 ‘오륜전비’에서 ‘청향지주’를 ‘금준미주(金樽美酒·금 술동이에 담긴 좋은 술)’로 ‘세절진수’는 ‘옥반가효(玉盤佳肴·옥쟁반의 맛있는 안주)’로 바꾼 것이다. 
 실제로 성이성이 호남에 암행어사로 갔을 때 이런 식의 ‘어사 출도’를 한 적은 없지만 그의 후손이 춘향전과 비슷한 스토리를 기록했다는 것은 성이성이 이 도령의 모델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성경 교수는 풀이한다. 설 교수는 조 진사가 성이성 어사한테 들은 이야기에다 남원 지방에 내려오는 박색터 설화, 암행어사 노진(盧禛)과 기생의 설화 등을 엮어 춘향전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어디까지나 추론(推論)이어서 성이성이 이 도령의 모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지를 놓고 논란이 있다. 성이성의 캐릭터는 이몽룡이 받았는데도 성(成) 씨를 춘향에게 붙여줌으로써 명문가 자손의 스캔들을 가려주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경북 봉화군은 군 홈페이지에서 성이성의 종택인 계서당(溪西堂)을 이몽룡의 생가라고 소개하며 관광자원화하고 있다. 춘향전의 무대 남원, 성이성의 고향 봉화, 성 부사가 제방을 쌓아 백성을 물난리에서 구해준 담양이 한 인물을 통해 연결되는 셈이다. 관방제 아래 조각공원 같은 곳에 성이성 부사를 기리는 기념물을 만들면 스토리텔링, 스토리셀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관방제림 아래 하천 고수부지에는 한국에서 제일가는 죽물시장이 있었다. 대구의 약령시장과 역사를 겨룬다. 담양 각지의 마을에서 만들어진 바구니, 소쿠리, 삿갓 등 죽물이 수레나 등짐으로 5일장을 찾아왔다.   
 

담양천 둔치에 있던 죽물시장이 사라지면서 국수거리는 강둑 위로 올라왔다. [사진=황호택]

관방제림이 시작하는 곳에 국수거리가 있다. 조선시대부터 관방천 둔치는 죽물시장이었다. 바쁜 상인이나 장꾼들이 후루룩 먹기 좋다보니 평상 하나 놓고 장사하던 국수가게가 많았다. 둔치의 죽물시장이 사라지고 나서 국수 가게들은 관방제 위로 올라왔다. 지금은 관방제림을 찾는 관광객들이 주요 고객이다. 대를 물려 장사를 하는 국수집이 10여곳 몰려 있다. 국물은 멸치와 파뿌리, 양파, 무를 넣고 삶아 만든다. 장터에서 유래한 음식이라 값이 싸다. 면발은 중면을 써서 소면보다 굵다. 면발 맛의 깊이가 소면과 다르다. 국수거리에서는 국수 외에 찐 달걀도 인기다. 멸치 국물에 초벌로 찐 달걀을 이틀간 더 쪄서 노른자에도 멸치맛이 배어 들어가게 한다. 댓잎 멸치 고사리 오가피 헛개나무를 넣고 삶은 약달걀을 파는 집도 있다. 
 
술지마을의 수호신 봉안리 은행나무

 담양군의 마을들에는 몇백 년 묵은 당산나무가 있는 곳이 많다. 예로부터 당산나무가 없으면 부정을 타서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토속신앙의 뿌리가 깊어 마을마다 큰 나무들이 보존된 것 같다. 
 담양군 무정면 봉안리 면소재지 술지마을에는 높이 33m에 수령이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마을 한가운데 서 있다. 나무 밑에는 은행잎과 은행이 수북이 떨어져 있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다.  
 나무 둘레가 8.5m가 되는데 금줄이 쳐져 있다.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낸 뒤 해가 다 가는데도 그대로 매여 있다. 나무 밑에 한문으로 '堂山祭壇(당산제단)'이라고 쓰인 상석이 놓여 있다. 거의 다 죽어가던 나무를 외과수술하고 영양제 주사를 놓아 살려 놓았다고 한다. 갈라진 틈을 메우는 재료는 시멘트가 아니라 톱밥, 석고, 황토, 미생물을 적정 비율로 섞어 만든 것이다. 

봉안리 술지마을 한가운데 서 있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사진=황호택]

천연기념물 제482호 안내판에는 경술국치, 8·15 광복, 한국전쟁 등 나라에 큰일이 터질 때마다 은행나무가 울었다는 전설이 이 마을에 내려온다고 쓰여 있다. 마을에 도둑이 한 번도 들지 않아 술지마을 사람들은 은행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을의 복판에는 은행나무가 웅장한 모습으로 버티고, 마을 외곽의 네 방위에 느티나무가 서 있어 함께 마을을 지키는 모습이다. 
 은행나무는 줄기의 갈라진 틈새를 벌들에게 내주고 있다. 은행나무를 지나던 여인네가 여름에는 거기서 꿀이 흘러내린다고 말했다. 그녀는 필자에게 "오래된 고목이어서 약 기운이 많으니 은행알을 주워가라"고 권했다. 냄새가 심한 은행을 넣어갈 데도 없었지만 말인심이 싫진 않았다. 
 마을마다 당산제는 이장이 주관하는데 당산제에 필요한 제물을 장만하는 화주(化主)는 집안에 유고가 없는 사람을 선정하고 제관은 마을 어른이 맡았다. 당산제가 끝나면 마을 회관에 모여 제물을 음복하고 북과 장구를 치며 밤새 놀았다. 새해를 맞아 풍년을 이루고 재앙이 없기를 기원하는 축제 같은 행사였다.  

이성계의 전설 서린 대치리 느티나무

한재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는 수령 600년의 천연기념물 느티나무. [사진=황호택]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한재초등학교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여 년 정도로 추정된다. 태조 이성계가 전국의 명산을 찾아서 공을 들일 때 이곳에 들른 기념으로 심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나무 높이는 26m, 가슴 둘레는 8.3m.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커서 천연기념물 284호로 지정됐다. 
 우람한 천연기념물 느티나무가 들어선 한재초교는 1920년에 개교했다. 2020년에 세운 개교 100주년 기념비가 눈길을 끈다. 느티나무 옆에는 고려시대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상이 서 있다. 미륵불은 원래 대치리 마을 초입에 있었으나 교정으로 옮겨왔다. 대치리(大峙里)는 한재골이라 불렸는데 학교 이름에도 ‘한재’가 남아 있다. 담양에서 장성으로 넘어가는 높은 재 아래에 있던 마을이다.  

한재초교 느티나무 옆에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석불상이 오랜 세월 돌이끼를 덮고 있다. [사진=황호택]

허리 아래가 묻혀 있던 불상이 이사오면서 전신이 드러났다. 영천 이씨인 이언좌의 꿈에 집을 지으면 무너지는 일이 반복돼 집터를 파보니 석불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안내판에 적혀 있다. 오랫동안 민간 신앙의 대상이었고 세월의 더께가 붙은 아름다움을 지녀 담양군 향토유형문화유산(제2-4호) 정도로 대우하기에는 서운하다는 생각이 든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 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담양군의 민속문화》 담양군, 2003
《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경남 성이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설성경 《춘향전의 비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윤재득 <담양천의 역사와 문화> 《하천과 문화 제5권 제4호》 한국하천협회, 2009
<인조실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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