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원의 천방지축] 어른거리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망령

2020-06-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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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의 천방지축] 얼마 전 한동안 출입이 제한되었다 재개방된 여주 세종대왕릉을 다녀왔다. 영릉(英陵·세종대왕릉)에서 영릉(寧陵·효종대왕릉)으로 이어지는 ‘왕의 숲길’을 걷고 있자니 당파싸움으로 골육상쟁(骨肉相爭)을 겪었던 조선왕조의 그늘진 역사가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정점을 찍었던 1, 2차 예송(禮訟)논쟁의 발단이 바로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의 사망이었다.

#1,2차 예송논쟁과 붕당정치

당파간의 정쟁이 극심하던 17세기에 벌어진 1, 2차 예송논쟁은 표면적으로는 상복(喪服)착용기간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가 상복(喪服)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논쟁이 붙었다. 당시 집권 여당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북인(北人)을 몰아낸 서인(西人), 야당은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南人)이었다.

친명중화주의에 기운 서인들은 조선이 제후국이니 명나라보다 간소하게 예법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남인들은 일반 가정에서도 3년복을 입는데 하물며 국가는 말할 것도 없다며 원칙고수로 맞섰다. 1년복으로 결정되면서 1차 예송(禮訟)논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15년 뒤,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아직 생존해있던 자의대비의 상복착용 기간이 다시 쟁점이 됐다. 서인은 9개월복, 남인은 1년복을 주장했다. 2차 예송논쟁에서는 현종이 1년복을 택함으로써 서인이 대거 실각하고 송시열이 유배를 당한다.

예송논쟁의 본질은 상복과 장례기간이 아니었다. 주자학과 예학(禮學)을 앞세워 신권정치(臣權政治)를 구현하려고 한 송시열 등의 서인과 왕권 강화를 통해 새로운 권력 기반을 다지려는 윤휴 등 남인세력 간의 정치투쟁이었다.

#성역화된 주자학, 사문난적(斯文亂賊)을 양산하다

고려말 도입돼 조선의 국시(國是)가 된 주자(朱子)의 성리학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한족의 정통왕조인 명나라가 멸망한 17세기에 이르자, 조선중화주의와 결합하여 무결점, 무오류, 신성불가침의 통치이념이자 정치철학으로 고착되었다. 특히 주자학(朱子學) 절대주의를 내세우는 서인(노론)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사상적 편향성이 심각한 상태였다. 유교 경전(經典)을 해석하는 데 그 누구도 주자(朱子, 1130~1200)의 견해에 이의를 달거나 손을 댈 수 없었다. 주자에 대한 도전은 곧 조선 유학 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주자학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스타일로 중용(中庸)해설서를 집필한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매장시켰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은 원래 유학(斯文)을 어지럽히는 적, 즉 주자의 해석에 어긋나는 학설을 펼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데 활용됐다. 자신의 정적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공격하고 처단하는 일이 횡행했다. 윤휴를 비롯하여 윤선도, 허목, 박세당, 윤증 등 송시열을 비난하거나 주자학을 비판한 이들은 모두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혀 퇴출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5·18민주화운동 특별법 개정안과 표현의 자유

최근 여당은 공청회를 열고 입법을 추진 중인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일부 개정안(5.18 부정처벌법)' 초안을 공개했다. 골자는 정부의 5·18 관련 발표·조사 등을 통해 명백한 사실로 확인된 부분에 대해 사실을 왜곡· 폄훼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할 경우 처벌을 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신문·잡지·방송과 출판물, 정보통신망의 이용이나 전시물·공연물의 전시·게시 또는 상영, 토론회·간담회·기자회견·집회·가두연설 등에서의 발언을 통해 5·18을 부인·비방·왜곡·날조하는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더불어민주당 등 여권이 21대 국회 전체 의석의 3분의 2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법은 별 문제없이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5·18 부정처벌법’은 앞서 20대 국회에서도 발의됐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당시 민주당은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 야당 3당과 함께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반론이 만만찮아 회기 내에 법 개정을 하지 못했다.

이 정부의 핵심 세력들이 과거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면서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강조한 것을 기억한다. “반(反)국가단체나 그 구성원들의 활동을 찬양·고무·선동한 자를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것이 철폐요구의 핵심이었다.

#‘5·18부정 처벌법’과 ‘홀로코스트 부정 처벌법’의 차이

여당은 ‘5·18부정처벌법’을 제정하는 데 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 등 일부 유럽 국가가 시행중인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과 같은 반인륜 범죄를 부인하거나 축소·옹호하면 처벌하는 ‘홀로코스트 부정 처벌법’을 참고했다고 한다. 1985년 형법 제130조 3항 규정(국가사회주의(나치) 지배하에서 저질러진 집단학살을 찬양 부인 경시한 자는 5년이하의 징역형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을 통해 ‘홀로코스트 부인’을 금지하는 독일이 대표적이다. 이들 국가가 홀로코스트를 부인하거나 나치 범죄를 옹호하는 행위에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이유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범죄를 부인하는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임할 경우 희생자와 가족들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소수자를 상대로 한 범죄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런데 ‘홀로코스트 부정 처벌법’을 들여다보면 처벌 대상을 홀로코스트를 찬양하거나 기본 사실을 부인하고 축소하는 경우로 한정하고 있다. 1996년 제정된 유럽연합의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행위 방지협약’의 경우도 대량학살, 잔혹 범죄, 전쟁범죄를 부인하거나 심각하게 축소하는 행위에 한해 최대 3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독일의 역사 관련법은 홀로코스트 부정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패전 후 독일인들이 소련 등지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는 걸 부인해도 처벌하게 돼 있다. 이에 비해 ‘5.18 특별법개정안’은 사실에 대한 왜곡도 처벌대상으로 삼고 있다.

국가가 정의를 내린 역사적 사실을 개인이 부인하거나 왜곡할 경우 형사처벌하는 선례는 표현의 자유, 나아가 민주주의의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할 수 있다. 일찍이 E.H.카는 “역사란 역사가(현재)와 그의 사실들(과거)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우리가 정의내린 역사적 사실만이 진리이고 다른 편의 주장은 ‘사문난적’으로 몰아 단죄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과거를 박제화하여 정치적 탄압의 도구로 사용했던 동서양 독재정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건국대 초빙교수>
 

5·18민주화운동 간행물 (광주=연합뉴스) 조남수 기자 = 27일 오전 광주 북구 용봉동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 5·18민주화운동 관련 간행물이 전시되어 있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은 기존의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전시실 개편과 근대 역사 전시공간을 새롭게 조성하고 시민 의견을 수렴해 명칭을 바꿔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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