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힘을 합하여 일본에 재앙을 내리니 도시 3곳이 불타고 일체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듣자 하니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은혜와 원수의 관계도 잊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에게서 살기 (殺氣)가 일어나고 천재지변의 원인을 한인 (韓人)에게 전가하여 방화를 하거나, 폭탄을 투척한 자도 한인이라고 하면서 군사를 일으키며 전쟁을 선포하고 큰 적을 만난 것처럼 민군(民軍)을 부추겨서 무기를 들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노인, 아이, 학자, 노동자 가리지 않고 한인이라면 모두 잡아 죽였습니다···.”
1948년 유엔 총회는 인종·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집단을 대량학살(Genocide)하는 행위를 범죄로 정하는 국제협약을 통과시켰다. 중국 난징대학살과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 제노사이드 범죄로 규정됐다. 하지만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역시 이 협약이 정한 명백한 제노사이드 범죄였다. 임시정부 공문은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규탄한 것이다. 의열단원 김지섭은 1924년 1월 5일 일본 도쿄 왕궁 입구 이중교에 폭탄을 던진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분노의 응징이었다.
그렇다면 일제 식민지배가 종결된 이후, 양국 정부는 이 학살사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이 사건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다. 언급 자체를 회피하고 있다. 우리정부 역시 무책임하기는 매한가지다. 임시정부의 항의공문을 제외하고, 한국정부가 일본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한 적도, 일본 정부에 공동조사를 제의한 적도 없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는 일본과의 식민지 배상 문제를 위해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상황을 조사했다. 이 조사 기록은 2013년 11월에 발견되었다. 희생자 290명의 명부가 있었다. 그러나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이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공식적인 진상조사 요구는 오히려 일본 쪽에서 제기되었다. 2003년 8월 25일 일본변호사연합회는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일본정부가 유발한 책임이 있다며, 고이즈미 당시 총리에게 사죄와 진상규명을 권고했다. 사건 발생 80년 만에 일본의 공공단체가 일본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2006년에는 한·일 양국 시민단체 대표들이 우리 정부 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요청했지만, 위원회는 조사 권한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부 차원 조사는 무산됐다. 전기는 19대 국회에서 마련되는 듯했다. 2014년 유기홍 의원이 대표발의하고 여야 의원 103명이 동참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 발의됐다. 국무총리 소속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를 설치해 사건을 조사하자는 것이 법안의 골자였다. 그러나 이 특별법안은 회기 내에 통과되지 못했고, 자동폐기됐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지난 9월 1일 일본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간토 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97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 실행위원회 미야카와 야스히코 실행위원장은 “학살로 존엄한 생명이 빼앗긴 역사적 사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두번 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도 아메리칸대학 피터 커즈닉 교수와 함께 보내온 메시지에서 “어느 나라든 과거와 마주하기는 어렵다”며 “여러분처럼 진실한 역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공고히 하고 이런 증오에 바탕을 둔 범죄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여러분과 함께 결의한다”고 밝혔다.
다가오는 2023년은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21대 국회는 ‘간토 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정부가 진상조사 작업에 나서게 해야 한다.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자료 보존과 공개를 일본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100년이 다 되도록 구천을 떠돌고 있는 조선인들의 넋을 생각한다. 억울함에 몸을 떨며 아우성치고 있을 그들이다. 역사 범죄에 공소 시효가 없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