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만에 쓴 부음기사] 다석 류영모…우리에게 이런 큰 사람이 있었다(풀스토리)

2021-02-0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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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시대…'자율신앙' 영성의 참스승에 뒤늦게 옷깃 여미며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890~1981)가 2월 3일 하늘로 솟났습니다. 이 부음기사는 40년이나 지각한 부끄러운 기사입니다. 1981년 그가 세상을 벗어났을 때 이 땅의 언론들은 부음 한 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고인이 된 언론인 이규행(1935~2008, 전 한국경제·문화일보 사장, 중앙일보 고문)은 이 사실을 통탄하면서 '매스컴의 허망함과 지식인의 맹점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류영모는 '궂긴 글' 한 줄 없는 고요한 죽음으로 은자의 생을 마무리하고 귀천(歸天)했습니다. 한국이 낳은 '정신사의 높은 봉우리'를 이제라도 제대로 기리고 가야겠다는 마음에서, 몹시 늦었지만 또한 몹시 긴급한 마음으로 오비추어리(Obituary)를 씁니다. 이 글은 그가 돌아간 시간을 기려 저녁 6시 30분에 첫 송고(인터넷 기사)를 하였습니다. 그 시간은 류영모가 평생을 정성껏 살며 갈망한 귀일(歸一·하나로 돌아감)의 순간입니다. 올해 때마침 입춘날로 돋우세운 봄의 크게 길함(立春大吉)이 얼생명으로 솟난 다석을 새로움으로 돋보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다석 류영모(1890~1981)]



2000년전 예수의 뜻을 섬긴 굳센 길

류영모가 돌아갔다. 그의 호(號)의 의미이기도 한 저녁 6시 30분에 91년 입은 세상의 몸옷을 벗었다. 90년 10개월 23일, 날수로 3만3200일을 살았다. 약 9억번 숨을 쉰 뒤 멈췄다. 고통과 격동의 시간이 뒤엉킨 20세기 한국에서 참된 '인자(人子·신의 성령을 받은 사람의 아들)'로 실천궁행하는 삶을 살았다. 서구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100년 역사 속에서, 2000년 전 예수의 뜻을 제대로 섬기려는 굳센 길을 걸었던 뚜렷한 사람이다.

삶은 간소했지만 치열했다. 예수가 십자가 죽음으로 전한 '신의 복음'은 류영모의 탁월한 사상적 감관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 충격과 감동으로 전해졌다. 그의 생을 돌아보건대, 그를 드러내는 걸맞은 칭호는 'K-영성(靈性)을 돋운 세계적 사상가'다. 21세기 코로나를 겪고 있는 뉴노멀시대에 우리는 근현대사의 큰 스승을 뒤늦게 주목한다.

 

[사진 오른쪽부터 류영모, 함석헌, 류달영.]



한국 산업화와 민주화와 철학사의 큰 스승

이름 내기를 원치 않았던 류영모가 세상에 간간이 알려진 건 뜻밖에 제자들 덕분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0년대 쿠데타의 먼지를 가리기 위해 국가재건의 의욕을 내세웠을 때 삼고초려로 어렵사리 그 리더에 앉혔던 사람은 류달영(1911~2004)이었다. 서울대 농대 교수를 지낸 그는 류영모를 사사한 제자로 농촌운동에 대해 큰 이상을 품고 있던 사람이었다. 새마을운동의 기틀은 류달영이 제시한 덴마크 부흥의 모델에서 비롯됐다. 류달영의 소신은 스승 류영모의 농촌관(農村觀)이 부화하여 낳은 사상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로 치달을 때 민주화운동의 앞줄에 나선 함석헌은 '씨알정신'을 외쳤다. 씨알사상은 스승 류영모에게서 배운 것이다. 광주가 영성(靈性)이 높은 도시로 헌신적 삶을 일관한 성자들이 배출된 성지라는 의미에서 '빛고을'이란 한글 이름을 붙여준 이도 류영모다. 일제 치하에서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직전까지 성자의 삶을 살다 간 김교신이 늘 높이 우러르며 강의를 청했던 사람도 류영모였다. 이승훈,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집결했던 오산학교의 교사와 교장을 지내면서 많은 빼어난 제자에게 각별한 삶의 모델이 되었던 사람도 그였다.

잠깐만 돌아보아도, 류영모는 한국의 경제적 기반을 이룬 새마을정신,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진보의 기반을 이룬 씨알정신, 그리고 기독교의 진면목을 꾸준히 일깨우며 전파한 '얼나사상'으로 이 나라 경제·사회·철학사 전반의 근간을 형성한 정신적 원천수(源泉水)임을 알 수 있다.

