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뷰] 가갸날과 말모이

2020-10-0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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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워요.
축일, 제일.
데이, 시이즌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끝없는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있고 빛나고 뚜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이즌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뿐
아기도 일러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쓰셔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어요.
그 속에 우리의 향기로운 목숨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속엔 낯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감겨 있어요.
굳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여요.
검이여 가갸날로 검의 가장 좋은 날을 삼아 주세요.
온 누리의 모든 사람으로 가갸날을 노래하게 하여 주세요.
가갸날, 오오 가갸날.

                   만해 한용운의 '가갸날에 대하여'


 

[만해 한용운]



한글날이 만들어진 때는 해방 이후가 아니라, 1926년 일제 치하에서였다. 민족지도자들과 한글학자들이 모여, 훈민정음 원본에 나오는 "정통(正統) 11월9일 상한(上澣, 상순이라는 뜻)"이라는 말을 참고하여 양력으로 환산해 10월9일로 정했다. 처음엔 가갸날이었다.

관음굴에서 도 닦던 한용운이 놀란 날

만해는 관음굴에서 면벽 수행하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무척 감격하여 끓어오르는 감회를 시로 남겼다. 특히 그 이름이 '가갸냘'이란 점이 시인이었던 그의 마음에 깊이 닿았을 것이다. 창의적이면서도 멋스럽다. 만해가 탄복했던 이 이름이 2년 뒤인 1928년에 왜 바뀌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겨레의 정체성과 고유한 문화를 지켜야 하던 때였던 만큼, '한글'이란 직관적인 이름을 먼저 돋워야 한다는 논의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시에서 말하는 검은, 우리 고유의 신앙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다. 만해는 가갸날을 '하느님의 가장 좋은 날을 삼아주세요'라고 기원하고 있다. 개천절도 중요하고 제헌절도 중요하지만, 겨레의 얼을 제대로 세운 한글날이야 말로 우리가 기리고 돋워야할 날이라는 인식일 것이다.

한글과 우리말에는 고통스러웠던 날들의 자취가 깃들어 있다. 1942년 식민지의 민족 압제가 극성을 달리던 시절,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를 나눴다. 이것을 당시 조선인 경찰관인 안정묵(일본 이름 야스다)에게 들켰다. 박영옥은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 취조에서 일본경찰은 여학생에게 감화를 준 사람이 정태진이란 사람임을 확인해낸다. 9월5일 정태진을 연행했고, 일제는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한글날인 9일 경찰이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를 통제 중이다. 세종대왕상이 쓸쓸하다.  [연합뉴스]



우리 말로 대화를 나눴다는 이유로

조선어학회는 그해 4월에 우리말 사전 집필과 편집을 완료해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를 시작하고 있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된지 13년만이었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16만개의 말을 모았다. 이 작업을 '말모이'라고 불렀다. "말을 모아야 나라를 지킨다," 그들이 외치고 또 외친 침묵 속의 절규는 그것이었다. 일제는 민족말살을 위해 조선어 교육을 단계 폐지하는 조치를 진행하고 있었다. 함흥 여학생 사건을 빌미로 삼아, 조선어학회를 공격한 것이다.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한 사람과 재정보조를 한 33명이 내란죄 혐의를 받았다.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 사망했다.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는 재판소의 결정문이 내려졌다. 이극로는 징역 6년, 최현배 4년, 이희승 2년6개월, 정인승과 정태진 2년, 김법린,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이인은 징역2년에 집유3년을 받았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은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는데, 해방 이틀전인 8월13일자로 기각됐다. 끝까지 일제는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고자 했던 학자들의 뜻을 봉쇄하고자 했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쓴 이들은 해방 이후 1947년 조선말큰사전을 간행했다. 16만 4,125개의 우리말 낱말이 수록됐다.

우리의 가장 좋은 날로 해주소서

왜 우리말엔 피냄새가 나는지 돌아보라. 한글날은, 겨레의 근본적인 정기를 압살하려 했던 일제로부터 죽기살기로 말과 글을 지켰던 사람들이 물려준 '목숨같은 언어'를 다시 새기는 날이다. 말과 글은 우리 영혼이었다. 우리의 가장 좋은 날로 해달라고 '검'에게 빌었던 만해의 그 기원이 하늘에 통했던 가갸날. 가갸거겨고교구규 그 기특한 말들의 잔칫날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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