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문일평(1888~1939)은 망우역사공원에 묻혀 있다. '한국학'의 대가로 불렸던 조선일보 기자 이규태(1933~2006)는 문일평을 학문적 선배로 존경했다. 묘지 비석에는 이규태의 글이 새겨져 있다.
"불우한 세대를 짧게 살면서 큰뜻을 세웠기로 그 그늘을 오늘에 드리우고 여기 고히 잠들고 계시다. 얼굴에 비해 눈이 큰 편이었으며 항상 한복에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담배는 안 하시고 술만 드시면 일제의 압제에 분통을 터뜨려 화를 못 가누곤 하였다. 이웃에 어려운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벽시계를 떼어 전당 잡혀주고 쌀자루를 갖고 오라 시켜 뒤주 바닥을 긁어 퍼주었으며, 어렵게 사온 장작을 날라다주고 냉돌에서 자기 일쑤였다. 일제의 불의에 대항할 때는 호암(虎巖)으로 노호하였고, 민족을 연명시키는 국학의 밭을 가꿀 때는 호암(湖岩)으로 자적하셨다. 벽초 홍명희는 자기 연배에서 조선사를 논하고 쓸 만한 사람이 꼭 두 사람 있는데 천분이 탁월한 신채호와 연구가 독실한 문일평이라 했다. 평생 계몽해온 것이 '조선심'이요, 이를 지탱하고자 골몰해온 것이 '조선학'이다."
문일평은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 역사의 과학화를 주장하면서도 정신적 요소인 '조선심(朝鮮心)'을 강조했다. "중국사상 그것도 아니요, 인도사상 그것도 아니요, 조선사상은 어디까지 조선사상이다. 비록 예로부터 조선이 중국, 인도 사상의 감화를 많이 받았으나 특수한 환경에서 특수한 생활을 하게 된 조선인은 구원한 역사를 통하여 일종 특수한 조선심을 형성함에 이른 것으로서, 그것이 세종에 의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종은 조선심의 대표자라고 부르고 싶다." 또 그는 영조와 정조시대의 실학과 실사구시 정신을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비석에는 방우영(조선일보 명예회장)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문일평 외손녀의 사위가 그이기 때문이다.
17세 때인 1905년 의주 용암포에서 증기선을 타고 미국 유학을 떠났으나, 여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인천에서 내리고 말았다. 그는 부산을 거쳐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아오야마학원 중학부에 임시입학했고 이후 미사노리 학교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홍명희와 이광수를 만났다. 1907년 9월 메이지학원 중학부에 편입해 공부했다. 이듬해 9월 한국에 돌아온 그는 안창호의 평양 대성학교, 의주 양실학교, 서울 경신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한다. 그는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와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했다. 상동청년회에서 최남선은 역사를 가르쳤고, 문일평은 지리를 가르쳤다.
1911년 그는 다시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 들어가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와 교유했다. 그는 어느날 사들고 온 신문지로 된 땅콩봉지를 펼치다가 '동양의 넬슨, 이순신'이라는 책 광고를 봤다. 넬슨은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순신에 대해선 잘 몰랐다. 일본에 가서야 조선역사를 알게 된 것이다. 일본인이 쓴 '조선 이순신전'(1892년 출간)을 번역하면서 그는 역사가의 길로 접어든다. 동갑내기였던 홍명희가 어느 날 찾아와, 고무신 공장을 시작한 사람이 있는데 상표가 뭐가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그 민족자본가가 참으로 장하구료. '거북선' 어떻소? 이순신의 철갑선!" 이후 '거북선'은 유명브랜드가 되어 유사상표가 나돌 정도가 됐다.
3·1절 이후 조선독립 요구하다 투옥
와세다대학에서 서양사 강의를 들으며 그는 한민족이 외적과의 전쟁에서 이긴 사실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고구려의 살수대첩과 안시성대첩, 고려 강감찬의 귀주대첩, 윤관의 여진정벌 같은 것을 읽고 통쾌하게 여겼다. 1912년 말 일본인 학생과의 갈등에 분개하여 대학을 자퇴하고 독립운동을 하러 상하이로 떠난다. 상하이와 난징에서 조소앙, 홍명희, 정인보와 함께 기숙하면서 중국신문사(대공화보)에서 일했고 신규식의 독립운동단체(동제사)에서도 활동했다. 동제사는 단군의 대종교를 기본으로 국혼을 중시하는 민족단체였다. 독립운동으로 가산을 다 쓴 뒤 1914년 귀국해 은거하며 독서에 몰두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3월 23일 문일평은 '독립요구서'를 작성해 조선총독부에 전달한다.
