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을 존경해 뵈었더니 '진짜 하늘같은 다석' 말해줬다

2021-05-1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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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⑱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2>

-박영호 선생이 다석을 처음 만나 배움을 시작했을 때가 대략 중학교 시절이라고 들었는데요.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분과 인연을 맺었는지요? 
“어릴 때의 일이라면 눈물부터 글썽거리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제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공부는 안 가르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근로봉사라 하여 일을 시켰습니다. 강변을 개간하고 솔가지를 따오게 하고 농사일을 강요했지요. 젊은이들이 군인으로 징집되고 보국대에 끌려가고 농사 지을 인력이 모자라니까 초등학생들이나 중학생을 끌어다 농사일을 시켰습니다.
일본인 선생들에게서 일어(日語)를 배웠습니다. 우리말 우리글을 못 쓰게 했습니다. 나는 타고 나기를 책 읽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서점에 가서 일어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그때는 서점에 우리글 책이 거의 없었고 일어 책 뿐이었습니다. 영어원서는 없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말로 번역된 톨스토이 참회록이 출판되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지 몇 번을 거듭 읽었습니다. 서점에 가서 일어로 된 톨스토이 전집을 사서 또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우리 집은 종교와 거리가 멀었는데 '한얼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톨스토이가 교회에 나가지 않고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 당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교회가 있었는데 몇 번 나가보고는 톨스토이의 영향으로 그만두었습니다.
그때 장준하씨가 발행하는 잡지 <사상계>가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성에 굶주린 시골 중학생에게는 <사상계>가 교과서 노릇을 해주었습니다. 달마다 <사상계>가 나오기를 연인처럼 기다렸습니다. 1956년 1월호에서 함석헌 선생의 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읽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정신에서 톨스토이의 사상적인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상계사로 편지를 해 함 선생의 집주소(원효로 4가 70)를 알아내 편지를 올렸습니다. 나는 시골서 농사짓고 사는 젊은이인데 톨스토이를 좋아한다고 소개하고 '사상계 잡지에 실린 선생님의 글을 읽고 너무 감동을 받아 이 글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꼭 한번 뵈옵기를 바랍니다’고 썼습니다. 
회신이 왔습니다. 함 선생은 자신도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대구 YMCA의 초빙으로 강의를 하게 되어있으니 한번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위에서 대구로 나가 대구 YMCA에서 함석헌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대구여관에서 함께 일박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평북 정주 오산학교 졸업 때 은사인 다석 류영모 선생이 자기보다 톨스토이를 더 깊이 알고 더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 YMCA에서 금요 연경반 강의를 하는데 자신도 꼭 참석한다고 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나에게는 함석헌 선생만 해도 하늘 같은 존재인데 함 선생이 강의를 듣는 경애하는 스승님이 계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이른바 톨스토이언(Tolstoian)들이 일본 도치기현 시골에서 집단 공동체를 구성해 살고 있다고 함 선생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도서관에서 일본 신문을 읽고 알게 된 것이죠. 나는 함석헌 선생께 배우고 싶은 생각에서 뜻있는 젊은이를 모아서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일하면서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함 선생은 아프리카에서 마하트마 간디가 인권운동을 하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에 투옥된 가족을 위하여 톨스토이 농장을 세워 가족을 먹여 살린 얘기를 하면서 '생각해보자'고 하였습니다.
천안 씨알농장이 그렇게 해서 세워졌습니다. 천안농장에서 10명 가까운 젊은이들 1만 평 정도 되는 산기슭에 복숭아 사과나무를 심어놓은 과수원을 관리하면서 간작(間作)으로 고구마 채소 등을 가꾸었습니다. 씨알농장에서 그야말로 씨알강좌 모임을 열었습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을 비롯하여 수원 서울농대 류달영 교수, 무교회의 송두용, 노평구 선생 등 여러분을 강사로 모셨습니다. 그래서 차차 여러분들과 안면을 익히게 된 것입니다. 다 지나간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다석의 구기동 집앞에서 다석 부부와 박영호(왼쪽).