 

[다석 류영모(1890~1981)]



세계철학자대회, 한국 대표 사상가는 류영모

2008년 제22회 세계철학자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대회 주제는 '오늘 철학을 다시 생각함(Rethinking Philosophy Today)'이었다. 이 대회는 서양철학 중심의 대회였던 행사를 동양철학까지 아우르는 의미를 지녔다. 당시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의미에서 동양의 한국에서 치르는 세계철학자대회를 올해의 뉴스로 꼽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 우리의 철학자로 내세운 사람은 조선 유학자인 이황, 이이, 송시열, 정약용과 근현대 사상가 류영모, 그의 제자 함석헌이었다. 그중에서 세계에 내놓을 만한 독창적인 사상적 심화를 이뤄낸 사람으로 꼽힐 사람은 류영모 뿐이었다. 세계철학자대회에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우리 철학이 '류영모 사상'이었다는 점은 그 행사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놀람 속에 발견한 진실이었다.

류영모는 대중에게는 아직도 낯선 게 사실이다. 그런데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류영모에 열광하고 그를 사사(師事)하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이 사회의 지적(知的) 갈증, 나아가 영적(靈的) 허기를 채워주는 그의 존재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조선과 한국으로 이어진 이 땅의 사유(思惟) 흐름을 훌쩍 넘는 큰 사상가였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평가다. 그뿐만 아니라, 서구 역사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전개된 신앙사상의 '참'을 뚜렷이 직관하고 동양적 사유와 관점을 접속하여 눈부신 사상을 닦아냈다. 그 사상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신앙 실천의 길로 이어졌다. 교회와 교의와 교리에 얽매여 세속화하고만 믿음, 결국 비즈니스로 나아가버린 현대의 종교를 보편의 진리와 신관(神觀)으로 바로 세우고자 했다.

그는 교회를 나와 스스로의 내면 속으로 들어갔으며 생의 시시각각 신과의 접속을 추구했다. 스스로를 '비정통 기독교인'이라고 말했지만, 이 '비정통'이란 말은 인간이 무리를 지어 신을 호출하며 최면하는 방식의 종교가 정통인지를 묻는 날카로운 질문을 품고 있기도 했다. 류영모는 오직 신과 직접 교통하는 '얼나(모든 사람의 속에 들어오는 성령)'의 삶을 살고자 했다. 이 같은 신앙과 사상의 모델은 한국이 오히려 세계에 역(逆)전파할 K-영성(한국의 Spirituality)이라 할 만하다. 백범 김구가 꿈꾸었던 문화대국은 저 류영모의 영성 이론과 실천에서 하나의 길이 보인다.

 

[류영모는 내면 속에 '얼나(성령)'를 돋우는 일상의 수행을 강조했다. 요가체조를 하는 류영모.]

코로나19 이후, 류영모가 주목받은 까닭

류영모 사상이 최근 각별한 주목을 받는 까닭은 2000년 이상 인간을 번성하게 해온 밀착적 인간문명의 '좁은 사이'를 코로나 바이러스가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의 종교는 신과 인간의 단독 대면이 아니라, 밀착한 인간 군집(群集)이 신에게로 나아가려는 사회적 제의(祭儀)처럼 여겨져 왔다. 집단의 종교행위가 주는 안정감 자체가 그릇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질과 참된 양상을 직면하는 데 효과적이었는지 돌이켜볼 필요는 있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형식이 전염병을 번성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불렀다. 류영모는 자율신앙을 강조했다. 모든 신앙인은 홀로 스스로 신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신은 어디에도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 속에 '얼(성령)'로 들어와 있다. 이것이 류영모가 말하는 '얼나'다.

얼나는 인간 개개인의 생각 속에 들어 있지만, 신과 개인을 잇는 매체이다. 류영모는 인간과의 대면(對面)으로 신의 대면을 대체하려는 종교에 대해 경고해 왔다. 신앙은 철저히 신과 나의 단독자 대면일 뿐이며, 스스로 찾아나서는 자율행위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이 시대 교회들이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겨가면서까지 집회와 행사를 강행하는 까닭은 신앙의 독실함 때문이 아니라, 종교가 비즈니스화하고 집단의 권력으로 바뀌어 갑자기 그 생존의 기반을 바꿀 수 없는 비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다.

돌이켜보자. 코로나19는 종교의 민낯을 드러나게 하고 그 왜곡된 양상을 스스로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측면이 있다. 류영모는 그런 진상이 정작 종교가 해야 할 참을 행하지 않게 된 비극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그것은 코로나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노출일 뿐이다. 류영모는 이런 점에도 선각자였다.

