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한여름 뜨거운 햇살이 쏟아졌다. 허명욱 작가의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에는 사계절이 담겼다. 자연은 변하지만 허 작가는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서 작업에만 몰두했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듯 그의 작품에는 세월이 한 겹씩 한 겹씩 차곡차곡 쌓였다.
허명욱 작가는 오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 1·2관에서 개인전 ‘칠(漆) 하다’(Overlaying)를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공개되지 않은 대작들과 새로운 신작 등 평면 작품 25점과 조각 작품 2점을 만날 수 있다.
매일 아침 허 작가는 색을 만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말 그대로 ‘그날의 색’이다. 그날의 감정을 담아 직접 색을 배합해 자신만의 색을 만든 후 이를 작품에 사용한다.
세월이 담겨 있는 작품을 위해 그는 시간을 철저히 기록했다. 허 작가는 색을 칠한 나무스틱 뒤에 만든 날짜를 꼼꼼히 적어 놨다. ‘그날의 색’이 담긴 스틱 하나를 만드는 데 보통 8일이 소요된다.
나무스틱 수백 개로 만든 작품 앞에 선 허 작가는 “2017년부터 작업했으니, 3년 넘게 걸렸다”며 “현재 작업 중인 다른 작품에는 나무스틱이 600개가 들어간다. 13년이 넘게 걸릴 것이다”고 소개했다.
‘시간의 축적’은 허 작가가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보통 완성까지 1년 이상 걸리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고행처럼 힘든 작업이다. 한번은 함께 일하는 스태프에게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작업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힘들어야 우리만 할 수 있지”라고 답했다.
2008년 만난 옻은 허 작가를 대표하는 재료다. 자신이 원하는 감각적인 색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던 허 작가에게 옻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옻은 쉽게 곁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려움증이 심했고, 양쪽 팔 모두 퉁퉁 부었다. 허 작가는 “지금도 나도 모르게 팔을 긁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그래도 지금은 적응이 된 편이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옻칠 작업을 하려면 30도 이상의 온도와 70% 이상의 습도를 유지해줘야 했다. 작업을 위해서는 한여름 장마철 같은 날씨를 1년 내내 견뎌야 했다.
힘들지만 옻칠이 갖고 있는 매력은 분명했다. 허 작가는 옻칠 작업의 매력으로 시간에 따라 변하는 색을 꼽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단점으로 느껴졌던 것이 그에게는 장점으로 보였다. 작품에 시간의 변화를 함께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 작가의 작업은 끊임없는 반복의 결과를 통해 완성된다. 옻이나 흙을 칠한 후 말리고, 캔버스 천을 붙이기와 뜯어내기를 반복한다. 손의 감각으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장갑도 사용하지 않는다. 반복된 작업으로 인해 그의 손톱은 365일 까맣다.
허 작가가 힘든 길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이 중요시하는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작품에 담기 위해서다.
그는 “나의 작업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면이 더 중요한 작업이다”며 “처음에는 작품을 보고 막연하다고 생각했던 분들도 작업실을 방문하신 후에는 다르게 보시더라”고 귀띔했다.
마지막으로 허 작가는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다”며 “올해에 프랑스 파리와 홍콩에서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됐다”며 “국내보다는 해외 분들이 나의 작업을 놀라워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