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뷰]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첫 졸업식을 보는 눈

2021-03-27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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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에서 일어난 '기본교육의 혁명'...플라톤 아카데미아도 처음엔 기본학교였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1511)]



BC387년 아테네학당의 풍경

[빈섬 이상국의 뷰] 54명의 학생이 모였다. 강당이 시끌시끌하다. 널찍한 홀의 한 복판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문으로 걸어들어온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오른손을 앞으로 뻗으며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행복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습관과 교육으로 완전한 덕을 갖추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의 왼손에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철학을 다룬 ‘니코마스 윤리학’이 들려져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옆에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 하나가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려 보이며 열심히 말하고 있다.

“아닐세. 인간의 지식과 이성은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네. 이데아의 중요성을 자네도 인정해야 하네.”

그의 왼손에는 자연학과 우주론을 다룬 ‘티마이오스’가 들려져 있다. 그는 플라톤이다.

이 장면은 르네상스의 거장 산치오 라파엘로(1483~1572)가 그린 ‘아테네 학당’이라는 벽화그림 속에 들어있다. 아네테 학당은 바로 플라톤이 만든 유럽 최초의 대학인 ‘아카데미아’이다. 라파엘로가 표현한 아카데미아 풍경 속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그리스시대의 지식인 스타들이며, 그들의 ‘실제 모델’이 된 얼굴들은 자신을 포함한 르네상스기의 천재들이라고 한다. 그리스시대와 르네상스가 공유하는 지적인 자부심이 느껴진다.

 

[27일 기본학교 제1회 졸업식에서 최진석교장이 졸업생들로부터 감사케익을 받았다.]

 

[함평의 기본학교 졸업식이 열린 '호접몽가'. 이 건물은 2020년 세계건축상 대상을 받기도 했다.]



2021년 3월27일 함평 호접몽가의 풍경

시간을 2300여년 이동해, 2021년 3월27일 대한민국 전남 함평군 대동면 향교리에 있는 호접몽가(蝴蝶夢家)로 가보자.

28명의 학생이 모였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열주(列柱)를 연상케 하는 건물의 강당이 시끌시끌하다. 오후 2시30분, 봄비 듣는 촉촉한 토요일 이곳에서는 졸업식이 열리고 있다.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에서 지난해 개교한 ‘기본 중 기본을 아는 기본학교(줄여서 ’기본학교‘)’가 첫 졸업생 출범을 축하하는 자리다. (사)새말새몸짓의 이사장인 최진석 교수가 이끈 기본학교는 전국에서 100명의 지원자를 받아 3차에 걸친 선발과정을 통해 28명을 뽑았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 20주차에 걸친 기본학교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모두 과정을 이수하고 이번에 졸업을 했다. 강의는 기본학교 교장인 최진석 교수의 <철학수업>과 서울대 산업공학과 김태유 명예교수의 <4차 산업혁명>, 서울과학종합대학원 학사경영 김문수 부총장의 <암호학과 블록체인> 등의 과목으로 진행됐다.

졸업식장으로 들어가보자. 철학자인 최진석교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모든 일을 잘하려면 자기가 자기한테 분명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 분명해야 자신감이 나오고 자기를 믿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분명해야 한계를 발견하고 그걸 건너가려는 의지와 용기가 생기면서 개인이 발전하고 사회에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기본학교의 졸업생들이 그야 말로 기본을 갖춘 인재로 성장하길 기대합니다.”

이 졸업식은 좀 특이했다. 졸업생들이 행사를 스스로 구성하고 진행했다. 그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합동시(合同詩) 짓기였다. 한 명 한 명 정해진 순서 없이 무작위로 나아가 시를 써서 하나의 시로 완성하는 창조적 협업활동이었다. 그들은 함께 쓴 시를 벽에 붙였다.
 

[기본학교 제1회 졸업생들의 합동시.]



"당신은 당신보다 더 대단한 존재다" 졸업생 합동시의 향연

호접몽가에서 생각을 시작하려 한다(유**)
당신은 당신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마시길(임**)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는다(전**)
나는 작은 인간이요 큰 우주다 우리는 무엇인가(이**)
생각 속에서 생각 이전의 나와 마주한다(주**)
호접몽가에서 나는 꿈을 꾸려한다(주**)
나는 나비인가(오**)
내 껍질을 어디에 벗어두고 다시 태어나려 하는가(김**)
껍질을 벗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간다(권**)
나는 새말새몸짓으로 계속 날아 건너가는 존재(주**)
저 멀리 보이는 헌말헌몸짓(**)
불안하겠지, 흔들리겠지, 하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 없어(이**)
그래서 우리는 여기다 시를 쓴다(박**)
내 안에 솟구치는 것으로 살아가기 위해(이**)
함평에 모인 28개의 호기심(정**)
빛이어라 그대여, 그대들이여(김**)
삶이란 찰나가 끝나고 후회하지 않도록(이**)
내 말의 무게만큼 단단하게 걸어갈 것이다(석**)
자기자신을 믿고 나아가자(정**)
난 이제 함평을 바라보며 절을 해(정**)
더 큰 세상에서 밝게 빛날 우리(박**)
하루살이, 불나방, 부러워하지 마라, 너의 날개에 무한을 기워 영원을 꿈꿔라(진**)
비장하다 전선에 나간 장수처럼(조**)
우리는 고독으로 함께 하고 맑고 선연한 다음으로 건너간다(허**)
자유하라, 그리고 사랑하라(김**)
나는 날아 이곳으로 왔지(김**)
계속 날갯짓을 하면 힘들다 가끔은 쉬어줘야 한다(임**)
이곳에서 나는 타인의 타인이 되었다(윤**)