 

[다석 류영모(1890~1981)]



천재적 영성의 언행일치 삶

■ 류영모의 생애

류영모는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살았다. 그 속에서 그는 놀라울 만큼 고요한 내면을 유지하면서 끝없는 생각의 불꽃으로 유례없는 사상적 진전을 이뤄냈다. 오산학교 교사로 그곳에 기독교를 심었고, 일제와 전쟁을 거치면서도 쉬지 않고 성경연구반 강연을 했다. 45세 때 은거를 시작하면서, 고행에 가까운 신앙 수행을 철저히 실천하는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다. 생의 전경(全景)에 감동이 있다. 이 땅이 서구인들에게서 받아들인 기독교가 천재적 영성(靈性)을 지닌 한 사람의 내면에 심어져서, 그 평생의 정진을 통해 어떻게 독보적인 꽃을 피웠는지를 깨닫는 감동이랄까.

그는 나라가 일제의 침탈에 무너져 가던 1890년 3월 13일 서울 남대문 수각다리 근처에서 13형제·자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11명이 어린 시절 죽음을 맞았으며 류영모 또한 콜레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서당에서 통감과 맹자를 배웠고, 수하동 소학교와 경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15세 때 서울 연동교회에 나가면서 기독교에 입문했고 경성일어학당에서 2년간 일본어를 배웠다. 19세 때 학생 신분으로 양평학교 교사로 뽑혀 근무했고, 20세 때 이승훈의 초빙으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2년을 지냈다. 오산학교가 기독교 학교가 된 것은 류영모의 힘이었다. 이후 일본 도쿄물리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나 곧 귀국한다. 25세 때 김효정과 결혼했다. 1919년에는 3·1운동 자금을 보관한 혐의로 부친이 구속되는 사태를 겪는다. 1921년에 조만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한다.

1928년 현동완의 부탁으로 YMCA연경반(성경연구반) 강의를 맡아 이후 35년간을 계속했다. 1935년에 북한산 아래 구기동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은거를 시작했다. 1941년 깨달음을 얻고 하루 한끼와 해혼, 널판 위의 무릎꿇기와 잠들기의 금욕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성서조선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구금됐고 57일 만에 풀려났다. 1945년 해방 이후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주민 추대를 받아 잠시 활동한 적도 있다. 기회가 있을 때는 피하지 않고 봉사의 길을 택했다. 1955년 1년 뒤 죽는다는 '사망예정일'을 발표했다. 이 당시 '예수의 길'을 걷는 의식이 더욱 뚜렷해진 것 같다. 다석일지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1961년 낙상사고로 서울대병원에 28일간 입원했다. 1977년 죽음을 찾아 떠나는 길을 나섰다가 혼수상태가 됐고 열흘 만에 일어났다. 1981년 2월 3일 오후 6시 30분에 3만3200일을 살고 숨을 거뒀다. 류영모의 말년(末年)은 치매를 겪었다. 그 또한 '육신'이 지닌 무기력과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이다. 예수도 넝마가 된 몸을 십자가 위에 전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육신과 영별한 그 순간, 그는 '얼나'로 솟나 하늘로 귀일(歸一)했다.
 

[다석 류영모[박상덕화백 畵]]



얼나, 얼삶, 탐진치 수신, 무유신관, 말숨사상

■ 류영모의 사상

그의 사상은 크게 얼나사상, 몸죽얼삶(죽음)사상, 참삶사상, 무유신관(無有神觀), 정음(正音)사상으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다.

다석사상의 기틀은 기독교사상이며 그 본령을 벗어나지 않았다. 동양의 사유체계나 철학적 관점들을 두루 꿰뚫으며 서양사상을 새롭고도 뚜렷하게 읽어내는 동서회통(東西會通)의 대지식인이었지만, 그것은 기독교가 세속화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신과의 참된 접속을 보정(補正)하는 방편으로 석가, 노자, 공자가 추구하고 득의(得意)한 경지를 빌어 쓴 것에 가깝다. 다석의 통지(通知, 두루 통달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지(正知, 제대로 아는 것)다. 빼어난 서구사상의 동맥경화를 동양의 깊은 성찰로 뚫어 바르게 통하게 했다는 점에서 '동서 회통(會通)'을 이룬 것이 다석사상이다.

1. 얼나사상, 내 속의 하느님 만나기= 얼나사상은 다석이 제창한 종교적 사유의 핵심이다. 얼나는 기독교의 성령(얼)을 '나'라는 주체적 인간과 결부함으로써 '신앙의 개별성(個別性)과 자율성'을 부각한 개념이다. 즉, 내 속에 하느님의 소립자(素粒子)인 얼나가 산다. 그 소립자는 상대세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얼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죽지도 않는다. 몸생명과는 다른 생명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신은 몸나가 아닌 진짜 나다. 예수는 바로 스스로가 '얼나'이며, 얼나를 증명하러 온 신의 메신저다. 인간의 얼나는 신의 사랑이 들어온 것이며, 그것은 죽지 않는다. 그렇게 부활과 영생을 설파했다.

