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 살인죄로 15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무죄가 확정돼 풀려난 한 중국 남성이 오심을 한 법원에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법원은 "계속 사과를 요구하면 배상금의 4분의 1을 삭감해 버리겠다"며 해당 남성의 입을 막으려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 누리꾼들이 격분했다.
중국 사회를 경악케 한 살인마의 재판을 맡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바 있는 스타 판사가 살인죄로 기소됐다. 지방의 한 도시에서는 다수의 판검사가 부패 커넥션에 연루돼 충격을 줬다.
이 밖에 올 한 해에만 수많은 법조 비리가 드러났다.
잇단 악재에 최고인민법원은 "인민들이 평등과 공정을 체감할 수 있도록 바른 기풍과 엄격한 기율을 견지하라"고 기강 다잡기에 나섰다. 하지만 성난 민심을 다독이기에는 역부족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집권 이후 의법치국(依法治國·법에 의한 통치)을 입버릇처럼 외쳐 왔지만 인치(人治)의 관행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모습이다.
여전히 권위·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사법부 및 법조계와 정의에 민감해진 대중의 눈높이 격차 속에 중국식 법치주의가 표류하고 있다.
◆억울함 호소하자 배상금 깎겠다는 법원
2005년 2월 산둥성 린수(臨沭)현에서 한 여고생이 실종된 지 한달 만에 인근 고등학교의 남자 화장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현지 공안은 해당 고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장즈차오(張志超)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이듬해 3월 산둥성 린이(臨沂)시 중급인민법원은 강간 살인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2011년 장즈차오는 고문에 의한 자백 강요를 폭로했고 치열한 공방 끝에 2018년 1월 최고인민법원은 산둥성 고급인민법원에 재심을 지시했다.
지난 1월 무죄가 확정되자 장즈차오는 6월 자신에게 무기징역을 언도했던 린이시 중급인민법원에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장씨가 요구한 금액은 789만 위안(약 13억4000만원)이었지만 법원은 지난 20일 배상금을 332만 위안(약 5억6300만원)으로 확정했다.
언론의 관심이 쏠리자 법원은 장씨 측에 "왜 이렇게 많은 기자들을 불렀느냐"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또 배상금과 별개로 오심에 대한 공개 사과를 요구하자 거절 의사를 밝힌 뒤 "계속 고집하면 70만~80만 위안의 배상금을 삭감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놨다.
장씨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계정에 오심 당사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을 재차 요구하며 "누구도 15년의 청춘을 332만 위안과 맞바꾸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장씨의 법률 대리인인 리쉰(李遜) 변호사는 언론에 "소송이 길어지면서 장씨와 그의 어머니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됐다"며 "배상금은 두 모자가 십수년간 입은 상처에 대한 작은 보상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법원 위세에 찍소리 못하는 피해자
해당 법원은 여전히 사과를 거부하고 있지만, 장씨 정도의 용기를 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산둥성 페이(費)현의 농민 런옌훙(任艶紅)은 8년간의 억울한 옥살이 끝에 무죄가 선고됐다. 런씨에게 지급된 배상금은 178만 위안.
그는 법원과 배상금 규모를 협의하던 중 법원 관계자의 구두 사과를 받는 대가로 공개 사과 및 명예회복 요구를 철회하기로 했다.
소송 과정에서 소요된 비용과 향후 진료비를 받을 권리도 포기했다. 법조계 인사들은 암암리 법원의 압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런씨는 2011년 같은 마을에 살던 리중산(李忠山) 일가족 4명을 독살한 혐의로 구속돼 2013년 린이시 중급인민법원에서 사형 집행 유예 판결을 받았다. 공개 사과 여부를 놓고 장씨와 충돌했던 바로 그 법원이다.
중국의 사형 집행 유예제는 사형 집행을 2년간 유예한 뒤 수형 생활 태도에 따라 무기징역이나 유기징역으로 감형해 주는 제도다.
공안과 법원은 런씨가 리중산에게 강간을 당한 뒤 원한을 품고 그를 살해한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산둥성 고등인민법원은 사실 관계가 불명확하고 증거도 불충분하다며 원심 결과를 두 차례나 파기 환송했다. 린이시 인민검찰원은 지난해 마지못해 기소를 취하했다.