-다석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문화일보 이규행 사장의 기획으로 박영호 선생이 다석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1994년~1995년) 연재하면서부터인데요. 집필 경위가 궁금합니다.
"나도 80대 후반이 되어 기억이 어슴푸레합니다. 하루는 집으로 ‘문화일보 사장 이규행’이라면서 전화가 왔는데 ‘상의할 일이 있으니 서울에 오면 종로 우체국 근처에 있는 현대상선 건물 5층으로 찾아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가겠다고 하고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찾아갔습니다. 사장실에 들어가니 사장 책상 위에 이 사람이 그동안에 출판한 책을 쌓아놓고 있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규행 사장이 양정학교 출신이라고 하면서 일찍부터 다석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석을 누구보다 존경한 김교신 선생이 양정학교 교단에서 가르쳤고, 류달영 선생도 양정학교 졸업생인 것으로 기억되었습니다. 중국 김성탄이 통곡고인(痛哭古人)이라 한 심정을 알 것 같았습니다. 내게 통곡고인이란 말을 가르쳐준 이는 다석 류영모 선생입니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감격해서 울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규행 사장이 스스로 양정 출신이라는 말을 하자 처음 만난 이 사장이 오랜 지기(知己)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장이 내게 다석사상을 문화일보에 날마다 1면에 연재할 계획이니 하루에 원고를 30매씩 써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너무도 반갑고 고마운 일이긴 한데 아무리 이 사람이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긴다 하여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다석은 YMCA 연경반에서 강의할 때 청산유수처럼 인생철학의 말씀이 한 시간도 두 시간도 술술 냇물 흐르듯이 나왔습니다. 그 말씀을 듣던 함석헌 선생이 일주일 동안 선생님만큼 정신 생산을 하는 이는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석이 살아계시어 구술해준다면 가능하지만 이 사람이 공부하면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이 사장은 곰곰 생각하더니 책상 위에 쌓아놓은 나의 저서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 책들은 서점에서 구입한 박 선생의 저서입니다. 책에서 내가 골라서 신문에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화가 한 사람을 교섭해 놓았습니다. 내용에 어울리는 그림을 곁들이겠습니다. 그 시간에 박 선생은 원고를 집필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기자들에게 안 맡기고 본인이 직접 그 작업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이 작업에 신문사의 운명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 이야기를 듣고 나면 문화일보와 다석사상이 어떤 운명으로 엮여 있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의 생각대로 종교철학 사상이 문화의 핵심이니까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을 싣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 으뜸가는 사업가요 재벌인 현대가 문화창달을 위해 신문사를 세운 것은 환영할 일입니다. 군사정부가 들어서 독재를 한 지 오래되어서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군정의 집권자들이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출마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현대그룹의 창립자인 정주영 회장은 군인이 민간복장으로 갈아입고 위장 민주화를 하는 것이 싫어서 자신이 직접 나서 볼 생각으로 정치에 뜻을 두게 된 것 같습니다.
정 회장이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지낸 류달영 선생 등 나라의 중진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속 뜻을 펼쳐 보이며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확인하였습니다. 류달영 선생으로부터 내가 직접 들었습니다. 류 선생은 '정 회장의 부인이 아주 겸손하며 아래 사람들을 시키지 않고 손수 부엌에서 일하는 것을 보았노라' 면서 부덕(婦德)을 갖춘 훌륭한 부인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류달영 선생은 정 회장에게 정치에 나서지 말라고 말렸다고 했습니다. 류 선생은 국회의원에 출마한 일이 없습니다. 권력을 멀리한 분입니다. 정 회장이 정치에 뜻을 두고 문화일보를 세운 것을 군사정부 사람들이 몰랐겠습니까? 그래서 정치기사를 못 싣게 하는 조건부로 신문사 설립을 허가했습니다. 신문들은 1면에 정치기사를 싣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정치기사를 못 싣게 하는 조건을 붙인 신문은 문화일보가 유일무이(唯一無二)할 것입니다. 군사정부 집권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하겠습니다. 요즘 미얀마 군사독재자들이 바로 그러한 유치한 자들입니다. 군인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잖습니까!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을 보십시오.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승전으로 끝내면서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습니다. 자신을 향한 국민의 사랑이 위정자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아셨지요.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면서 집권투쟁에 나선 파렴치한 정치인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이규행 사장은 다석사상을 연재하면 정치기사 못지않게 인기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용단을 내린 것입니다. 다석 사상이 연재되는 문화일보를 본 사람들이 ‘이 나라에도 이렇게 훌륭한 분이 있었구나’ 하면서 정기구독이 늘어나고 광고도 많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신문사가 활기를 찾아 살아난 것입니다. 신문사에도 ‘류영모는 누구인가’ ‘박영호와 통화하고 싶다’는 전화가 쇄도하였습니다. 이 사장은 서울의 이름난 음식점을 순회하면서 나를 귀빈 대접했습니다. 그 일도 지나간 꿈입니다.”