2. 얼삶사상, 죽음은 얼생명의 탄생 순간= 얼삶(靈生)사상은 얼나사상이 결국 '죽음의 역발상'을 전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죽는 것은 죽는 게 아니다. 생명을 받은 짐승인 몸이 죽는 것일 뿐이다. 죽음의 순간은 신과 귀일(하나에게로 돌아감)하는 얼생명 탄생의 순간이다. 예수는 '죽는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 온 존재다. 죽음이 어떻게 삶이 되는지를 십자가 위에서 몸으로 증명했다. 예수도 몸은 죽었다. 이 사상은 육신멸망이 빚어내는 생물학적인 충격에 휘둘리지 말고, 죽음과 참삶의 교차를 직시하라는 신의 명령을 들려준다. 그것을 우린 생명(生命, 살아숨쉬는 인간에게 신이 내린 명령)이라 부른다.

3. 참삶사상, 탐진치원죄론과 신앙적 수신(修身)= 참삶사상은 '죽음'에 대해 확고한 관점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사상이다. 우선 몸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몸은 짐승들이 받은 육신과 다르지 않다. 짐승 성질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것이 탐진치(貪瞋痴)다. 류영모는 기독교의 원죄론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오작동'을 겨냥한 것이라고 본다면, 인간의 짐승 욕망이 선악과일 수 있다고 봤다. 즉, 식욕(貪)과 성욕(痴)과 호전성(瞋)이 선악과이다. 그 선악과를 따먹지 않기 위해 제어하는 수신(修身) 매뉴얼이 필요한데, 기독교는 이것을 교리와 교회로 풀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 수신은 개인이 스스로 신과 직면하면서 해야 하는 수신이다. 탐진치 원죄론은 류영모가 확립한 사상이다. 그는 이 원죄를 제어하는 생을 실천적으로 보여줬다. 참삶사상은 또한 살아있는 기간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를 담는다. 그가 제시한 것은 하루살이 사상이다. 예수가 3년여의 공생활 끝에 죽음을 맞은 그 절박한 '생명의 대기(待期)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삶을 경영하는 핵심으로 봤다. 하루살이처럼 살라. 9억번의 숨을 쉬는 시시각각으로 살라. 날수 계산은 '예수의 시간'을 살자는 것이다.

4. '없이계심' 신관(神觀)= '무유(無有)'신관은 류영모가 주창한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탁월한 존재 논증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노자 도덕경에 등장하는 무유입무간(無有入無間)에서 따온 말이기도 하다. '있음이 없으면 없음 사이로 들어간다'란 의미다. 서구에서 신의 존재논증을 꾸준히 벌여왔으나 명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고대 때부터 유지해온 '로고스'의 세계관 때문이다. 즉, 신과 인간이 존재론적인 로고스 아래에서 그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 보니 절대의 세계를 표현해내지 못한 것이다. 동양은 로고스를 넘은 존재에 대해 오래전부터 사고해 왔다. 그 존재논리를 설명한 것이 도덕경의 무유입무간이다. 상대세계와 절대세계의 접속을 표현하고 있다. 류영모의 '긋'이란 개념 또한 그렇다. 점(點·긋)이란 것이 개념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상대세계에서 실체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는 긋으로 얼나의 위치와 신과의 접점을 가리켰다.

5. 정음(正音)사상은 말숨 살이= 정음사상은 훈민정음이란 말에서 빌린 것이다. 정음은 인간에게 참된 바른 말, 즉 신의 복음을 의미한다. 훈민은 사람들을 일깨운다는 의미다. 정음으로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신의 메시지'다. 말숨은 신과 인간 사이에 '말'이 숨결(생명)을 불어넣어 준다는 의미다. 류영모는 한글이 지닌 형상의 기호를 신학으로 숙성시켜 '한글신학'을 낳았다. 한글은 천지인(天地人)의 형상을 바탕으로 동양의 철학적 관념을 기호화하여 대중들이 문자소통을 할 수 있도록 조선의 군주가 직접 창안한 유례없는 문자다. 류영모는 한글과 우리말로 탁월한 사상체계를 오롯이 전개했다.빈탕한데, 없이계심, 한얼, 긋, 깨달음, 가온찍기, 신의 막대기(한글 모음 'ㅣ'), 신비와 신통 등 언어를 십분 활용한 개념들을 제시했다. 류영모의 사상은 우리말사상이자 한글사상이다. 이런 주체적인 사고방식은 한국의 언어로 우주와 세계를 고차원으로 사고한 K-영성의 독보적인 모델이다. 이런 뚜렷한 철학사상가를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미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함부로 묻어둔 채 살아온 일이 부끄럽고 송구할 따름이다. 몹시 늦었으나, 솟나로 거듭나신 날 그 값진 길을 새삼 우러르며.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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