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뷰] '글로벌 수상 단골 건축가' 윤경식 디자인을 낳는 청평 청담헌을 가다

2021-04-24 13:31
  • 글자크기 설정

"덜 종교적인, 덜 예수적인"… 19차례 국제 건축상, 마이더스의 손의 비밀

[함평 호접몽가[사진 = 김종오 작가]]

사람이 온다는 건/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의 '방문객'

윤편, 동사적 삶

두 차례, 그 사람의 손이 지나간 자취를 만났다. 한번은 전남 함평의 호접몽가(蝴蝶夢家)가 제35회 세계건축상을 받았을 때이다.(2020. 10.6)
지붕에 호접(나비)의 한쪽 날개를 펼쳐놓은 아름다운 집엔 누구의 손길이 스쳤는가.

그날 기사에서 나는 중국 제나라 환공(桓公)과 목수 윤편(輪扁)의 옛일을 거론했다.

성인의 말씀을 읽고 있다는 환공에게 윤편은 "죽은 사람을 읽는 것은 옛 쓰레기를 읽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어째서 쓰레기인가,라고 묻는 왕에게 "목수인 나는 수레바퀴에 쓸 나무를 깎는 비밀을 자식에게도 물려주지 못하기에 늙어서도 그것을 깎고 있다"면서 "(왕이 읽는) 그 성인도 전해줄 수 없는 것을 가슴에 가진 채 죽었으며 남은 것은 그 찌꺼기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경전(經典)이 산 사람의 말보다 부실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윤편의 말 또한 경전처럼 남아 전해지고 있으니, 스스로의 말이 담긴 뜻까지 슬쩍 쓰레기로 매도한 셈이 되었지만, 군주에게 일갈한 그 진리의 기세만큼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윤편이란 이름이 '수레바퀴의 정밀한 부분'을 뜻하는 말이니, 그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그리고 윤편이 말한 뜻은 '명사'와 '동사'의 차이다. 경전은 명사로 규정되고 멈춘 것이며, 그의 목수행위는 동사이며 진행되고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명사형의 삶과 동사형의 삶. 그 차이를 말한 것이다.

호접몽가를 거론하며 나는 이렇게 물었다. "대체 이 '장자의 꿈'을 지상에 펼쳐놓은 '윤편' 같은 솜씨는 어느 손에서 나온 것인가." 그리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윤경식 한국건축회장이 그 사람이다. 이날 그의 또 다른 건축 작품인 삼각산 도선사 '소울 포레스트'도 대상을 받아 2관왕의 영광을 안았다."

이 사람이 바로 윤편의 '동사형 삶'을 보여주는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청담헌 창밖에 펼쳐진 청평호와 보납산의 풍경.]


세계는 왜 놀랐나

뉴스 속에서 두번째로 그를 만난 건 지난 12일이었다. 독일 iF디자인어워드 수상작으로 그의 작품이 선정되었을 때다.

"유난히 많은 금년 iF 국내수상작(아래 참조) 중에서 필자가 주목한 작품 하나가 있다. 삼각산 도선사에 세워진 '소울림(消鬱林, 소울포레스트)'이다. 이 종교 건축물은 작년 10월 세계건축상을 이미 받은 바 있어서 이번 수상은 한 건축 작품이 세계적 어워드에 연속수상하는 영예를 누린 것이다. 이 작품을 설계 건축한 윤경식((주)한국건축KACI 회장)은 작년 세계건축상에서 최진석교수의 '호접몽가(蝴蝶夢家)' 설계로 대상과 2관왕을 거머쥐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다.