-이규행 회장은 다석이 이승을 떠났을 때 부음(訃音) 기사가 한 줄 신문에 나지 않은 것은 그의 위대한 사상에 비추어 매스컴의 허망함과 맹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했는데, 다석이 그렇게 보석의 원광(原鑛)처럼 묻혀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다석의 사상적인 핵심은 ‘어버이가 낳아준 몸나(제나·ego)는 짐승이고 거짓 나다. 거짓 나를 부정하고 한얼님이 주시는 얼나로 솟나 한얼님을 사랑하고 한얼님의 뜻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황 선생에게 ‘어버이가 낳아준 몸나는 짐승이요 거짓 나이니 부정(否定 克己)하고 피붙이를 멀리 하라’고 하면 그대로 따르겠습니까? 예수 석가는 그것을 생각해냈고 실천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여느 짐승과는 달리 종족 보존이 삶의 목적이 아니요, 제나(몸나)를 부정하고 한얼님을 사랑하여 얼나를 참나로 깨달아 한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예수 석가는 그것을 깨달아 실천하였습니다. 석가의 가르침을 좇는다는 불교, 예수의 가르침을 좇는다는 예수교의 뜻을 다석처럼 바르게 아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모두가 이름만 불교도, 예수교도이지 제나(ego)로 복받으려는 기복(祈福)신자들입니다. 그러니 다석을 바로 알아주는 이가 없습니다. 예수 석가도 바로 알아주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가가 제자들 몇 사람을 데리고 함께 가다가 땅을 가리키면서 ‘땅에 흙이 많지?’라고 물으니 제자들이 ‘많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석가가 땅에 흙을 조금 집어다가 엄지 손가락 손톱 위에 놓고는 ‘내 손톱 위에 흙은 아주 적지?’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 적다고 대답하자 석가가 짐승인 제나로 사는 이는 저 땅에 흙처럼 많은데 니르바나님(한얼님)을 좇는 얼나(다르마)로 사는 이는 손톱 위에 흙처럼 적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도 ‘생명(얼나)의 길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가는 이는 지극히 적고 멸망의 길인 넓은 길로 가는 이는 많다’고 하였습니다. 석가와 예수는 다같이 제나(ego)를 버리고 얼나(다르마)로 산 이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는 한얼님이 주신 생명이라 얼나로 예수와 석가의 생명이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와 석가가 진리인 얼나로 한 생명임을 모르는 불교도 예수교도는 예수 석가를 모르는 이들입니다. 다석의 얼나도 예수 석가의 얼나와 한 생명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다석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장자(莊子)는 제1편 소요유(逍遙遊)에서 지인무기 신인무공 성인무명(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얼나에 이른 이는 제나(ego)가 없고, 얼나를 깨달은 이는 제 자랑이 없고, 얼나로 거룩한 이는 이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석은 참으로 성인이었기에 이름이 없었습니다.”
