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경멸 딛고 선 인간 역사의 파노라마

2021-05-1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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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진의 재일교포 소설 <파친코> 읽고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자이니치(재일교포)들의 애환과 역사를 그린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은 미국 PBS(공영방송) 인터뷰에서 이것이 나의 주제문(thesis statement)이라고 말했다. 식민지, 분단, 전쟁, 재앙 같은 가난을 겪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인터넷 속도, 조선, 철강, 가전제품, 자동차, 반도체, PISA(세계 학업성취도), 문자해독률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는 한국인들의 삶을 압축한 문장이다.
일제 강점기 작은 어촌(漁村) 부산 영도에서 살다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한국인의 가족사를 그린 파친코는 구상에서 완성까지 27년이 걸렸다. 그녀는 “많은 작품을 쓰고 싶지 않다. 죽기 전에 다섯 편을 쓴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애플 TV 드라마 촬영···윤여정 등 출연

이민진은 칼리지에서 역사를 전공하면서 논리학 철학 등 여러 분야의 강의를 듣고 논픽션과 인류학 사회학 책을 즐겨 읽었다. 예일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픽션과 논픽션 분야의 글을 써 최우수상을 받았으나 그때까지 직업으로서의 작가는 마음에 없었다. 그녀가 아는 재미(在美) 한인들 중에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생활고와 언어 장벽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화장품 회사 영업사원을 하다 197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이민했다. 이민진의 나이 7살 때였다. 아버지는 함경남도 원산, 어머니는 부산 출신. 그녀는 서울 마포에서 살 때 피아노 레슨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돕던 어머니가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을 때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해찰을 하다가 선생님에게 잣대로 손바닥을 맞았다. 학교로 호출당한 어머니는 “선생님이 움직여도 괜찮다고 할 때까지는 자리를 지켜라”는 말만 하고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부모를 따라 7살 때 미국으로 이민간 작가 이민진. 


그녀는 안정된 직업을 갖기 위해 조지타운대학 로스쿨에 들어갔고 뉴욕에서 잘 나가는 기업 변호사가 됐다. 그러다 B형 간염으로 건강이 나빠져 변호사를 그만두고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 하버드 대학교 신문인 Harvard Gazette 인터뷰에서 작가로 전업한 이유에 대해 돈 버느라 좋아하지 않은 일을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작가 수업을 위해 회비가 비싸지 않은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글쓰기 교육과정에 등록했다. 글쓰기 가이드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2004년 첫 단편소설을 내놓았고 2008년 첫 장편소설 <백만장자들을 위한 공짜 음식>을 발표했다. 첫 장편소설은 미국 편집자들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면서 11개국어로 번역될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파친코>는 두 번째 장편소설.
그녀는 대학 시절 일본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로부터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13세 재일교포 소년의 이야기를 듣는다. 부모들이 아이의 졸업기념 엘범을 들춰보니 일본 학생들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김치 냄새가 난다” “죽어라”라고 이지매를 글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1989년 소설의 구상은 여기서 시작됐다.
 
탐사보도 기법 활용 '사회적 리얼리즘 구현'


1996~2003년 초고를 썼으나 남편이 읽어보고 “지루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후 관련 재일교포에 관한 논문과 책등을 읽으며 지식을 넓혀가다가 본격적인 현장 취재 기회를 잡은 것은 일본계 미국인(half-Japanese) 남편이 2007년 도쿄 금융회사에 취직하면서. 작가는 4년 동안 파친코 업자, 술집 여종업원 등을 만나 취재노트를 작성했다. 일본 현지에서 만나본 재일교포들은 재밌고, 사랑이 넘치고, 차별에 대한 분노보다는 로맨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현지 취재를 거쳐 2016년에 출간한 소설에서는 초고의 따분한 기록성이 사라지고 읽을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소설적 재미가 넘쳐난다.
<파친코>는 재일교포들의 전매특허 사업이다. 일본인들은 파친코를 즐기지만 그 직업 종사자들은 경멸의 대상이다. 야쿠자와도 연결돼 있다. 점포주들은 손님이 없는 한밤중에 파친코 기계의 못(구기)을 두드려 쇠구슬이 굴러가는 방향과 속도를 조절해서 돈을 풀어주는 기계와 수금하는 기계를 바꿔놓는다. 그녀는 처음에 소설의 제목을 <모국>(母國)으로 했다가 파친코로 바꾸었다. 파친코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공정하고 조작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정신을 상징한다.

구상에서 완성까지 장장 27년 걸려

그녀는 파친코에서 탐사보도(investigative journalism)같은 소설 작법을 썼다고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소설 주제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 조사하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파친코는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리얼리즘’(social realism) 소설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등장인물들은 이민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터뷰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다. 작가는 한두 명 등장인물의 시야로 좁히지 않고 거대한 파노라마를 보여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PBS에 출연해 오이 소박이 김치를 담그는 이민진과 모친(왼쪽).


문학사상(대표 임홍빈)은 500만원 가량 선(先)인세을 주고 한국어 판권을 계약해 10만부 이상 팔리는 대박이 났다. 애플TV 플러스가 드라마로 촬영 중인 <파친코>에는 윤여정과 이민호 등이 출연한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넷플릭스가 미니시리즈로 제작한다.
그녀는 세 번째 소설 (미국 학원)이라는 3부작 소설을 집필 중이다. 막바지 단계에 와 있다. 학원을 둘러싼 원장 강사 학생 그리고 서울 시드니 런던 뉴욕 보스턴에 사는 한국인들이 등장한다. 한국인의 교육과 지혜를 주제로 다룬 이 소설은 한류(韓流)를 타고 세계적인 이목을 끌리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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