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뷰] 추미애 장관이 올린 시, 이육사의 '절정'과 오독의 절정

2020-12-18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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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의 '절정'



 

[이육사 시인]


이 시는 1940년 1월, 이육사 나이 37세 때에 발표한 시다. 죽기 4년전에 쓴 것이다. 우리는 이육사를 시인으로 더 많이 기억하지만, 그는 식민지배하의 독립무장투쟁가로 20대 초반부터 치열하고 위험한 삶을 살았다. 22세때부터 정의부, 군정서, 의열단에서 활동했고, 여러 차례 일제에 검거되어 옥살이를 했다. 1931년 만주사변 때는 봉천의 김두봉과 함께 지냈고 1932년엔 김원봉의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에 입교하기도 했다. 그는 1944년 북경의 옥중에서 죽음을 맞았다.

광야의 삼엄한 겨울을 찍어낸 30대의 정신풍경

이육사는 독립운동으로 자주 북방을 들락거렸다. '절정'이 묘사한 풍경은 그 투쟁의 길에서 마주친 광야의 삼엄한 겨울을 찍어낸 30대의 정신의 진경(眞景)이다. 검질긴 추격을 따돌리며 북방 끝까지 내달린 그의 시야에 펼쳐진 건 하늘도 끝난 고원이었다. 무엇도 살을 에는 바람을 막아줄 것이 없는 허허벌판의 서릿발 앞에 선 이 청년은, 한치 나아갈 곳 없는 자리에서 이 절망을 헤쳐나갈 길을 달라는 간구를 할 무릎기도의 한 치조차 허용받지 못했다. 맥락을 치밀하게 읽지 않고 정황만 보아서 단순히 일제 저항시의 백미라고 말하는 것은, 시를 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그의 정신의 주소만을 읽은 것이다. 이건 마침내 자기와의 싸움에 든 자의 결연하고 비장한 최후의 고백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시인 신석초는 이육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얼굴은 둥근 편이었다. 뚜렷한 달덩이 같은 얼굴이란 표현은 그와 같은 용모를 말함이리라. 얼굴빛이 그리 희지는 않았지만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고 구김새가 없었다. 한점 티끌이 없는 얼굴이다. 그 위에 상냥하고 관대하고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 신사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

그가 겨울을 강철로 된 무지개로 묘사한 것은, 어떤 투쟁에도 꿈쩍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일정한 절망의 표현일 수 밖에 없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전쟁에서, 그는 구체적인 전진 대신 눈을 감고 문제를 새롭게 읽는 성찰에 들어간다.

강철 무지개는 무엇인가

그래, 이 겨울은 강철인 건 맞아. 그러나 그것은 무지개다. 저 강철을 인간인 내가 뚫을 수는 없지만, 무지개는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은 단호하게 빛나는 형상으로 거기 서 있지만, 이것은 강약의 싸움이 아니라 시간의 싸움이다. 이런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육사가 시의 제목을 '절정'이라 한 것을 보라. 절정은 반드시 넘어갈 수 밖에 없는 고비다. 아무리 강하고 아무리 높아도 쓰러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 고통의 절정, 내 수난의 절정 또한, 저 무지개가 걷어가고 말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마지막 일각을 버텨내는, 육사의 달덩이같은 얼굴 속의 쇳덩이같은 내면을 살피는 것이다.

신석초가 기억하는 육사와의 영별 장면을 다시 따라가보자.