박영호는 <다석전기> 제1판 머리말에서 ‘함석헌은 류영모를 하늘같이 스승으로 받들었고, 류영모는 함석헌을 목숨처럼 제자로 아꼈다’면서 ‘류영모의 생애는 함석헌이 써야 할 글’이라고 밝혔다.
 

 황호택과의 서면 인터뷰에 응한 박영호의 육필원고[사진=황호택]


-다석의 전기를 원래 함석헌 선생이 쓰기로 정해졌던 것인가요.
“다석 선생은 제자에게 그런 요구나 언급을 할 분이 아니십니다. 이 사람이 스승님의 전기를 쓴 것도 스승께서 먼저 이야기를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이따금 구기동 스승의 집을 드나들었는데 전기 쓸 준비를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스승의 연세는 80을 넘겨 90을 바라보는 망구(望九)에 이르렀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둘째 아들(柳自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스승님의 연세가 높으신데 아무도 전기 쓸 준비를 안하고 있으니 걱정이 되어서 글월을 올립니다. 누가 나서도 충분한 자료가 없으면 전기를 제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다석은 자신에 대해서 글을 쓴 것이 없습니다. 일흔 살이 다 되어서 일기를 쓴 것뿐입니다. 일기를 내가 보았습니다만 한시와 시조뿐입니다. 그러니 아들이 아버지가 젊을 때나 소년 때의 이야기들을 물어서라도 기록해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부탁 아닌 간청을 하였습니다. 아들이 나의 편지를 아버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다석 은 아들로부터 나의 편지를 전해받고서 김흥호 교수에게 넘겨주면서 ‘두 사람(김흥호와 박영호)이 상의해서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김흥호 교수가 경기 의왕으로 나를 찾아와 자신은 ‘학교 일(이화여자대학 교수)로 바쁘니 박 선생이 맡아서 수고해주셨으면 좋겠다’ 라면서 나에게 책임을 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료가 필요하면 자신이 대학 도서관에서 찾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때 다석은 함석헌 선생과 틈이 벌어진 상태였습니다. 제자의 부덕(不德) 사건으로 스승님의 마음이 괴롭고 아파하실 때였습니다.
다석과 함 선생이 정주(定州) 오산학교에서 사제의 인연으로 만난 시기는 김흥호 교수보다 15년 먼저요, 나보다는 30년 먼저의 일입니다. 두 분은 사제이자 친형제같은 사이였습니다. 오죽하였으면 오산학교를 떠나올 때 배웅 나온 제자 함석헌에게 ‘내가 정주에 온 것은 함, 자네 한 사람 만나러 왔나 보다’라고 하였겠습니까. 함석헌이 일제 감옥에 갔을 때 ‘내가 말로 하는 기도 그만두고 명상으로만 기도해온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함석헌이 감옥에 들어가고서 '하느님 아버지 지금 감옥에 가 있는 함석헌을 돌보아 주십시오’라고 말로 하는 간청의 기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석 스승의 둘째 아들이 ‘아버님은 저희 아들들보다 함석헌 선생을 더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을 이 사람이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22살 때 사상계 잡지를 통해 함석헌 선생을 알게돼 천안 씨알농장에서 만 3년 동안 함 선생과 일하고 공부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함 선생의 말을 듣고 글을 읽을수록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함 선생이 존경한다는 다석에 대해 말을 안 하고 글을 안 쓴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한 잡지에서 '제자 함석헌을 말하다'는 다석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천안농장에서 열 명이 안 되는 젊은이들이 농사지으며 함 선생으로부터 성경 한문책 소학, 고문진보(古文眞寶), 마하트마 간디 등을 배웠습니다. 함 선생은 ‘구약성경은 혼자 읽기 어렵다면’서 창세기부터 읽자 하고 하루에 1장씩 읽고 해설을 하였습니다. 함 선생이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차례대로 공기도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다석의 YMCA 연경반 모임에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다석 혼자만 성경을 지참해 오고 필요할 때만 읽고, 기도하는 일도 없었고 찬송 부른 일도 없었습니다. 강의 내용은 당신이 모조지에 붓글씨로 쓴 것을 압핀으로 칠판에 눌러 붙여놓고 그것을 보며 읽으며 해설하는 강의를 하였습니다. 핵심은 거짓나인 제나(ego)를 죽이고 한얼님이 주시는 얼나를 참나로 깨달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에게는 얼나와 제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다석은 ‘기독교를 바로 알려면 함(함석헌)에게로 가라’고 말했지만 함석헌 선생은 교회 안 가는 것만 다석과 같지 내용은 교회와 다름없었습니다. 의식도 그렇고 교의도 그러하였습니다.