합동시를 읽어가노라면, 그들이 1년 동안의 수업을 통해 느낀 것들과 다짐한 것들, 그리고 변화한 것들이 한눈에 보이는 듯 하다. 기본학교는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기에 앞서, 학문을 위해 생각하는 법과 삶을 인식하는 법을 가르치는데 공을 들였다. 청년들이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유를 키울 수 있도록 북돋우는 ‘기본 중의 기본’을 교육하는 현장이었다. 졸업시(詩)는 그 성장과 변모의 숨김없는 고해(告解)이기도 하리라.

학생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다양한 분야의 여러 사람들이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고민했습니다. 혼자 걷다가 함께 걷게 된 곳이라고 할까요.”(박대수)

“지금까지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만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했는데, 여기서 공부를 하는 동안, 쉽게 남의 관념에 종속적으로 사느라 진짜 나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나로 등장해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으로 우리나라를 문화강대국으로 만들고 싶어요.” (진성규)

“우리는 작은 성취들을 이루면서 만족하거나 거만하게 살다가 어느날 상처입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지 반성하지 못하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합니다. 왜 그러는가? 우리는 기본이 탄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본학교에서 나에게 존재적 질문을 던지며,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스스로 질문하며 '나'라는 기본을 세웠습니다. 이제 기본이 단단히 세워진 나는 무엇이든 탁월하게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기본학교에서 세운 기본을 더 키워나가겠습니다. (김광민)

(졸업식은 코로나 방역규칙인 거리두기 규정을 지키며 간소하게 진행됐다.)


이 나라 한켠의 이 작은 교육혁명이 사소해 보이는가

이 나라의 한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작은 ‘인식의 혁명’ ‘자기의 혁명’ ‘삶의 혁명’을 사소하게 볼지도 모른다. 그런 혁명을 가능케 하고 있는, 작은 교육의 장(場)과 치열한 행위의 형식들을 무모하다고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역동적인 변화를 겪어온 나라에서 우리가 최근 겪고 있는 일종의 집단적 병리현상을 돌아보라.

가치의 혼란과 의미의 혼돈, 지나간 질서는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는 생겨나지 않은 유휴(遊休)의 장기화, 문제 인식 능력의 상실, 과거의 논리에 묶여 미래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는 교착적 갈등, 거기에 전염병의 창궐과 환경재앙의 가시화.

이런 문제들을 풀어낼 수 있는 인식과 견해의 '기본'마저 장착하지 못한 채, 문제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구 떠밀려 가고 있지는 않은가. 기본학교는, 제정신과 제자리를 잃어버린 세상의 기본을 ‘교육’에서 찾고자 한다. 미래세대에게 최소한의 자각능력부터 갖춰주고자 한다. 학생들의 말 속에는, 그 출구를 찾으려는 자기 다짐으로 가득하다. 그것만으로도, 이 학교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첫 단추를 꿰지 않았는가.

플라톤이 아테네 근교에 아카데미아를 세운 것은 BC387년 경이었다. 그때 마흔 살이었던 그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을 나름으로 보강하여 ‘대화편’을 저술하고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아카데미아의 목적은 본원적 탐구를 통해 지식의 과학화를 추구하는데에 있었다. 특히 정치가의 육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수학, 천문학, 화성학(和聲學)을 익혀 과학적인 탐구 소양을 갖춰야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카데미아는 일종의 ‘정치인 교양대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교장이 이 학교의 이름을 ‘기본학교’라고 지은 것은, 스스로가 부여한 교육의 사명이 ‘기본’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기본이란 ‘나 자신을 아는 것’이며 ‘나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건너가는 것’이다. ‘나’로 표현되는 이 땅의 ‘우리’가 저마다 이런 각성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나라를 바꾸는 혁신이 된다. 기본태도를 함양한 청년 인재들이 사회의 각 영역에서 리더로 활약할 수 있게 나비의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이 학교의 꿈이다. 본원적 탐구를 통해 지식을 과학화하자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문명적 열정과도 같은 중요한 꿈틀거림이, 대한민국 함평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나라의 제대로 된 내일을 위해 지금 작은 씨알을 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보라. 세상을 바꾼 많은 위인들의 말씀은 경(經)으로 남았다. 성경과 불경과, 유가와 도가의 경전은, 말씀이 문자화한 가르침이다. 그들은 왜 가르쳤고, 제자들은 왜 배우려 했는가. 경(經)은, 위대한 정신과 그것을 배우려는 제자 사이에 놓인 ‘긴요한 길’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세상을 바꾸고 인류문화를 드높인 것은, ‘경(經)’의 정신에 있다. 최진석교장은 가르침과 배움이 모든 혁신의 시작임을 일깨운다. 교육이야 말로 세상을 바꾼다. 기본학교는 그런 믿음으로 자생(自生)한 21세기의 경전(經典) 정신이다. 아카데미아도 처음엔 무모해보이는 기본학교였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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