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6대(代)를 거치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 그리고 군사 및 외교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동시에 언어학자이며 집현전 학사로 한글창제에 큰 공로를 세운 팔방미인형 인물이다. 성격이 활달했고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한 것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거침이 없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했다. 호를 보한재(保閑齋:한가함을 유지하다)라고 할 만큼 평생 바쁘게 살았다. 이런저런 이력을 반영한 묘소는 정승급 무덤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곁의 경사지에 서있는 신도비(神道碑:무덤 근처에 세운 비석)는 4면의 면적이 동일한 직사각형 기둥모양의 사면비(四面碑)다. 1477년에 건립되었으니 현존 사면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위에 얹는 덮개까지 원석 그대로 간단하게 지붕처럼 다듬었고 밑받침만 따로 만들었다. 지금이야 인테넷 검색만 해도 인적정보가 넘쳐나지만 그 시절에는 공식적인 유일한 개인종합정보가 실려있는 소중한 자료가 비석이다. 원형 그대로 잘 보존했지만 비바람과 긴 세월 앞에서 자연스럽게 표면이 닳으면서 많은 글자들은 이미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절집에서 지혜의 상징은 문수보살이다. 문수는 늘 푸른 사자를 타고 다녔다. 이처럼 선생에게는 푸른 옷을 입은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늘 함께했다고 한다. 언젠가 정시(庭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에서 치르던 과거시험)가 있을 때 일이다. 경복궁 입구에서 푸른 옷 동자가 선생의 소매를 당기면서 ‘귀한 관상의 소유자이니 평생 함께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동자는 다른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밥을 덜어주면 먹는 소리는 나는데 음식이 줄지는 않았다. 이런 것을 견식(見食:눈으로 먹는 것)이라고 한다. 집안의 길흉사를 미리 알려주어 대비하도록 했고 나랏일도 사전에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리고 중요한 개인적인 일도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귀띔했다. 그렇게 평생을 함께했다. 자손들에게 자기가 죽거든 청의동자 제사도 함께 지내달라고 부탁했다. 선생이 별세하자 청의동자도 함께 수명을 다했다. 후손들은 선생의 기일에 따로 상을 차려 청의동자 제사도 같이 지냈다. 강효석(姜斅錫)이 지은 <대동기문(大東奇聞)> 1권 ‘신숙주청의만수(靑衣挽袖신숙주에게 푸른옷을 입은 동자가 소매를 끌어당기다)에는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를 수록해 두었다.
단종에서 세조로 왕권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청의동자의 조언(?)’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의적 명분론에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지지는 않았다. 집현전 출신 동료들과 다른 정치적 길을 선택한 이후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적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명분론자들에 의해 사실과 다른 모함에 시달렸고 남겨놓은 업적마저 빛이 바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명분이 아니라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결과물을 통해 한평생 열심히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았노라고 자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는 늘 부채의식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성남(城南) 고산사(高山寺)에 아들과 손자를 맡기면서 학추(學追)스님께 보낸 글에서 그 심경의 일단을 내비쳤다.
나는 지금 불가의 승려가 되고 싶으니(아금욕위불화남我今欲爲佛和南)
반백년의 부귀와 명예는 잠깐 달콤함이라.(반백공명일향감 半百功名一餉酣)
뜻밖에 얻은 높은 벼슬은 평소의 바람 아니었으니(헌면당래비소원 軒冕倘來非素願)
덧없는 인생의 득실은 말할 것이 없네.(부생득실불용담 浮生得失不容談 )
그는 아들인 형(泂)과 손자 종흡(從洽)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 일부러 고산사(高山寺)로 보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자격으로 비용을 부담하였으니 이는 신씨 집안에서 내린 ‘사가독서’가 되었다. 세종의 성은(聖恩)으로 진관사에서 글을 읽었던 일은 평생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에 그 은혜를 보답코자 또다른 유산을 물려준 것이리라.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