다석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뭐라고 이 짐승인 우리에게 위로부터 난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주시어 한얼님 아들 노릇을 시키시니 이게 정말 사랑 아닌가! 우리가 얼나로는 한얼님으로부터 아들의 사명을 받아 한얼님의 아들이 된다. 한얼님 아들이 된 넋인 얼을 느낌으로 한얼님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 아마 석가와 예수도 이것을 느낀 것 같다. 한얼님 아들은 한얼님 아버지의 소리 없는 말씀을 귀 아닌 맘이 듣는다. 무한히 퍼져있는 허공과 영원히 이어진 시간으로 해서 한얼님의 뜻이 있음을 느낀다. 얼나가 한얼님 아들 노릇을 하라는 그 소리, 한얼님 아버지께서 계시다는 그 소리,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아버지의 뜻이 활동하는 그 소리가 맘속에 들린다. 이 맘 속에서 자꾸만 한얼님의 뜻이 일어난다. 얼나의 삶은 더없는 기쁨이다.
온통인 한얼님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 탐진치(貪瞋痴)의 삼독(三毒)이라는 짐승의 욕망을 지닌 몸나가 아닌 한얼님으로부터 받은 얼나로는 나와 한얼님이 한 생명이다. 이 얼나가 참으로 더 없는 참나다. 이 얼나는 대적이 없는 나라 남과 싸우지 않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이 얼나를 모르고 어머니가 낳아준 제나(ego) 밖에 몰라 이 제나를 나로 내세운다. 삼독의 제나는 온 세상을 잡아먹고도 배부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최후가 마른 콩 먹고 배 터져 죽는 소 꼴이 된다. 사람은 분명 욕심 많고 잘 다투고 음란한 짐승 이하의 짐승인 제나를 죽이고 이겨 몸은 짐승이지만 짐승 노릇을 생각하지 않음이 얼나로 솟나는(깨닫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류영모 <다석강의록>)
이것은 이미 석가와 예수가 심신으로 깨달아 체험하고서 말씀으로 증언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비구여 몸나를 싫어하고 욕심을 없애며 모든 번뇌를 깨버려 마음이 짐승 성질로부터 자유로우면 이것을 일러 비구가 얼나(Dharma·다르마)가 참나임을 깨달아 니르바나(Nirvana)님에게 이른 것이라 한다.' (석가 <잡아함경> 제1권 28 열반경)
'사람이 얼나로 솟나지(거듭나지) 아니하면 한얼님 나라를 알 수 없다. 사람이 한얼님께서 내려주시는 얼나로 솟나지 못하면 한얼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어버이의 몸으로부터 난 몸나(제나·ego)는 거짓나라 멸망하지만 한얼로부터 난 얼나는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이라 한얼님께로 돌아가 한얼님과 하나가 된다. 내가 너희들(제자)에게 얼나로 솟나라고 하는 말을 바로 들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요한 3:3~7 박영호 의역)
함석헌 선생은 평안북도 고향에 계실 때부터 아버님(한약의원)이 세운 교회에 다녔습니다. 오산학교에 가서도 학교에서 예배를 보았습니다. 수업시간에 다석 선생으로부터 세계의 여러 사상가에 대한 소개 강의를 들었습니다. 거기에 일본에 유학 가서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선생이 생존해 있는 것을 알고서 우치무라의 개인강좌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다석사상을 바로 알았으면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은 함석헌 선생은 교회는 안 나간 무교회 신앙에 멈추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정신적으로는 다석에게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석의 사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니 전기를 쓸 자격도 없고 의욕도 없었던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 그리고 <수평선 넘어> 시집 외에는 주로 정치평론을 쓰고 종교에 대해서는 별로 글 쓰신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에 관해서 쓴 글 가운데 지금까지 기억되는 것은 대속(代贖·예수의 보혈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함)은 너무 이기적이고 안일한 생각이기에 자기가 저지른 죄는 스스로의 힘으로 속죄 받는 자속(自贖)을 주장하였습니다. 자기 몸에 스스로 칼로 찔러 피를 흘리자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지요. 다석은 결심해서 다시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 것밖에 없으며 반대로 이웃에 아가페의 사랑을 베푸는 길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속이니 자속이니 쓸데없는 소리지요. 대속 이론을 끌어낸 이야말로 유치한 생각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박영호가 쓴 <다석전기>의 표지.