"오늘 세계 대세는 이미 무단적 실력은 가고 정의 인도가 온 것이 아닌가. 이미 압박적 역리(逆理)가 가고 평화적 정도(正道)가 흥한 것이 아닌가. 동양평화가 조선독립으로 더욱 확고할 것이 아닌가." 이후 보신각에서 300명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이 글을 낭독하고 시위를 이끌다 문일평은 체포된다.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을 한다. 1995년 그는 한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류영모와 문일평의 담담한 교유
문일평의 삶 속에는 류영모가 등장한다. 육당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금방 알아보았다. 문일평은 두살 아래인 류영모가 불교, 노장, 기독교에 통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도우(道友)로 여겼다. 문일평은 6㎞ 길을 걸어서 자하문 고개 넘어 비봉 밑에 사는 류영모를 자주 찾았다. 때로는 국문학자 이병기나 조선일보 설의식과 함께 오기도 했다. 당시 문일평은 이런 시를 썼다.
紫霞門 訪牢谷山莊(자하문 방뇌곡산장, 자하문 뇌곡산장을 방문함)
家住靑山裡 水雲共一鄕
가주청산리 수운공일향
林花秋更艶 石磵水猶凉
임화추경염 석간수유량
採藥穿幽俓 種松護別堂
채약천유경 종송호별당
邸廚珍味足 盤上乳茄香
저주진미족 반상유가향
* 뇌곡산장은 '골짜기로 둘러싸인 산속의 집'이란 뜻이다.
집은 푸른 산 속에 있다네
물과 구름이 함께 솟아나는 곳
숲속의 꽃은 가을에 더 곱고
바위개울 물은 더욱 시원하네
약초 캐느라 어둑한 길이 뚫려있네
큰 소나무는 별당을 지키며 섰고
부엌에는 맛있는 것이 충분하니
상 위에 우유와 토마토 향기가 나네
문일평은 이 시에 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졸구(拙句)는 일전에 북한산 기슭에 사는 류 처사를 방문했을 때 읊은 것인데 한 번에 다 지은 것이 아니다. 처음엔 즉경(卽景)으로 임화추경염(林花秋更艶) 석간수유량(石磵水猶凉) 1연을 구성하고, 그 나머지는 그 다음 날에 다 이룬 것이다. 끝 구절은 류 처사의 실생활의 일단을 그린 것이니, 그는 손수 우유를 짜서 손수 재배한 토마토(蕃茄)에 화하여 저녁밥상에 놓았으므로 여기 유가(乳茄)라 함은 이 우유와 번가(蕃茄)와 화락(和樂)을 약칭한 것이다."(문일평의 '호암전집' 중에서)
좋은 의식(衣食) 않은 것 우리집 자랑이요
명리(名利)를 웃 보는 게 내 버릇인데
아직껏 바람 물 주려 씀이 죄 받는 듯하여라
--- 류영모의 시조
"이 시조는 류 처사가 일찍 자기의 뜻을 읊은 것이니 그는 오산고보(五山高普) 교장으로서 교육에 종사한 적도 있었고 그 뒤엔 상업을 경영한 일도 있었지만, 오늘날은 이 시조에 표시한 것과 같이 바람과 물을 찾아서 북한산 밑에 들어가 경전을 읽는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문일평의 '호암전집' 중에서)
1939년 4월 3일 문일평은 급성단독(丹毒)으로 눈을 감았다. 월북한 그의 큰딸 문채원의 아들은 호암이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민족21'). 일본경찰이 가택 수색을 할 때 면도날에 독약을 발라놓았으며 이튿날 면도를 하다가 살짝 베인 곳이 크게 붉어지더니 사망했다는 것이다. 일제가 독립지사를 제거하기 위해 쓰던 수법이었다고 한다. 의혹은 가지만 정확한 증거는 없다. 그가 병약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죽음이 급작스럽고 의아했던 정황은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류영모 또한 돌연한 지음(知音, 뜻을 알아주는 벗)의 타계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추모의 글을 남겼다.
