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890~1981)가 2월 3일 하늘로 솟났습니다. 이 부음기사는 40년이나 지각한 부끄러운 기사입니다. 1981년 그가 세상을 벗어났을 때 이 땅의 언론들은 부음 한 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고인이 된 언론인 이규행(1935~2008, 전 한국경제·문화일보 사장, 중앙일보 고문)은 이 사실을 통탄하면서 '매스컴의 허망함과 지식인의 맹점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류영모는 '궂긴 글' 한 줄 없는 고요한 죽음으로 은자의 생을 마무리하고 귀천(歸天)했습니다. 한국이 낳은 '정신사의 높은 봉우리'를 이제라도 제대로 기리고 가야겠다는 마음에서, 몹시 늦었지만 또한 몹시 긴급한 마음으로 오비추어리(Obituary)를 씁니다. 이 글은 그가 돌아간 시간을 기려 저녁 6시 30분에 첫 송고(인터넷 기사)를 하였습니다. 그 시간은 류영모가 평생을 정성껏 살며 갈망한 귀일(歸一·하나로 돌아감)의 순간입니다. 올해 때마침 입춘날로 돋우세운 봄의 크게 길함(立春大吉)이 얼생명으로 솟난 다석을 새로움으로 돋보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류영모가 돌아갔다. 그의 호(號)의 의미이기도 한 저녁 6시 30분에 91년 입은 세상의 몸옷을 벗었다. 90년 10개월 23일, 날수로 3만3200일을 살았다. 약 9억번 숨을 쉰 뒤 멈췄다. 고통과 격동의 시간이 뒤엉킨 20세기 한국에서 참된 '인자(人子·신의 성령을 받은 사람의 아들)'로 실천궁행하는 삶을 살았다. 서구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100년 역사 속에서, 2000년 전 예수의 뜻을 제대로 섬기려는 굳센 길을 걸었던 뚜렷한 사람이다.
이름 내기를 원치 않았던 류영모가 세상에 간간이 알려진 건 뜻밖에 제자들 덕분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0년대 쿠데타의 먼지를 가리기 위해 국가재건의 의욕을 내세웠을 때 삼고초려로 어렵사리 그 리더에 앉혔던 사람은 류달영(1911~2004)이었다. 서울대 농대 교수를 지낸 그는 류영모를 사사한 제자로 농촌운동에 대해 큰 이상을 품고 있던 사람이었다. 새마을운동의 기틀은 류달영이 제시한 덴마크 부흥의 모델에서 비롯됐다. 류달영의 소신은 스승 류영모의 농촌관(農村觀)이 부화하여 낳은 사상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로 치달을 때 민주화운동의 앞줄에 나선 함석헌은 '씨알정신'을 외쳤다. 씨알사상은 스승 류영모에게서 배운 것이다. 광주가 영성(靈性)이 높은 도시로 헌신적 삶을 일관한 성자들이 배출된 성지라는 의미에서 '빛고을'이란 한글 이름을 붙여준 이도 류영모다. 일제 치하에서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직전까지 성자의 삶을 살다 간 김교신이 늘 높이 우러르며 강의를 청했던 사람도 류영모였다. 이승훈,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집결했던 오산학교의 교사와 교장을 지내면서 많은 빼어난 제자에게 각별한 삶의 모델이 되었던 사람도 그였다.
잠깐만 돌아보아도, 류영모는 한국의 경제적 기반을 이룬 새마을정신,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진보의 기반을 이룬 씨알정신, 그리고 기독교의 진면목을 꾸준히 일깨우며 전파한 '얼나사상'으로 이 나라 경제·사회·철학사 전반의 근간을 형성한 정신적 원천수(源泉水)임을 알 수 있다. ['40년만에 쓴 부음기사'로 계속]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