"한국의 산 속에 지어진 건축물 하나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주거용 건축이 아니라, 심오한 종교적 상징과 기원을 담아서 지은 현대의 건축물이, 세계적인 디자인 안목들을 어떻게 사로잡았을까. 여기에는 한국적 미학의 글로벌한 수준 획득, 창의적 공간 개념의 실현, 그리고 이 땅의 독창적 문화와 정신을 드러내는 표현작업의 의미있는 개가(凱歌)가 담겨있다. 소울포레스트는 영혼의 숲이란 뜻이다. 消鬱林(소울림)이란 한자어를 쓰고 있다. 꺼짐(消)은 인생의 한 관문인 '죽음'을 의미하지만 또다른 피어남을 향한 과정이기도 하다. 이 건축물은 업장(業障, 전생과 세상에 지은 허물)을 소멸하며 울창한 숲으로 솟는 승화(昇華)를 담고자 한다."

그리고 결(結)을 맺고 있다. "건축의 공간이 바로 마음자리를 말하는 것임을 이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탁월한 예술적 감관만이 빚어낼 수 있는 성취다. 한국적인 공간이 세계적이라는 슬로건이, 소울포레스트에선 참으로 실감난다. 죽음은 삶이며 삶은 죽음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21세기의 영적(靈的) 성찰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세계의 건축전문가들이 놀람 속에서 거듭 갈채를 보낸 이유가 있었다."
 
 

[청담헌 내부.]


청평호반의 청담헌 가는 길

최근 두번이나, 기자를 놀래킨 건축가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느긋이 만나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느긋이'라는 표현은, 기사 속으로 그를 굳이 다시 소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시대의 기린(麒麟)'같은 기풍이 있는 그의 삶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다는 뜻이다.(결과적으로는 그를 불러내고 말았지만 말이다.)

정현종의 시어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임을 믿는다. 한 사람의 일생과 마음이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생을 이룬 그 기운의 결들을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것이기도 하다. 23일, 경기도 가평 청평호반에 있는 건축디자인 스튜디오 청담헌(淸談軒)으로 가는 주말아침은 날이 흐려 하늘이 어둑했다. 호수가 보이는 길로 들어서자 5km를 물옆으로 달리는 좌산우수(左山右水)의 상쾌한 드라이브 코스가 펼쳐졌다.

청담헌은 탁 트인 구조의 단층에 '윤경식풍(風)'의 관란통경(觀瀾通景, 물이랑을 구경하기 좋은 투명창)이 펼쳐져 있었다. 집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호수 곁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을 위해 잠시 몸을 세운 나그네같은 느낌이었다. 그 과객은 나처럼 눈길을 수면에 주며 찰나의 미묘한 물너울을 즐기는 기색이었다. 달팽이관처럼 비탈을 돌아 올라가는 입구도 인상적이다.

청담(淸談)은 원래 명예와 이익같은 세상의 이야기를 벗어난 '청도(淸度, 맑음의 수준)'를 지닌 대화를 뜻한다. 이 이름은 눈 앞에 가득한 저 진록(眞綠)의 물살을 의식했을 것이고,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닌 물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하심(下心)과 부쟁(不爭, 다투지 않고 비켜 흐름)을 닦는 '수신(修身)'을 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청담헌 내부.]



통창으로 건 500호 산수(山水)

입에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깊이 내밀어 잡아주는, 윤회장의 인상은 서글서글하여 편안했고 청년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말투는 나즉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이었다. 처음 온 사람의 특징대로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청담헌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우선 청평호와 문필봉(文筆峰)을 떠오르게 하는 저쪽 호안(湖岸)의 보납산이 인상적이었다. 4월 하순의 산빛은 실로 아름다웠다. 우리가 녹색(綠色)이라고 부르는 빛깔은 얼마나 둔하고 무뚝뚝한가. 연록과 초록과 담록과 진초록과 진록과 청록과 암록이란 몇 개의 낱말로 결코 표현할 수 없었다. 미묘하고 은밀하며 부드럽고도 강렬한 숱한 푸르름을 껴안은 산이 마치 저쪽에 앉은 사람처럼 친근하게 다가와 있었다. 푸르름들은 산을 기어오르는 짐승처럼 꼬물거리며 혹은 산을 어루만지고 포옹하는 아기처럼 뒤척이고 있었다. 아래 흐르는 물은 짙은 녹색에 수많은 빛의 또다른 녹색 주름을 간질이며 정숙보행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건축가는, 저 500호 짜리의 예술품을 눈 밖에다 두려고 하지 않았다. 기둥의 눈걸림이 없는 투명창을 통으로 배치하고 창 밖에 생긴 베란다에도 투명난간을 두어 실내에서도 온전히 산과 강을 누릴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오직 저 풍경을 들이기 위한 배려만으로 집을 지은 듯, 건물은 온 마음을 다하여 청평호를 눈앞에 흐르게 하고 있었다. 집이 하나의 시선이었고, 건물이 하나의 관심(關心)을 정성스럽게 돋워놓았다.