문일평의 죽음에 부친, 류영모 추모글
"호암 문일평 형이 먼저 가는데 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의 결별의 인사하는 것을 굽어 들으시는 듯하다. 1939년 4월 4일 서울 내자동 호암댁을 찾다가 대문 기둥에 조등(弔燈)이 걸렸다. 물은즉 어제 아침에 주인 별세란다. 연전(年前)에 중병 뒤에 느낌을 말씀하기를 멀리 불교문화, 가까이 기독교문화를 많이 입은 조선에서 두 종교의 깊은 조예가 없이 국사(國史)를 학구(學究)함은 망(妄)이었다고 하였다. 이제 종교를 좀 더 알아 가지고 사학(史學)을 말하겠다고 하시고, 날더러 '형은 전도에라도 충실하고 우리가 헛사는 것이 큰일났다' 하시던 씨는 드디어 가시도다. 호암 씨는 52세(1만8545일)로 가시니, 나보다 627일 먼저 나시었다. 올해로 나에게 지명(知命)의 나이(50살)를 주신 하느님께서 앞뒤에 구름기둥(雲柱)·불기둥(火柱)을 세우시니 이 어찌하신 처분일까. 헛사는 어리석음을 알아보게 하시는 채찍이신가. 근년(近年) 내에 앓는 것을 모르고 오던 몸이 1월 9일경에는 투병(鬪病)을 하였다기보다 투인생(鬪人生)의 기회를 가졌다. 건강이 일생의 태양인 것을 건행(乾行)·건적(乾的)인 건강을 보았다. 영생을 힘써 빼앗으려는 건강이다. 일찍이 투병을 인과(因果)로 입맛을 위하는 식사에서는 떠나게 하신 은혜가 있었는데, 만년(晩年)에 또한 은혜를 더 하심인가. 이 결별의 인사를 할 수 있는 준비시었나. 이 인사로 새로 베푸시는 은혜를 굳게 함인가."
불교와 기독교를 연구하지 않고 나라의 역사를 알겠다고 한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류영모에게 말한 대목이 눈에 띈다. 문일평은 류영모를 만남으로써 역사 인식을 종교사상의 영역까지 확장하는 안목을 갖게 된 셈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민족의 인식을 이해하는 것은 이 국가의 '내면의 힘과 규칙성'을 발견하는 것과도 통한다. 류영모의 '씨알론'은 역사를 움직이는 인간의 사상이 어떻게 역동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지 않은가. 류영모는 그를 갑자기 여읜 뒤 창졸간에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서는 영별에 대한 감회가 깊어졌던지, 성서조선에 '이승'이란 시를 남긴다.
이승의 목숨이란 튀겨논 줄(絃)
쟁쟁히 울리우나 멀잖아 끊질 것
이승의 목숨이란 피어난 꽃
연연히 곱다가도 갑작이 시들 것
이승의 목숨이란 방울진 물
분명히 여무지나 덧없이 꺼질 것
--- 류영모의 '이승' /성서조선 1939년 5월호
생선토막 인생 담은, 추도시 '一生鮮'
그는 또, 문일평에 대한 인상적인 추도시 '일생선'을 썼다.
<스스로 느낌, 일생선(一生鮮)>
* 일생선은 '한 마리 생선'이란 의미와 '한 생애가 빛나다'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거기에 하루하루 시간이 생선토막처럼 쌓여 생을 이루며 마침내 죽음을 이룬다는 '류영모다운 철학적 사유'에 닿는다.
한 마리면 몇 토막에 한 토막은 몇 점인가
하루하루 저며내니 어느덧 끝점 하루
하루는 죽는 날인데 만(萬)날 수(壽)만 여기네
맛 없이도 머리 토막 죅여내여 없이 했고
세간살이 한답시고 가운데 토막 녹았으니
님께는 무얼 바치나 꼬리를 잡고 뉘웃네
국거리는 못되어도 찌개라도 하시려니
찌개감도 채 못되면 고명에는 씨울거니
성키만 하올 것이면 님께 돌려보고져
오십 구비를 돌아드니 큰 토막은 다 썼고나
인간의 도마 위에선 쓸데없는 찌거기나
님께서 벌러주시면 배부르게 5천 사람
김교신은 류영모의 추모문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근래에 읽는 문자 중에 본호에 실린 '호암 문일평 형이 먼저 가시는데'라는 문자처럼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없다. 류영모 선생의 앞뒤에 섰는 운주(雲柱)·화주(火柱)를 평생토록 인식 못 하는 사람은 차라리 행복한(그 행복은 돼지의 행복과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자라 할 것이며, 앞뒤의 운화주를 보고서도 꼼짝없는 자는 화(禍)를 면치 못할진저." 더욱이 문일평의 추모문에 딸려 실린 류영모의 연시조 '일생선(一生鮮)'은 <성서조선> 독자들이 거의 모두가 외울 만큼 회자되었다.
함석헌은 1981년 함석헌 자신의 팔순 기념 모임에서 답례인사를 할 때 류영모의 '일생선' 얘기로 화제를 이끌었다. 그만큼 충격을 준 시였다는 뜻이리라. 류달영도 류영모 추모문에서 이 얘기를 꺼냈다. "그 글(문일평 추도문)은 참으로 감회 깊은 글이었다. 그 글 끝에 ‘한 마리 생선(一生鮮)'이란 연시조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 내가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두 번째 연이다. 진실된 사람의 생애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절실한 비유의 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