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베이징 퉁저우구에서는 할리우드 영화 해리포터 속 등장 인물을 코스프레한 중국 젊은이들의 달리기 시합이 열린다.
지난달 20일 문을 연 베이징 유니버셜 스튜디오 입구에서 펼쳐지는 광경이다.
인파가 몰리기 전 기념 사진을 찍기 위해 법석을 떤 것이다.
해리포터 망토를 입고 머플러까지 두른 학생들,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 3대가 함께 나들이 온 가족 단위 관람객까지 지구본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개혁·개방 이래 중국 내 반미 정서가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 맞나 싶은 모습이다.
셀카 삼매경에 빠져 있던 한 중국 대학생에게 물었더니 "미국·영국의 우월주의와 패권주의를 싫어하는 것과 그들의 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건 차원이 전혀 다른 얘기"라며 정색한다.
이중적인 건지, 실리적인 건지 구분이 쉽지 않은 답변이다.
어쨌든 한 장에 12만원짜리 입장권을 끊고 들어와 다양한 할리우드 캐릭터가 줄지어 지나가는 퍼레이드 행렬을 향해 열광적으로 손을 흔드는 중국인들의 모습에서는 반미 감정도 애국주의도 느끼기 어려웠다.
고궁(자금성)과 톈안먼 광장, 만리장성과 함께 베이징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유니버셜 스튜디오 방문기를 적어 본다.
◆평균 대기 1시간, 라면 한 그릇에 1만2000원
토요일이었던 지난 23일 오전 8시 15분 베이징 유니버셜 스튜디오 앞에 도착했다.
정식 개장 시간은 9시이지만 이미 입장을 기다리는 관람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30분을 기다린 뒤 신분증 검사와 안면 인식을 거쳐 각종 상가가 밀집한 시티워크(City Wark) 구역으로 들어섰다. 해리포터 코스프레를 한 이들이 뛰기 시작한 그곳이다.
지구본 주위에서의 기념 사진 촬영이 끝나면 본격적인 테마파크 관람이 이어진다.
티켓을 구매할 때 받아둔 QR코드만으로 입장이 가능하다. 종이로 된 입장권은 따로 없다.
베이징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면적은 4㎢로 전 세계 5곳의 유니버셜 스튜디오 중 최대 규모다.
일본 오사카의 2배, 싱가포르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5배 크기다. 중국 남부의 새 명물이 된 상하이 디즈니랜드(1.16㎢)보다도 3배 이상 넓다.
테마파크 구역에 들어서니 한눈에도 광활함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두 다리가 전에 없이 고생할 게 뻔했다.
이미 다녀간 관람객들을 통해 입소문이 퍼진 4대 놀이기구가 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쥐라기월드의 '쥐라식 플라이어'로 거대한 인공섬 안팎을 넘나들며 운행하는 롤러코스터다.
개장 직후로 오전 9시를 갓 넘긴 시각이었지만 대기 시간만 90분이 소요됐다. 기다리는 동안 안내 직원이 외치는 예상 대기 시간은 100분, 120분 등으로 계속 늘어났다.
트랜스포터 테마 구역에는 급발진의 묘미로 유명한 롤러코스터 '디셉티코스터'가 있다. 지난 12일 운행 중 갑자기 멈춰 관람객이 긴급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던 시설이다.
역시 70분간의 대기 끝에 탑승이 가능했다. 다만 1200위안짜리 '익스프레스' 티켓을 구매한 이들은 줄을 서지 않고 놀이기구를 이용할 수 있다. 주말(638위안)이나 평일(528위안) 성인 입장료보다 2배 넘게 비싼 가격이다.
굽이굽이 줄을 선 일반 관람객들의 옆으로 신속하게 이동하는 익스프레스 티켓 구매자들을 바라보며 몇몇 중국인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웬 자본주의의 극치"냐고 혀를 찼다. 질시인지 탄식인지 모를 읊조림이었다.
베이징의 평균 주민 소득을 감안하면 500~600위안대 입장료 역시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테마파크 내 물가도 상상 초월이다. 생수와 콜라 한 병의 가격이 각각 10위안과 15위안인데, 편의점 가격의 5배다. 노점에서 판매하는 훈제 닭다리 하나가 75위안(약 1만3700원)이다.