 

[청담헌 내부. 모니터 뒷쪽에 종이기둥이 보인다.]



종이기둥의 비밀

투명창 반대쪽에는 열주(列柱)가 서 있었다. 윤경식 건축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종이기둥이었다. 어떻게 종이로 만든 기둥이 천장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우선 그는 이 방식이 재활용한 종이를 쓰는 친환경적인 건축술이라고 했다. "한 장 한 장 식물성 아교를 발라서 고속회전을 시켜 기둥을 만들죠. 그렇게 만든 기둥은 물과 불에 강하고 수명도 수백 년은 갈 수 있을 만큼 내성이 강해집니다. 종이가 원래는 나무 아닙니까. 거기에 콘크리트 자재에 비해 무게도 가볍고 제작비용도 저렴합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진시황 시절에 세운 만리장성이 돌과 돌을 붙일 때 찹쌀 죽을 쒀서 돌 사이에 발랐다는 기사(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 2005)가 떠올랐다. 적외선 분석을 해본 결과였다고 한다. 학자들은 모르타르와 밥풀이 거의 같은 분자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푸석한 성질을 지닌 흙에 찹쌀풀의 점성을 가미해 성벽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의 강도를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아교에 달라붙은 종잇장들이 서로를 물고 돌아가는 힘으로 서있는 종이기둥은, 나무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무게를 견딘다. 기둥 뿐 아니라 거실에 놓인 책상이나 의자, 탁자의 다리도 모두 종이였다. 어린 시절 마분지를 오려가며 마음에 지었던 '종이로 만든 집'이, 과학의 마법을 거쳐 청담헌에선 일상의 현실이 되어 있었다.

'윤경식 건축'은, 공간을 건축가가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공간을 쓰는 사람이, 필요와 용도와 상황에 맞게 결정해서 쓸 수 있도록 모든 여지를 열어놓았다. 일본의 건축은 대개, 방(房)을 비롯한 건축 공간들을 꼼꼼히 규정하고 건축가가 지정한 용도에 맞게 사용자들이 들어가 살아야 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건물이 주체이고 사람은 객(客)이 된다. 그러나 서구가 발전시킨 건축 개념은, 사람이 공간을 규정하고 그것을 활용하며 형편에 따라 변경하고 수정해서 쓸 수 있는 주거 구조물이다. 우리가 지금껏 생각해온 건물은 '체(體)'의 건축이었고, 윤경식 건축이 제안하는 것은 '용(用)'의 건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헌(軒, 청담헌)은 그저 막힘 없는 널찍한 거실로 되어 있었고, 조붓한 한쪽을 가둬 오붓한 공간을 하나 만들었고 서재와 디자인실로 쓰고 있었다.

종교건물의 혁신을 제안하는 건축가

그곳에서 윤회장은 스스로의 건축 철학과 실천에 관한 간단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최근에 연속적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고, 그 의뢰인들에게서도 폭발적인 호평을 이끌어냈던 종교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 첫 장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덜 종교적인, 더 부처닮은'
'덜 종교적인, 더 예수닮은'

