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청와대에 따르면 지난 21일 문재인 대통령은 러시아 백신 도입 문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참모진의 건의에 "그렇게 하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당장 스푸트니크V를 들여온다기보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상황에 따라 백신 도입을 고려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하지만 지난 26일 권덕철 복지부 장관은 한 방송에 출연해 스푸트니크V 백신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날 권 장관은 스푸트니크V 백신을 굳이 도입할 필요가 없냐는 질문에 "그렇게 보고 있다"며 도입에 대해 사실상 선을 그었다.
또 권 장관은 이 같은 이유에 대해 "현재 정부가 충분한 백신을 확보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같은 백신 도입을 두고 정부의 입장이 5일 만에 180도 바뀐 셈이다.
이 같은 권 장관의 발언 근거는 지난 24일 화이자 백신 2000만명분(4000만회분)의 추가 도입 계약에 따른 것이다. 백신 2000만명분 확보로 우리 국민의 두 배에 달하는 총 9900만명분(1억9200회분)의 백신을 확보하게 됐으니,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러시아 백신을 구태여 추가로 구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권 장관 발언의 골자다.
김우주 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정부가 백신 접종과 같은 중대 사안을 다룰 때는 절대적으로 내부 조직 간 충분한 조율을 통해 '원 보이스(One Voice)'로 국민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번 러시아 백신 도입 사안의 경우 아무리 5일의 날짜 간격이 있고 그 사이에 백신 확보 소식이 있다곤 하지만, 대통령과 장관 간 입장 차가 너무 크다. 국민들이 혼선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국내 백신 수급 상황이 권 장관의 바람과는 달리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은 점도 문제다. 정부의 화이자 2000만명분 확보는 계약 발표에 불과해, 백신이 적기에 국내로 들어올지는 알 수가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감염내과 교수도 "문 대통령이 모든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도입 검토를 지시한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라며 "문제는 권 장관의 발언"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백신 수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어, 국내 백신 수급 향방을 한 치 앞도 예단하기 어렵다. 도입 가능성을 단정적으로 차단하는 발언은, 향후 백신 외교를 펼치는 데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게다가 러시아에서 도입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향후 번복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부처 수장으로서 신중했어야 하는 발언"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권 장관의 주장과 달리 정부가 스푸트니크V 도입에 대해 이중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점도 대국민 신뢰도를 낮추는 요인이다. 이미 지난 22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외교부에 스푸트니크V 관련 안전성 정보를 수집해달라 요청한 바 있다.
또 범부처 백신 도입 태스크포스(TF) 관계자는 "현재 약 1억명의 백신을 확보한 상태에서 당장 신규 백신 검토보다는 백신의 차질 없는 수급에 집중하겠다"면서도 "현재 러시아 백신 도입을 고려하고 있지 않지만 국제 사회의 인허가 상황을 전반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말하며 사실상 백신 도입 가능성을 열어뒀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스푸트니크V는 바이러스 벡터 기반 백신인 만큼 혈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당장 도입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보인다"며 "다만 백신 도입에 대해 정부 내 의견이 갈린다면, 이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