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낙원의 밤'(감독 박훈정)은 조직의 표적이 된 한 남자와 삶의 끝에 서 있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 감독님께 '제 생각을 하고 쓰신 거냐'라고 물었는데 '그건 아니다'라고 하시더라(웃음). 굉장히 예전에 쓰신 각본인데 나중에 '엄태구'라는 이름을 가진 배우가 있다는 걸 알고 감독님도 깜짝 놀라셨다고 했다. '낙원의 밤' '태구'와의 만남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범죄영화와 잘 어울리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영화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지만, 주인공은 처음인데
- 출연 제의를 받고 '밀정' 때가 생각났다. 김지운 감독님이 저를 믿고 그런 큰 배역을 주셨는데 어떤 식으로든 기대에 보답하겠단 생각뿐이었다. 이번에도 딱 그런 심정이었다.
태구 역할을 두고 주안점을 둔 게 있다면?
- 삶에 찌든 모습이다. 누나의 병, 일을 그만둘지에 대한 고민, 조카를 걱정하는 마음 등을 내면에 담고서 연기하려 했다. 외적으로는 기본적인 피부 화장수만 바르고 거친 모습을 완성했다.
박훈정 감독과 숱한 대화 끝에 '낙원의 밤'을 완성해나갔다고 들었다
- 이것저것 시도하며 태구를 만들었다. 감독님을 의지하면서 하나씩 현장에서 만들어갔다. 전 상황과 현재에 집중해서 한 계단씩 쌓아갔다.
- 분량이 많고 감정선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돼야 한다는 생각에 세부적인 것을 잡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며 촬영을 진행했는데 감정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제주도 촬영을 앞두고 서울 촬영을 복귀하고 돌이켜보며 노력했다.
체중도 9㎏가량 증량했다
- 제가 굉장히 마른 체형이지 않나. 강인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체중을 늘리려고 했다. 단백질 보충제를 정말 많이 먹었다. 9㎏ 정도 증량했는데 촬영하면서 도로 살이 빠졌다. 속상하더라. 영화에서 기억 나는 장면을 꼽자면 목욕탕 나체 격투 장면이다. 저만 나체였다(웃음). 시간이 흐를수록 외로워지더라. 그런데 덥고 습한 곳에서 제작진들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며 정신 차렸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제주도였는데
-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제주도 풍광이다. 매 순간 황홀했다. 어느 순간 촬영이란 걸 잊을 정도로 강렬했다. 한번은 촬영 끝나고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정말 멋진 광경에 위로도 되고 눈물도 나더라. 또 감독님께서 제주도 맛집을 많이 데리고 가주셨다. 극 중 등장하는 물회 가게와 바닐라 라테 커피가 맛있었던 카페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전여빈과의 호흡은 어땠나?
- (전여빈의 처녀작인) '죄 많은 소녀' 개봉 당시, 그를 '연기 괴물'이라고 하더라. 함께 작업해 보니 '연기 괴물'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빈씨가 저를 두고 '향수 같은 배우'라고 칭찬했는데, 저야말로 그를 '연기 괴물이면서 향수 같은 배우'라고 부르고 싶다. '낙원의 밤'에서 여빈씨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전여빈'을 찾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눈에는 '재연'이었다.
재연과 태구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했나?
- 태구는 재연을 보며 누나, 조카 생각이 많이 났을 거다. 내 모습 같기도 하고 공감하며 동질감을 느꼈을 것 같다.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까지 하게 된 게 아닐까? 감독님과 논의를 많이 했다. 내 생각대로 연기한 후 감독님의 생각을 물으며 조율해나갔다.
형인 엄태화 감독(엄태구의 친형으로 '가려진 시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연출했다)은 동생의 연기를 어떻게 평가하나?
- 우리 형제는 정말 말이 없다. 우리 사이가 나쁜 게 아니라 그냥 성격이 그렇다. 부족한 점이 보이더라도 별말을 안 한다. 그래도 제가 용기 내 물어보면 '괜찮았다' '재밌었다' 정도가 최고의 칭찬이다. 모르지. 뒤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웃음). 낯간지러워서 그럴 거다. 저도 형 영화를 보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쑥스럽다. 형이 영화를 보고 어떤 말을 해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