이 카피에 입이 딱 벌어졌다. 종교건축물은, 인간 주거와 삶의 가치를 담은 다른 일상건축물과는 달리 인간의 믿음과 죽음이나 그 이후의 가치를 담아야 한다. 일상건축물과는 전혀 다른 공간 형식을 지닐 수 밖에 없다. 건축이 표상하고 공간이 드러내는 의미와 기표(記標)가 신앙의 원관념과 닿아있어야 한다. 오랫 동안 축적되어온 전통이나 교리의 관행들이 건축을 규정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이 건축가는, 종교건축물을 만드는 제1의 가치로, 현재의 종교가 지니고 있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면모를 완화하고자 한다. 대중을 오히려 소외해온 종교의 장벽을 걷어내는 대신, 그 믿음의 원천을 이룬 부처와 예수라는 본질의 의미에 충실한 건축물로 종교의 매력을 돋우고자 한다. 신앙의 공간인 교회와 성당, 혹은 사찰의 건축가치를 혁신함으로써 최근 종교가 상실한 흡인력을 새롭게 살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건축가가 이런 역발상으로 종교에게 혁신을 제안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었던가.

손이 닿는 곳마다 절과 교회가 달라졌다

이번에 iF상을 다시 받은 '소울포레스트'는, 덜 종교적이면서도 더 부처닮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가 이름붙인 영림(靈林, soul forest)은 위패(죽은 이의 혼을 상징하는 패) 9층탑 구조물이다. 유리로 된 이 탑에는 9개의 부처보살상이 모셔졌고, 위패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간 불교의 사찰이 고집하던 동양식 지붕인 기와도 없고, 건축의 익숙한 형상도 없다. 대신 투명한 유리가 낯설게 서있을 뿐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부처의 시절에 지금과 같은 지붕이나 탑이 있었을 리 없다. 후세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보다는, 망자의 죽음과 남은 자의 삶이, 색즉시공의 경계를 초월하는 기원을 담는 것이 훨씬 부처의 뜻에 다가가는 게 아니겠는가. 유리와 빛이 그걸 표현해낸다.

백양사의 '영혼의 힐링하우스'는 명부전과 영각당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납골함은 원뿔형의 기원(祈願)적인 형상으로 설계했다. 그 안에는 사리로 만든 유골을 모셨다. 유골을 지상에 놓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띄웠다. 육신의 '부(浮, 떠오름)'는 극락으로 나아가는 상징을 뚜렷하게 표현해낸다. 거기에 쓴 통유리는 납골당으로는 초유의 시도였다. 죽음을 굳이 캄캄한 곳에 가둬둘 게 아니라, 자연이나 하늘과 통하게 하는 '트임'으로 자유롭게 해주려는 건축공간적 배려이다.

정각사 미래탑은 사각의 유리탑으로 만들었다. 그 안에 455개의 부처를 매달아 공중 부양(浮揚)하는 듯한 형태로 구성했다. 탑 밑바닥에는 2028개의 광섬유 조명이 심어져 화엄세계를 구현했다. 이 탑 앞에는 고려 석탑이 서 있는데, 이 고탑과 빛의 신탑이 어우러져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대비하기도 하고 서로 얼비추기도 하면서 신비를 자아낸다. 윤경식의 생각이 닿고 손이 닿는 곳마다, 절이 달라졌다. 절의 풍경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절의 가치와 지향이 달라진 것 같다. 절은 더 이상 산속에 숨어, 대중에게서 고립되어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은둔의 믿음이 아니라, 도시의 빛과 활기로 걸어나와 그것과 함께 많은 이들의 믿음과 호흡하는 것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힘이, 그에게서 나오고 있다. 건축의 종교개혁가라 할까.

경기도 군포의 '사랑빚는 교회'는 '덜 종교적인, 더 예수닮은' 건축철학을 보여주는 멋진 사례다. 사람들에게 군림하는 권위를 뺀 부드러운 얼굴의, '교회같지 않은 교회'. 아파트 7층 높이인데도 마치 살짝 몸을 낮춘 작은 집처럼 여겨지는 묘한 착시감이 교회의 대중친화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중간이 비어있는 블록 벽돌 속을 칠한 것은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색깔을 칠해 알록달록한 무늬벽을 만들었다. 유리벽과 디자인벽은 조명을 받아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축복으로 빛난다. 6m 높이의 종이기둥은 평화롭고 따뜻한 빛을 감돌게 하고, 수직적 상승감은 하늘을 향한 곧은 신심(信心)을 돋운다. 교회가 달라지자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숨어있던 벽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 있는 북카페는 주민들의 커뮤니티 시설로 활짝 열렸다.