점심 때가 되자 쿵푸팬더 테마 구역의 식당들은 허기를 채우려는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쿵푸팬더 주인공 '포'의 양아버지인 거위 '핑'이 운영하는 식당과 똑같은 인테리어의 푸드 코트의 경우 광둥식 완탕면과 쇠고기 라면 한 그릇이 각각 68위안, 중국식 만두 한 접시가 48위안, 과일주스 한 잔이 25위안이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한 가족의 영수증을 확인하니 302위안(약 5만5000원)이 찍혀 있다.
성인 2명, 아이 2명의 4인 가족 기준으로 베이징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두 끼 식사를 하고 하루를 보내는 데 대략 3500위안(약 64만원) 정도가 든다.
베이징 주민의 1인당 연간 가처분 소득 중 10분의1을 하루 나들이에 쏟아붓는 셈이다.
유니버셜 스튜디오 측은 향후 연간 방문객을 1200만~1500만명으로 추산한다. 하루 평균 3만4000~4만1000명이 다녀갈 것으로 예상했다.
개장 초기인 이달 말까지는 입장 인원을 하루에 1만명 안팎으로 제한하고 있다. 코로나19 방역과 시설 안전성 검증 등을 위한 조치다.
증권업계에서는 베이징 유니버셜 스튜디오 개장으로 파생되는 경제 효과가 최대 300억 위안(약 5조5000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지만, 중국 내 극심한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는 회의론도 함께 나온다.
◆해리포터 마을에선 뭘 해도 희희낙락
4대 놀이기구 중 나머지 두 개는 해리포터 테마 구역에 있다.
롤러코스터의 일종인 '플라이트 오브 더 히포그리프'와 4D 기술이 적용된 놀이기구 '해리포터와 금지된 여행'이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다른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마찬가지로 베이징 유니버셜 스튜디오 역시 해리포터 관련 콘텐츠가 백미로 꼽힌다.
영화에 나오는 마법 학교 호그와트와 마법사들의 마을 호그스미드는 세트장보다 더 실감나게 조성돼 있다.
해리포터 테마 구역은 입장을 위해 별도로 한 시간 넘게 줄을 서야 한다.
입장 뒤에도 대기의 연속이다.
호그와트 성과 레이저 쇼 관람, 놀이기구 탑승은 물론 기념품 판매점 출입과 영화 속 음료인 '버터비어' 구매에도 길게는 70~80분, 짧게는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그리핀도르와 슬리데린 등 호그와트 기숙사별 교복을 갖춰 입은 관람객들은 군말 없이 대기 행렬에 동참한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영국 작가 조앤 롤링의 동명 소설을 할리우드 거대 자본이 영화로 제작해 아시아를 비롯 전 세계에 걸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다.
그렇다 해도 무역전쟁으로 촉발된 미·중 갈등 격화, 홍콩 탄압 문제를 둘러싼 영국과 중국 간 신경전 등을 생각하면 해리포터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향한 중국인들의 환호는 예상 밖이다.
인간 세상과 마법의 세계를 오간다는 열차 소품에 걸터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국 젊은이들에게 다가갔다.
방송·언론 인력을 양성하는 촨메이(傳媒) 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그들 중 한 명은 "해리포터는 어린 시절의 추억 그 자체"라며 "국가 간 관계 때문에 추억까지 내다 버릴 순 없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또 다른 학생은 "같은 또래 친구들보다는 뉴스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라고 생각한다"며 미·중 혹은 영·중 갈등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중국이 부상하면서 서구와 충돌하는 건 필연적"이라며 "중국이 더 모범을 보인다면 차이나 콘텐츠 파워가 할리우드를 능가하는 날도 올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중국이 어떤 식으로 소프트파워를 키워야 할지 묻고 싶었는데, 레이저 쇼 관람시간이 됐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 아쉬웠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 대한 충성 맹세, 위구르족 인권 문제를 비판하는 기업에 대한 보이콧 등 맹목적 애국주의를 지양하고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문자답'을 되뇐 뒤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