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통합

2021-01-1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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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새해 첫날 꺼낸 ‘이명박 박근혜 사면’ 카드와 국민통합론에 대해 여론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 대표는 “국민과 함께 전진하려면 사회갈등을 완화하고 국민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했지만 갤럽조사에선 사면 반대가 54%, 찬성이 37%였다(민주당 지지층에선 반대가 75%). 11일 리얼미터 조사에서도 사면이 국민통합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란 응답이 56.1%로 기여할 거란 응답(38.8%)보다 많았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신년인사회(7일)에서 “새해는 통합의 해”라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신년사(11일)에선 ‘통합’이란 말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애초 사면과 통합을 분리했더라면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면은 시기상조다. 자칫하면 진영 간 대립을 격화시킬 개연성이 크다. 박 전 대통령을 석방하게 되면 그를 지지해온 세력에겐 리더(장수)가 생기는 셈이다. 돌아온 장수 아래 재(再)충전될 그 힘이 어디로 분출될지는 불문가지다. 사면은 해야 한다. 그러나 내년 3월 대선 후, 문 대통령이 당선자의 건의를 받아서 하는 형식을 취하는 게 순리다. 그래야 문 대통령도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차원에서 짐을 벗을 수 있고, 새 대통령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임기를 시작할 수 있다.

美 의사당 난입사건을 반면교사로

사면은 그렇게 정리하고 지금은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통합의 문제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지금 이 상태로 대선을 치른다면 누가 승자가 되든 극심한 대립과 분열에 휩싸일 소지가 농후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선 불복과 지지자들에 의한 사상 초유의 국회의사당 난입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여야는 지금부터라도 머리를 맞대고 국민통합을 위해 제도적으로 손볼 데는 없는지 살펴야 한다. 선거철이 시작되면 그때는 이미 늦다. 주요 정당의 국민통합 관련 부서들끼리라도 소통하고 회합하기를 권한다. 대통령부터 그런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민통합은 정의(定義)하기가 쉽지 않은 말이다. 우리는 거의 습관적으로 ‘국민통합’이라고 쓰지만 학계에선 주로 ‘사회통합’이라는 표현을 쓴다. ‘사회통합’이라고 쓰고, 괄호 안에 영어로 ‘social integration’이 아닌 ‘social cohesion’이라고 붙인다. 아마 사회통합이 국민통합보다 범위도 넓고, 가치중립적인 표현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싶다. 국민통합을 사회통합의 하위요소로 보기도 한다. ‘국민’(national)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국수적인 느낌도 마뜩잖았을 것이다. ‘cohesion’은 ‘결속’이다. 통합은 곧 결속이라는 뜻일 게다. (이런 미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선 그냥 국민통합으로 쓰겠다.)

국민통합에 대한 다양한 이론에도 불구하고 통합은 한 국가가 지향해야 할 가장 보편적인 가치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가 자체가 구성원들, 또는 구성요소들의 통합을 전제로 만들어지고 존재한다. 적어도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지금과 같은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nation-state)체제가 들어선 이후의 ‘국가’라면 다 그렇다. 따라서 그런 국가에 사는 국민의 삶은 본질적으로 통합의 삶이지 분열의 삶이 아니다.

국민통합은 “다양한 특성을 지닌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갖고 공동의 비전을 공유하며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상태”, 또는 “한 사회 내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잘 결속되어있느냐는 상태”로 정의되기도 한다(노대명 외, 사회통합 과제 및 추진전략 2009년, 한국사회통합지표연구 2010년). 통합을 시민의 헌신과 존경을 이끌어내고, 체제 안에서 실질적, 형식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느냐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결국 통합은 “국민이 가치와 이념에 대한 공유된 믿음 속에서 갈등과 분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상태나 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갈등의 순기능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통합논의의 출발점은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치나 이념이 있느냐에 모아져야 한다(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정치적 표현이고, 엄밀히 말하면 화이부동(和而不同), 곧 화합하되 같지는 않은 상태를 말한다).