-인터뷰어에게 가끔 읽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의 추천도서’ 목록에 최근 박영호 선생의 <다석전기>가 포함됐습니다. 자료 조사가 꼼꼼하고 시대적 배경과 인물에 대한 서술이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본으로 했겠지만 관련 자료는 어떻게 수집하고 분석했나요?
“솔직히 말씀드려 자료 때문에 어려웠습니다. 다석이 기고한 <청춘>(육당 최남선 선생이 발행한 대중잡지) 등은 김흥호 교수의 도움을 받아 대학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그 당시 국내에 발행되는 잡지를 구독하여 무슨 자료가 있는지 눈을 닦아가면서 찾았습니다. 신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신간이 나오면 서점에 나가서 구입했습니다. 젊을 때 읽고 생각의 기초를 세운 톨스토이의 사상서는 일어 톨스토이 전집을 갖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석 댁에 비치된 책들도 이용했지만 아쉽게도 6·25 때 많이 분실되었습니다. 
전기 자료의 보고 가운데 보고는 다석의 기억에 담겨있는 스승의 마음(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제일 첫날은 1972년 3월 13일(다석 생신날)로 잡았습니다. 가족들은 스승의 음력 생신만 알기 때문에 평시와 같이 조용했습니다. ‘전기를 쓰려고 자료를 얻고자 왔습니다’라고 말씀 드리고 ‘오늘은 스승님 양력 생신날이고 첫날이라 김흥호 교수님도 동행하였습니다, 스승의 생애에 대해 선생님께 질문하기는 처음인 것같습니다. 오늘은 김흥호 교수가 먼저 물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라고 하자 김 교수는 같은 고향 평안도 사람인 춘원 이광수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춘원과 다석이 오산학교에 함께 교단에 섰던 것을 김흥호 교수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도 어떤 말씀이 나오나 큰 기대를 가지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간단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 분은 재주 있는 분이시지요. 자세하게 얘기하게 되면 옛 고우(古友)의 험담이 될까봐 조심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김흥호 교수가 말을 잇기를 ‘오산학교 교사를 지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 나라가 작은 나라라 둘레의 큰 나라에 머리 숙이면서 지내는 것이 분하여서 세수할 때도 서서 세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실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다석은 ‘단재가 주저 앉아서 세수를 하는데 허리를 굽히지 않고 곧추 세워서 세수를 하니 옷자락이 많이 젖었지요. 연장(年長)인 여준 선생이 단재의 세수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며 ‘그 허리를 좀 숙이면 옷이 안 젖지’라면서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 다음은 내 차례가 되어 ‘선생님께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시다, 일차 오산학교를 떠나 집에 돌아오고부터는 일절 교회를 안 다녔는데 어떻게 그렇게 180도로 바뀌었는지 가장 궁금하였습니다’라고 질문을 드리자, 두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외치는 동작을 했습니다. ‘저 위로부터 오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목사들의 똑같은 이야기 그쯤 듣고 집 골방에서 한얼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한얼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글로 적고 나면 새날이 밝아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전기의 핵심은 그 한마디를 듣자는 것이었습니다.”(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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