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덩샤오핑이 지금의 중국을 본다면

2021-09-2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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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6차 유엔총회에서 화상으로 연설을 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뉴욕·AP·연합뉴스] 
 

중국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1904~1997)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그저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명하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상관없이 인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문화대혁명(1966~1976)을 주도한 극좌세력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이 말로 자신이 원칙(Dogma)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실용주의자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서방세계의 눈에 비친 그는 중국 공산당의 절대적 파워를 신봉하는 권위주의적인 인물임이 틀림없지만 경제적으로 뒤처진 중국을 개혁과 개방을 통해 슈퍼파워로 도약시키면서 20세기 후반 세계 경제 역사를 바꾼 가장 중요한 정치 지도자의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논란의 소지는 있지만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의 지도자로서의 품격, 그리고 정치적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결단력이 없었다면 중국이 수십년 동안 매년 10%대 이상의 성장을 이룩하지 못했고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아마도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덩샤오핑의 수많은 슬로건 중에서 중국인들로 하여금 숨겨진 잠재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 말은 사회주의 사상에 매몰돼 있던 인민들의 인식변화를 촉구했다. 그는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하면서 소위 '선부론(先富論)'을 제창했다. 일부 사람과 일부 지역을 먼저 부유하도록 만들자는 주장이다. 먼저 쌓은 부가 뒤따르는 부를 낳게 하여 궁극적으로 중국 전체 인민을 함께 부자로 만들자는 개념이다. 덩샤오핑은 1949년 신중국을 건립한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의 사망(1976년) 후 2년 만에 실권을 장악했다. 당시 그가 이런 파격적인 주장을 앞세운 이유는 중국이 마오시대의 계급투쟁과 이념적 교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전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어두운 역사 

마오쩌둥은 '모두가 잘살자'는 '공부론(共富論)을 내세우며 부강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외쳤지만 결과는 혹독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1월 '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농업국가에서 중공업에 기반을 둔 산업국가로 탈바꿈을 시작한다. 1958년 시작된 '2차 5개년 계획'은 '대약진 운동'으로 불렸는데 열악한 생산 환경에서 너무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대중의 혹독한 노동과 열정에만 의존하다 대실패로 끝났다. 대약진 운동과 더불어 마오 사상을 교조적으로 따르는 홍위병(紅衛兵)을 앞세워 전근대적인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한 '문화대혁명'은 중국 근대역사의 가장 어두운 역사로 꼽힌다. 

덩샤오핑은 1978년 공산당 11기 3중전회 폐막연설에서 “사상 해방”이란 말로 시장경제를 사회주의에 접목시키는 대변혁의 시작을 알렸다. 중국이 이념 투쟁의 어두운 역사를 접고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융합에 들어간다. 덩샤오핑은 실권을 잡은 직후 국가의 발전된 미래를 위해서는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며 대학입시 제도를 10년 만에 전격 부활시켰다. 뒷문으로 대학으로 들어가는 관행을 뿌리뽑고 공정한 입시경쟁을 위해 수험점수를 본인에게 통보하라고 지시했다. 미국 유학을 위한 영어교육이 성행하면서 개인교습과 사교육 시장도 팽창했다. 덩샤오핑 자신은 공산당 핵심 엘리트 출신이다. 그의 '선부론'은 일종의 엘리트주의 개막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경제 도입과 함께 새로운 엘리트 계층은 당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창업과 도전 정신을 불태웠고, 알리바바의 마윈이나 화웨이의 런정페이 같은 걸출한 기업가들이 속출했다. 개혁·개방의 최대수혜자는 단연코 엘리트층, 즉 당·정 간부나 억만장자로 변한 개인기업가였다.

지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2030년 무렵에는 GDP가 미국까지 따라잡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러한 놀라운 성장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놀라운 힘이기도 하다. 덩샤오핑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미증유의 노선을 채택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중국은 과거 소련연방처럼 경직된 정치 시스템과 극심한 경제난으로 몰락의 길을 피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중국은 개혁·개방과 함께 적극적으로 민간기업을 키우고 그들이 세계시장에 진출하도록 했다. 생산과 소비 수출 증가 속도는 다른 국가를 압도했다. 주식·채권 등 자본시장의 대외개방이 확대되면서 월스트리트를 비롯, 서구의 거대한 투자자본이 중국으로 이동하고 동시에 중국의 해외투자도 날개를 달았다. 겉으로 보면 시장경제를 접목시킨 이후 중국은 마치 나비가 번데기 허물을 벗고 밖으로 나온 것처럼 자본주의로 금세 탈바꿈했다. 그런데 중국이 과연 자본주의를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는 의문부호가 따른다. 덩샤오핑도 1990년 12월 24일 당간부들과의 회의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한다고 해서 우리가 자본주의를 길을 걷는다고 여기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다. 