"육사를 이야기할 때마다 나의 머리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1943년 1월 새아침의 일이고, 그 해 가을 육사가 잠시 귀국했다가 일본 관헌들에게 붙들려 북경으로 압송되던 일이다. 그때는 양력 설에 역시 철시를 하고 묻을 닫고 하였지만 설을 쇠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양력으로 설을 쇠지 않는 것은 일정에 대한 무언의 저항으로까지 여겨지던 때다. 그래서 1월1일은 집에 들어앉아 찾아오는 이도 없이 책을 뒤적거리거나 뒹굴뒹굴하며 낮잠을 자거나 하는 우울한 날이다. 1943년 신정은 큰 눈이 내려 온통 서울이 새하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아침 일찍 육사가 찾아왔다. 그리고 문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재촉하여 답설(踏雪, 눈밟기)을 하러 가자고 하였다. 중국사람들은 신정에 으례 답설을 한다는 것이다. 조금 뒤에 우리는 청량리에서 홍릉 쪽으로 은세계와 같은 눈길을 걸어갔다. 우리의 발길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임업시험장 깊숙이 말끔한 원림 속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울창한 숲은 온통 눈꽃이 피어 가지들이 용과 뱀처럼 늘어지고 길 양쪽에 잘 매만져진 화초 위로 화사한 햇빛이 깔려 있었다. 햇볕은 눈 위에 반짝이고 파릇파릇한 햇싹이 금방 돋아날 것만 같다.

<가까운 날에 난 북경엘 가려네.>

하고 육사는 문득 말했다. 나는 적이 가슴이 설렘을 느꼈다. 한창 정세가 험난하고 위급해지고 있는 판국에 그가 북경행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중대한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케 하고 있었다. 그때 북경 길은 촉도만큼이나 어려운 길이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다름없이 상냥하고 사무사(思無邪)한 표정이었다. 그 봄에 그는 표연히 북경을 향하여 떠나간 것이다. 그 해 늦가을에 서울에 올라와 보니 뜻밖에도 육사가 귀국해 있었다. 그때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곧 친구들을 모아 시회를 열기로 했다. 그래 우리집에 모두 모였는데 육사 형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불안한 예감으로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과연 밤 늦게야 그의 아우가 와서 육사는 헌병대가 와서 체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해갔다는 말을 전한다. 우리는 절망하였다. 그리고 분통과 충격으로 한동안 묵연하여 술잔을 들지 못하였다. 그는 이듬해 1월16일 북경 옥사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40세의 짧은 생애를 조국에 바쳐 열렬히 산 풍운아였다. 그의 겸허한 얼굴은 언제나 폭풍우 앞의 정적과 같은 그런 고요를 지니고 있었다."


 

[추미애 법무장관(사진=연합뉴스)]

강철 무지개는, 강하지만 곧 사라질 일제를 의미

지난 15일 추미애 법무장관이, 현직 검찰총장의 검사 징계위원회가 열렸을 때 소셜망에 육사의 시 '절정'을 언급했다. 그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대목을 인용하며 "그렇다. 꺾일 수 없는 단단함으로 이겨내고 단련되어야만 그대들의 봄은 한나절 볕에 꺼지는 아지랭이가 아니라 늘 머물 수 있는 강철 무지개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해석은 몰론 자유다. 강철 무지개가 '강철 대오'라는 낯익은 용어가 연상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읽으면 시의 긴장이 확 떨어지는 평면적인 '진술'에 그치고 만다. 이건 육사의 시격(詩格)에 대한 몰이해에 가깝다. 강철 무지개는, 지금은 이토록 강하지만 무지개처럼 곧 사라질 일제(日帝)를 의미하며 식민지 압제의 엄혹한 겨울을 상징하는 말이다. 

하지만, 강철과 무지개는 모순어법으로 읽는 것이 시의 전체를 힘있게 하는 반전의 묘미를 준다. 꺾일 수 없는 단단함이나 늘 머물 수 있는 '상상의 무지개'라면, 일제를 찬양하는 것 밖에 더 되는가. 한 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치고 마침내 순국까지 한 이육사가, 마지막에 가장 힘있게 제시한 메타포가 그 정도의 졸렬에 머물렀겠는가. 강철인 듯 하지만 결국은 절정을 지나면 사라지는 무지개인 너. 지금 좌절을 위해 무릎 꿇을 한치도 없이 내몰린 나.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그런 말을 담은 시다.

시가 담은 이 절묘한 뜻을 제대로 읽었다면, 정말 투쟁력 9단의 내공이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몰린 나, 기껏해야 강철 무지개인 너.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상국 논설실장 (시인 이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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