9억4600만 위안(약 1603억원)의 배상금을 청구했다가 75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126만 위안(약 2억1400만원)만 받고 소송을 포기한 사례도 있다.
저장성 타이저우(臺州) 출신인 옌자쥔(閆家軍)은 1997년 안후이성으로 건너와 사업을 시작했다.
2007년 안후이성 쑤이시(濉溪)현 정부가 입찰한 산책길 조성 사업과 소형 조선소 건설 사업을 잇따라 따내며 승승장구하던 옌씨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자금난을 겪기 시작했다.
채권자는 빚을 갚지 못한 옌씨를 고소했고, 안후이성 마안산(馬鞍山)시 중급인민법원은 자본금 허위 신고와 계약 사기 등의 죄를 물어 징역 14년을 언도했다.
10년 가까이 징역 생활을 하던 그는 끈질기게 항소해 지난해 말 징역 12년에 처해진 계약 사기죄의 무죄를 이끌어냈다.
유죄가 확정된 자본금 허위 신고죄를 제외해도 7년이 넘게 무고한 징역살이를 한 셈이다. 배상금 청구 소송을 시작한 옌씨는 겨우 126만 위안을 손에 쥔 채 추가 소송을 포기했다.
옌씨는 차이신(財新)과의 인터뷰에서 "회사가 입은 손실은 한푼도 보상을 못 받았다"며 "배상금으로는 부채 상환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국가 배상이 이상적으로 이뤄지기는 불가능한 것 같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며 가족 모두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살인 판사, 뇌물 법원장…곳곳서 썩은내
지난 21일 다수의 중국 언론은 윈난성 쿤밍시 중급인민법원 소속 다오원빙(刀文兵) 판사가 살인죄로 기소된 소식을 전했다.
기소는 지난 6월 이뤄졌지만 중국재판문서망에 게재된 관련 내용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다오 판사에게 적용된 혐의는 살인과 증거 인멸, 불법소득 은닉, 불법 총기 소지 등이다. 그는 6월 말 이미 면직 처분을 당한 상태다.
현지 언론들은 다오 판사가 내연 관계의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했다.
판사가 살인을 한 것도 놀랄 일이지만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라 더 논란이 됐다.
다오 판사는 2004년 중국을 떠들썩하게 한 '마자줴(馬加爵) 사건'의 재판장이었다.
윈난대에 재학 중이던 마자줴는 같은 학교 학생 4명을 살해하고 기숙사 수납장에 숨긴 뒤 도주했다가 한달 후 하이난성 싼야(三亞)에서 체포됐다.
범죄 수법이 치밀하고 잔인해 사회에 충격을 줬다. 당시 사형 판결을 내린 다오 판사는 중국중앙방송(CCTV)의 한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명성을 얻었다.
그는 TV 출연 때 "법관은 법의 충실한 수호자이자 집행자다. 법을 위반하는 건 법관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번에 살인죄 기소 소식이 전해지자 그 발언 내용이 회자되는 중이다.
다오 판사의 재판을 맡게 된 윈난성 위시(玉溪)시 중급인민법원에 대중의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 또다시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지난 22일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천창(陳昌) 위시시 중급인민법원장을 중대한 기율 위반 혐의로 조사 중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천 법원장은 뇌물수수 등 대부분의 혐의를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후이성에서도 사고가 터졌다. 쑹즈강(宋志剛) 마안산시 중국인민법원장과 소속 판사인 궈페이훙(郭培鴻), 류젠예(劉建鄴) 마안산시 인민검찰원 부검찰장 등 고위직이 대거 연루된 비리 사건이 드러났다.
이들은 지난 1996년부터 20년 넘게 직권을 남용해 타인의 편의를 봐준 대가로 거액을 받아 챙긴 것으로 확인됐다. 류 부검찰장의 경우 수수액이 1136만 위안(약 19억3000만원)에 달한다.
끝없는 비리에 들끓는 민심을 의식한 듯 최고인민법원은 지난 22일 열린 전국법원재판감독업무회의에서 "그 누구도 법외 특권이나 관용을 누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만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걸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는데, 인민 대중이 얼마나 믿어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