통(通)과 덕(悳)

건축철학을, 간명하게 한 글자씩의 말로 정리하는 그는, 특출한 카피라이터다.

먼저, '통(通)'.
인천 검단공단의 어느 사옥을 건축할 때였다. 의뢰한 이는 건물 꼭대기층에 사내행사를 할 만한 큰 공간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이 건물은 서해바다에 인접해 있었는데, 수시로 불어오는 해풍을 막아내는 일이 고민이었다. 그때 윤경식은, 건물 지하층의 벽들을 모두 걷어내 뻥 뚫는 파격적인 건축을 디자인했다. 그 뚫린 지하공간으로 바닷바람이 지나가게 한 것이다. 사납게 몰아치던 북서풍은 마치 제 길을 만난 것처럼 그 안으로 몰려들어 순한 용처럼 빠져나갔다. 그는 이것을 통즉불통(通則不痛)이라고 표현했다. 기혈(氣血)의 흐름이 통하면 아픔은 사라진다는 동의보감의 핵심메시지다. 검단공단의 사옥은, 기혈을 제대로 통하게 해줌으로써, 해풍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게다가 그 기혈이 통하는 지하 강당은 큰 사내 행사를 소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그의 통(通)은 이런 발상 뿐 아니라, 시선이 통하는 것, 혹은 강제 구획이 없는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솜씨, 그리고 공간과 공간이 서로 통하게 하는 유기체적 공간의 설계같은 것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그의 발상법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역시 딱 한 글자로 그는 덕(悳)을 말한다.
悳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보면 직관적으로(直) 생겨나는 마음(心)이다. 인간 속에 신(神)이 있다면, 그 신은 도(道)에 닿아있고 덕(悳)에 스며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신의 오묘한 경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늘 그 신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신을 만나는 길은, 교묘하고 복잡하고 어렵고 대단한 훈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툭 닿듯 불쑥 스치듯 얼핏 지나듯 만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속에 있는 그 툭, 불쑥, 얼핏의 신(神)이 바로 덕(悳)이다. 우리가 우아해지고 넉넉해지고 너그러워지고 모든 것에 대해 따뜻해질 수 있는 '덕'은, 신의 마음에 닿았기 때문이다. 그게 직심이다. 건축의 발상, 혹은 미학과 실용과 파격과 새로움의 발상 그 모두는, 툭 닿고 불쑥 스치고 얼핏 지나가는 첫 마음에서 나온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을 붙잡아 가만히 키우고 돋우고 생명을 부여하면, 창안이 되고 아이디어가 솟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직심은 스스로를 신뢰하는 것이며, 대상의 근원과 본질과 드러남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툭 걸리고 불쑥 돋고 얼핏 떠오르는 영감(靈感)을 부메랑으로 나꿔채라. 이것이, 그의 크리에이티브 비법이라고 그는 귀띔해준다. "정각사 미래탑과 백양사 '영혼의 힐링하우스'는 모두 직심에서 나왔습니다."

건축은 건축가의 자랑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건축가의 개성이나 비평자의 수준을 뽐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윤경식회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건축론이다. 그러면? 건축은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삶의 기품과 편리와 효율과 만족을 높여주는 세심하고 대범한 배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살이를 완전하게 하는 행위들이다. 그래서 건축은 바로 덕(悳)이기도 하다. 지속가능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고결한 창조이기 때문이다. 건축이 덕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에 배치되는 부덕(不悳)함 또한 왜 없겠는가. 이 대목에서 나는 살짝 감동을 더 얹었다.

