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여정, 美 비건 '고별방한' 첫날에 文정부 최장수 장관 저격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사진=조선중앙TV 화면 캡처]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가 내년 1월 미국 정권 교체를 앞두고 ‘고별 방한’ 일정에 본격적으로 나선 9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문재인 정부의 최장수 장관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공개 저격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작성된 김 제1부부장의 대남(對南) 비난 담화를 이날 공개했다. 김 제1부부장은 지난 5일(현지시간) 강 장관이 중동 순방에서 한 발언을 문제 삼아 “얼어붙은 북남 관계에 더더욱 스산한 냉기를 불러오고 싶어 몸살을 앓는 모양”이라고 날을 세웠다.

김 제1부부장의 대남 비난은 지난 6월 17일 이후 6개월 만이다. 당시 그는 문재인 대통령의 6·15 공동선언 20주년 기념행사 영상 메시지를 겨냥해 ‘철면피한 감언이설’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주무부처인 통일부와 비난 대상이 된 외교부는 김 제1부부장의 담화에 대해 별도의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다. 다만 외교부는 김 제1부부장이 지적한 강 장관의 발언 취지가 ‘북한의 국제방역 참여’였다고 설명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가운데)이 지난 5월 1일 김 위원장의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 참석 행보에 동행했다. [사진=조선중앙TV 화면 캡처]

 

◆北 외무성·통전부도 있는데···김여정 왜 직접 나섰나

최근 6개월간 조용했던 김 제1부부장이 돌연 침묵을 깨고 대남 담화를 발표한 배경을 두고 각종 해석이 등장했다.

북한은 통상적으로 내부 체제에 대한 외부 언급에 대해선 외무성이나 통일전선부 등을 통해서 대응했다. 그러나 이날 김 제1부부장이 직접 나선 것은 그가 대남 업무를 총괄한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북측이 이번 사안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김 제1부부장을 앞세워 문재인 정부의 인사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속내가 담겼다는 분석도 나왔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별도 입장문을 통해 김 제1부부장의 담화에는 문재인 정부의 입법권에 이어 인사권까지 개입하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계산된 전술이 담겼다고 주장했다.

태 의원은 “대북비난 성격이 별로 강하지 않은 애매한 발언에 대한 (북한의) ‘강경화 찍어내기식 담화’ 발표는 우리 정부 관계자들을 ‘입단속’ 시키려는 목적”이라며 “더 중요하게는 향후 남북 관계에서 주연으로 등장할 김여정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김정은의 계산된 전술”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될 것으로 보이는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을 언급했다.

태 의원은 “지금 북한은 대북전단 금지법 국회 통화가 눈앞에 오자 대북전단 문제는 김여정의 요구에 따라 ‘승리적으로 결속’된 것으로 간주, 현재 우리 내각 장관 중 앞으로 교체 가능성이 제일 큰 강경화 장관을 좌표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이어 김 제1부부장의 담화에 ‘남북 대화를 재개하려면 강 장관을 교체하라’는 속뜻이 담겼다고 역설했다.

지난 6월 김 제1부부장이 북한이탈주민(탈북민)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행위를 지적한 이후 정부 내에서 대북전단 살포금지법 입법 추진이 논의됐고, 이날 국회 본회의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 때문에 북측이 김 제1부부장이 대한민국 입법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판단, 다시 한번 힘을 과시하려고 담화를 발표했다는 얘기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 위원장이 안간힘을 써온 북한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사업 성과를 평가절하했다는 판단에 여동생인 김 제1부부장이 직접 나섰다는 해석도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연설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런데 이를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 수장이자 최장수 장관인 강 장관이 국제무대에서 북한의 코로나19 확진자 ‘0명’ 주장에 대해 “믿기는 어렵다”며 공개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 이에 분노했다는 의미다.

정성장 미국 윌슨센터 연구위원(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은 코로나19의 국내 유입을 막고자 ‘국경 폐쇄’라는 극단적인 조처를 해가면서 총력을 기울였다”면서 “그런데 한국의 외교부 장관이 이 같은 성과에 대해 국제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의구심을 표명하니까 북한 지도부의 자존심이 많이 상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9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최종건 외교부 1차관과 회담하고 있다.[사진=사진공동취재단]

 

◆美 비건 방한 때마다···비건 ‘고별 방한’ 맞춤형 담화?

김 제1부부장의 이날 담화는 발표 시기도 눈에 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제1부부장의 담화 작성일은 8일이다. 그런데 담화문 공개는 하루가 지난 9일에 이뤄졌다.

전날 한국에 도착한 비건 부장관은 이날 오전 외교부 청사에서 최종건 외교부 1차관과 한미 외교차관 회담을 했고, 오후엔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교대학원 교수는 “(강 장관의) 5일(현지시간) 발언을 8일 담화로 경고한 것은 담화 발표 여부에 대한 내부 논의 시간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비건의 방한에 맞춘 것은 대북문제에 대해 한·미 양측이 언행에 신중을 기해 달하는 의미가 담겼다”고 풀이했다.

김 제1부부장이 대남 이외 대미 업무도 총괄하는 것으로 알려진 만큼, 의도적으로 남북 관계의 긴장을 조성해 비건 부장관에게 적극적인 협상에 나서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해석이다.

다만 앞서 국가정보원은 북한이 정권 교체를 앞둔 미국 행정부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고 보고한 바 있다. 당시 국정원은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보고에서 북한이 해외공관에 ‘사견이나 미국을 자극하는 대응을 하지 말 것. 문제 발생 시 해당 대사에게 책임을 묻겠다’라고 공지했다고 밝혔다.

한편 김 제1부부장은 지난 7월 8일 한국을 찾은 비건 부장관을 향해 날을 세운 바 있다. 당시 방한 기간 비건 부장관은 “김 위원장이 나와의 협상 대상을 임명할 때 그리고 그 사람이 협상 준비가 돼 있고 협상 권한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북측에 협상 대상을 명확히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김 제1부부장은 3일 뒤인 7월 10일 담화에서 “우리는 결코 비핵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며 “조선반도(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자면 우리의 행동과 병행해 타방의 많은 변화 즉 불가역적인 중대조치들이 동시에 취해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고 북·미 대화 재개 조건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