국민의 결속을 다질 가치가 뭔가

박근혜 정부 출범 직전인 2013년 1월 28일, 한국경제연구원(KERI) 주최로 ‘국민통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주제의 토론회가 열렸다. 발제자인 강규형 교수(명지대‧ 전 KBS이사)는 ⓵대한민국의 정통성 인정 ⓶건전한 시장경제의 틀 ⓷자유민주주의 ⓸국제협력 대외개방 노선을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기본가치로 꼽았다. 상대가 아무리 미워도, 설령 싸울 일이 있더라도 이 네 가지의 가치만큼은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거였다.

그로부터 8년이 흘렀다. 사회도, 정권도 바뀌었다. 진보의 바람은 더 거세졌다. 그럼에도 강 교수가 제시한 이 네 가지 가치는 여전히 유효할까. 나는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서 이낙연 대표의 생각이 궁금하다. 이 가치들은 강 교수의 개인 의견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 국민 절대 다수가 공감하고, 실천해온 가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로 인해 전후(戰後) 발전국가의 모범으로 추앙받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켜켜이 쌓인 부조리와 폐단이 결국 오늘의 적폐(積弊)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대표는 이들 네 가지 가치에 더하거나 뺄 게 있다고 보는지, 그게 궁금하다.

정치전문기자인 성한용 한겨레신문 선임기자는 이 대표를 “2003년 초선 이래 세대통합, 이념통합, 지역통합을 주장해온 중도나 중도보수에 가까운 정치인”으로 분류한다. 그는 이 대표가 사면을 통해 “자신의 본래 정체성인 ‘통합’의 가치를 정면에 내세우고 ‘이낙연류’의 정치를 시작했다는 점은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한겨레 1월 10일). 그렇다면 더더욱 답해야 한다. 이 대표는 어떤 가치들을 우리 사회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로 보는가. 국민 다수가 납득할 만한 답을 주지 못한다면 그의 통합론은 일각의 인식대로 레토릭(修辭)이거나 지지율 하락에서 벗어나보려는 방편에 불과할 수도 있다.

국민통합과 직결되는 건 역시 양극화 문제다. 소수가 부(富)를 비롯한 제반 가치들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에선 통합이 쉽지 않다.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면 어느 수준에서 개입이 이뤄져야 하는지,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이 대표는 우리 실정에 맞게 시장과 국가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서 제시하고, 그 불가피성을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테크노크라트 출신의 한 전직 고위관리는 필자에게 “균등과 불균등이 공존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경제와 사회의 역동성은 불균등에서 나오고, 통합과 안정의 동력은 균등에서 나온다는 취지였다.

토착왜구’ 발언, 누군가는 사과해야

법치와 행태의 영역에서도 국민통합은 이뤄져야 한다. 통합은 공정과 정의의 토대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게 법치다. 지난 4년간 집권세력이 보여준 숱한 내로남불 시비는 법치의 존재에 심각한 의문을 갖게 한 게 사실이다. 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쟁송(爭訟)이 단적인 예다. 국민통합의 안전판이 되어야 할 법치가 통합을 훼손한 꼴이 됐다. 내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절반의 국민을 배제하거나, 심지어는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그런 행태도 즉각 멈췄으면 한다. 국민이 왜 갑자기 ‘토착왜구’가 되어야 하는가. 문 대통령과 추종자들에겐 그게 ‘양념’이었는지 몰라도 다수 국민은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역대 어떤 정권도 자국민(自國民)에게 그런 패륜의 언사를 쓴 적이 없다. 이에 대해서도 분명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

국민의 상처를 씻어주고 이를 통해 국가의 기본가치에 대한 공통된 믿음을 회복하게 하는 게 국민통합이다. 그럼으로써 불필요한 갈등과 분열은 줄이고, 코로나 사태 이후 밀어닥칠 안팎의 새로운 도전에 대비해야 한다. 이 대표는 과연 그럴 의지와 용기가 있는가. 국민이 묻고 있다. 단언컨대 지금과 같아서는 우리에게 미래는 없어 보인다. 누가 정권을 잡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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