"우리나라 일부 건물들 가운데는 외관을 기이하게 하고 멋지게 휘고 접고 삐딱하게 올리고 파격적으로 비틀어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외국 건축가들이 설계한 것도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멋진 건축물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물론 예술관이나 박물관같은 곳이라면 이런 시도도 할 수 있겠지만, 기업의 사옥이나 공공건물이 이런 형태를 지니는 것은 참 딱한 일입니다. 한국에 이런 건물을 짓는 유럽의 건축가들도 본국에서는 거의 이렇게 짓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심히 보시면 알겠지만, 이런 건물들이 눈을 붙잡는 곳은 대개 후진국이나 문화적 후발국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외관이 복잡한 형태를 지니면, 에너지 효율이 떨어질 수 밖에 없고, 재건축할 때도 문제가 많습니다. 공사기간도 길어지고 자재도 당연히 많이 듭니다. 베를린 시립미술관이나 100대 건물에 들어가는 미국의 코넥티컷 주택같은 경우, 외관은 아주 단순하죠.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건물들은 뜻밖에 직육면체의 단조로운 건물이 많습니다. 반면 후진국의 건물은 에너지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돈자랑을 하는 듯한 분위기로 요란하게 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순한 것, 소박하지만 필요한 것들을 잘 갖춘 것, 사용자들에게 오롯이 집이 해야할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건축의 진짜 미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Simple is the best. 혹은 Less is more."
 

['죽부인'에서 창안한 건축디자인 CJ해슬리 나인브릿지 공사 장면.]

클럽하우스 지붕이 된 죽부인

청담(淸談)은 끝없이 이어졌다. 차를 마시고 물을 보았고, 다시 간단한 비빔국수를 먹으며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윤회장은 등산도 좋아하고 걷기도 즐긴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했다. "산에 오르면 그냥 오르는 것이 아니라, 체력이 모두 빠져나갔다 싶을 만큼 모질게 몸을 몰아붙입니다. 거의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을 때 쯤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잠시 접어뒀던 아이디어를 생각해볼 때가 많습니다. 신체는 더 이상 기력이 없는데 문득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이 이미지가 되어 영감을 자극합니다. 상상력이 긴박하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진신생심(盡身生心, 몸을 다하여 마음이 일어난다)이랄까. 마치 육체의 인간이 그 한계를 벗었을 때 신(神)의 영역으로 손을 높이 벋어 아이디어를 훔쳐오듯, 시적(詩的)인 감수성이 극대화되면서, 창조가 일어나는 현상의 고백. 보통 사람으로선 겪기 어려운 경험담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창조의 기행담(奇行談)은 계속됐다. 2010년 프랑스 파리공항과 이탈리아 밀라노공항. 괴물체를 안고 통관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세관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쥐고 있는 길쭉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뱀부(bamboo)"라고 외쳤다. 여전히 그것을 만져보며 의심스러워하는 담당자를 향해 "My Wife!"라고 말하자 웃으면서 보내줬다. 그는 여주의 CJ해슬리 나인브릿지 골프 클럽하우스 건축설계로 이탈리아 '국제 지속가능건축상'을 금상을 받아 시상식에 참석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가 아내처럼 껴안고 있는 존재는 대나무 공예품인 '죽부인'이었다.

CJ해슬리 나인브릿지는, 독일 가문비나무를 깎아 고도의 기술로 죽부인의 대나무망처럼 육각형 격자의 목구조물을 만들어냈다. 이 구조물은 스위스의 전문가가 계산해냈다고 한다. 21조각의 나무를 못을 사용하지 않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짜맞춘 예술품이다. 시게루 반과 공동설계를 한 이 작품은 하나의 '전설'이 됐다. 고도의 조형성과 채광의 창을 갖춘 실용적 미학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유럽 건축대상, 미국 세계건축상도 휩쓸었다. 영국 BBC는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천장 10'에 이 건물을 골랐다. 뉴욕타임스는 2012년 '올해 꼭 가봐야할 명소'로 꼽았다.
 