중국은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경제적 자유는 허용하는 대신에 정치적 사상적 자유는 단호히 불허하였다. 그리하여 서방세계는 아직도 중국의 체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시장경제라는 베니어판으로 겉치장을 한 공산주의 국가? 아니면 공산당과 정부가 통제하는 자본주의 국가? 확실한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공산당은 항상 국가의 핵심이다. 중국 공산당은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해 72년째 통치하고 있는 세계 최대 정치조직이며 최장 집권당이다. 중화 민족의 중흥을 앞세운 시진핑 주석은 2013년 집권 이후 자신을 중심으로한 일당지배체제를 공고히 해왔다. 최근에는 마오쩌둥 사후 볼 수 없었던 최고 권력자에 대한 우상화 작업도 활발하다. 덩샤오핑의 선부론에 맞서 시 주석은 분배를 통해 모두가 평등하게 잘살자는 '공동 부유'를 강조하고 있다. 내년 시 주석의 3연임을 결정하는 주요 정치행사를 앞두고 중국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시대로 역주행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쌓은 인터넷 기반의 빅테크 기업과 온라인 사교육 시장을 마구 흔들어대는 모습은 우선적으로 그동안 고속성장 과정에서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빈부와 교육 격차 그리고 인구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되고 있다. 즉, 시 주석이 장기집권으로 향하는 데 걸림돌이 제거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 서방세계는 덩샤오핑이 주도한 개혁·개방물결이 궁극적으로 중국을 진정한 자유경제 체제로 전환시키고 권위적인 지배체제에서 벗어나게 만들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우월성이 공산당 일당체제를 압도해 경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국이 자유민주체제로 차차 이동할 수도 있다는 헛된 믿음이었다. 중국은 2019년 홍콩보안법 폐지 관련 민주화 시위대의 요구를 거부하고 20여년 만에 홍콩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를 사실상 허물면서 이런 믿음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서방에 인식시켰다. 일국양제는 영국에 빼앗긴 홍콩을 되찾기 위해 덩샤오핑이 짜낸 묘안이었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미국이 중국을 향해 무역전쟁을 선포한 것도 중국의 변화가 서구가 원하는 수준이나 방식과 갭이 너무 커지고 있다는 인식에서 생긴 갈등이 근본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실용주의자 덩샤오핑, 자본주의는 거부했다 

서방세계만의 잣대로 중국을 마오쩌둥 시대의 중앙집권화된 정치 시스템과 교조적 이념적 쏠림에서 벗어나게 한 '실용주의자' 덩샤오핑을 평가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는 적극적이고 유연한 개혁·개방 정책으로 수억명의 인민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근본적으로 서방의 민주주의 체제를 단호히 거부한 사회주의 혁명가이기도 하다. 그는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파리 유학시절 칼 마르크스를 알게 됐고 모스크바에서 직업 혁명가로 활동하다가 1927년 귀국해 공산당 지하운동에 참여한다. 1933년 마오쩌둥을 만나 대장정과 국공내전에 참여했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큰 공로를 세운 공산당의 핵심인물로 우뚝 선 인물이다. 한때 주자파(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당권파)로 몰려 실각하기도 했지만 그는 주요 서방국가에 뿌리를 내린 이념인 민주주의와 인권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공산당의 일당 지배체제가 반체제세력에 의해 위협받는 일은 단호히 거부했다. 마오쩌둥 집권시기 반체제인사로 낙인 찍힌 인사들에 대한 당의 피비린내나는 대규모 정치적 숙청작업을 나 몰라라 했고, 천안문사태 당시에는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을 지지하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의 원로이며 재정 전문가인 천윈(陳雲·1905~1995)은 1970년대 후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설계에 참여했지만 자유무역구 설치 등 급진적인 변화에 반대하며 덩샤오핑에 맞선 인물로 알려져 있다. 천윈은 경제발전은 반드시 당의 통제와 계획지도 아래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중국의 기업들은 마치 새장에 갇혀있는 신세인 것이다. 실제로, 중국이 지금까지 자본주의를 향해 40년 넘게 실험했다고 하지만 중국 기업들 중에 서방세계 잣대로 '민간 기업'이라 할 수 있는 기업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금융이나 에너지 텔레콤 섹터는 국영기업들이 거의 장악하고 있고 알리바바나 화웨이 레노보 같은 대형 민간 빅테크들도 당이나 정부와의 연결고리를 단절하긴 불가능하다. 수출 호황으로 잘나가는 중소기업들도 지방정부에 한번 찍히면 사업이 낭패보기 일쑤다.

앞에서 언급해듯이 덩샤오핑은 중국경제에 시장경제를 심은 인물이지만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틀이 무너지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를 중앙정부 통제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게 하는 목표의 분권화 계획은 그의 개혁·개방의 핵심이었다. 마오 시대 우상화 체제와 독선이 가져온 참혹한 결과를 목격한 덩샤오핑은 실권을 잡은 뒤 실질적으로 1인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국가주석과 당총서기 등의 요직에 오르지 않은 채 당의 ‘집단지도체제’를 실시했다. 덩샤오핑이 반혁명분자로 숙청당했던 문화대혁명 시대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녀사냥으로 '10년의 대재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때 중국의 경제는 올스톱했다.

시 주석이 '공동부유' 말을 꺼낸 이후 중국 대기업들의 기부금 헌납이 줄을 잇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K자 경기회복으로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억만장자 기업인들에 대한 군기 잡기는 당장 중국 중산층과 일반서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전체주의적 통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중장기적으로 적극적인 투자와 창업을 통해 부(富)를 쌓고 싶은 중국인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이와 함께 점증하는 서방세계의 중국에 대한 반감은 최대 불안요소다. 중국은 미국과의 강도 높은 무역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출보다는 내수에 사활을 걸고 있으나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아직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수준인데 벌써 부의 분배를 얘기하는 모습은 성급해 보이기도 한다. 과연 중국은 붉은 이념의 깃발 아래 기업이라는 새를 국가라는 새장 안에 가두어 길들이면서 인위적으로 모두가 잘사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성공할 수 있을까. 최근 추석 연휴를 달궜던 부동산 기업 펑다의 파산 위기가 고비는 넘겼지만 중국 경제의 더 큰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중국의 기업인들에게 시장의 운동장을 만들어준 덩샤오핑이 지금 중국을 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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