[청담헌에서 대화를 나눈 윤경식 회장(오른쪽)과 필자.]


한 사람이 '장르'가 되는 날

하루를 머문 청담헌(淸談軒)엔 때마침 살짝 4월의 실비가 뿌려, 우강(雨江)의 아름다움을 더욱 새초롬하게 바림질했다. 널찍한 공간을 거닐면서, 한 사람이 하나의 영역에서 '장르'가 되는 꿈을 꾸었다. 지난 34년간, 세계의 눈에서는 여전히 불모나 다름없는 한국 건축계의 빈한(貧寒)을 뚫고 국제 건축관련 상을 19차례 수상한 그는 정말 '수상한 사람'이다.

늘 남을 모델삼고 남을 흉내내고 죽기살기의 경쟁심으로 2등까지 따라붙는데는 선수가 된 이 나라가, 이젠 우리가 하나의 장르를 창출하고 선도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이 창조적 건축가에게서 엿보는 것이다. 앞으로의 10년, 우리는 윤경식이 백지에서 창조해내는 처음 보는 건축들을 꾸준히 보게 되지 않을까. 호접몽가 지붕의 날개 한짝은, 은유적이다. 저 아름다운 나비는 누군가가 다른 날개 한짝이 되어 함께 저어주어야 온전히 비상할 수 있다. 날개 한짝이 선도하는 창조력이라면, 다른 날개 한짝은 그것에 공명하고 함께 몸짓을 보탤 수 있는 이 땅의 창조적 인프라이리라.







...................................



▶ 윤경식 '한국건축'회장 수상내역


CJ 해슬리 나인브릿지 클럽하우스

- World Architecture Awards, 최우수상

(USA, World Architecture Community / 세계건축가협회)

- International Prize for Sustainable Architecture 2010, Gold Medal (Italy)

국제지속가능건축상 금상(비 유럽 건축가로서는 최초 수상)

- International Architecture Awards 2010, 대상 (Chicago Arts Museum)

유럽 디자인 센터와 미국 시카고 박물관이 주최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건축상 수상

- New York Times <꼭 가봐야 할 세계 명소 50>에 선정

- 영국 BBC <세계 가장 아름다운 천정 Top 10>에 선정


IK 본사 사옥, 인천

- World Architecture Awards, 건축가특별상 (USA / 세계건축가협회)


힐마루 CC 클럽하우스, 창녕

- World Architecture Awards, 건축가특별상 (USA / 세계건축가협회)


정각사 미래탑, 서울

- International Architecture Awards 2016, 대상 (Chicago Arts Museum)

- World Architecture Awards, 대상

(USA, World Architecture Community / 세계건축가협회)


명상과 힐링을 위한 단독주택, 여주

- Architecture Master Prize 2020, Honorable Mention / 건축설계부분

- World Architecture Awards, 대상

(USA, World Architecture Community / 세계건축가협회)


영혼의 힐링하우스, 백양사 납골당

- iF Design Award 2020, 건축부분 본상(독일, 인터내셔널 포럼 디자인)

- International Architecture Awards 2019, 대상 (Chicago Arts Museum)

- World Architecture Awards, 대상

(USA, World Architecture Community / 세계건축가협회)


사랑빚는교회, 군포

- iF Design Award 2020, 건축부분 본상(독일, 인터내셔널 포럼 디자인)

- World Architecture Awards, 대상

(USA, World Architecture Community / 세계건축가협회)


호접몽가, 함평

- Architecture Master Prize 2020, Winner / 건축설계부분

- World Architecture Awards, 대상

(USA, World Architecture Community / 세계건축가협회)


소울포레스트; 燒鬱林, 도선사 위패탑

- iF Design Award 2021, 건축부분 본상(독일, 인터내셔널 포럼 디자인)

- World Architecture Awards, 대상

(USA, World Architecture Community / 세계건축가협회)


상무대 명상센터, 장성

- Architecture Master Prize 2020, Honorable Mention / 건축설계부분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