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만 3953명이나 되는 신천지의 어떤 교도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자신의 삶을 발칵 뒤집어 놓을지 말이다. 안으로는 역병의 공포에 떨어야 하고 밖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거친 손가락질을 피해야 할 판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 땅에 이 무서운 전염병을 옮겨온 바 되었으니 자책도 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 괴로운 건, 전염병 확산자로서의 궁지와 이 종교행위 자체에 대한 비판이 뒤섞이면서 희대의 범죄자로 낙인 찍히는 일이 아닐까. 떳떳하다면 왜 자신의 종교를 밝히지 못하느냐고 닦달하는 이들에게, 스스로의 입장을 소명할 적절한 기회를 얻기도 어렵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고, 공개를 하는 순간 사회적 파탄에 이르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당신 같으면 이미 '코로나 사탄'쯤으로 내몰릴 신도증을 쉽게 까발릴 수 있겠느냐고. 유대교가 정통이던 시절에 기독교 또한 숨어서 '신앙'하지 않았느냐고.
전염병 시절에 불쑥 단골 실검1위로 떠오른 '신천지'는, 이 시대 이 땅의 종교의 알리바이를 묻는 뜻밖의 심문(審問)에 가깝다. 이 종교단체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거침없이 경멸하는 언행은, 그것이 지닌 사회적 함의나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소독하고 격리하고자 하는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 또한 의미있는 현상이다.
이런 혐의들이 이 사회의 규범과 상궤를 벗어나 문제가 될 정도인지를 따져서, 공권력이 어떤 방식으로든 나서서 위험에 노출된 국민의 안전과 정당한 권리를 위해 조치를 취하는 게 맞다. 다만, 혐의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확인 없이 공공연한 침뱉기를 하는 건 이 사회가 지녀야할 이성과 품격에 걸맞지 않다. 그 밖에 내가 이 단체에 대해 가진 견해는 별로 없다.
어떻게 멀쩡한 신도를 빼내는가
얼마전 점심을 먹으면서 한 동료로부터 신천지교회에서 신도를 늘리는 '추수(秋收)' 방법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TV에서 봤다고 한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특히 청년들과 여성들이 일견 명백해보이는 신앙사기 같은 행각에 쉽게 동요하고 빨려드는가. 부주의하고 어리석어서 그렇다고만 말하기에는 늘어난 너무 신도가 많고 그들의 생각이 멀쩡하고 확고해보이지 않은가. (물론 이탈한 신도들의 부정적인 폭로 증언이 있지만 말이다.) 그들은 어떻게 기존 교회의 신도들에게 접근을 해 '추수'를 하는가. 방송매체에서 공개한 내용은 이렇다.
이를테면, 추수 대상 타겟의 신상정보를 충분히 파악한다. 현재의 심리상황도 체크한다. 꽤 공들인 사전작업을 한 다음 2인1조로 접근한다. 우선 그 사람의 취향을 저격한다.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면서 마음을 터놓는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3자 관계로 자연스러움과 신뢰를 돋우는 전략도 쓴다. 그 중에서 한 사람은, 그 사람과 같은 심경의 역할을 맡고 다른 한 사람은 영적으로 개발된 '시니어'의 역할을 맡는다. 같은 관심을 공유함으로써 서로의 대한 결합을 확보하고 관계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는 것. 이것이 계략이라는 점만 뺀다면, 인간이 결속을 다지는 훌륭한 풍경이 될 것이다.
왜 똑똑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수상한 접근에 거부감을 지니지 않는지 궁금해진다. 그들은 왜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던 신앙을 내던지고 그들에게로 투항하는가. 음험한 사냥꾼과 가엾은 사냥감 사이의 게임일 뿐인가. 마음을 터놓는 상태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본격 작업인 '성서 읽기'로 나아간다고 한다. 성서를 새롭게 읽으면서 그들이 이미 알고있다고 생각했던 내용들을 재해석해 보여주면서 그들의 기존 신앙을 전복하는 것이다. 이 '설득'에 넘어가는 까닭은, 기독교가 그간 상식이나 이성의 소구 없이 주입했던 신앙의 허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추수' 작업의 마지막 일격 같은 이 작업이 무섭다. 우리의 종교나 사회 전체가 공동체 삶 속에서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건드리는 세일즈에 일종의 충동적 '지름신'같은 것이 작동하는 셈이다.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는 무엇은 무엇인가. 고독과 불안 같은 감정들, 위로와 공감 같은 니즈들, 자신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존재에 대한 욕망들, 세상에게서 받은 치명적인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들. 가슴 속에 숨기며 살아야 하는 억압과 분노들이 도를 넘은 상태로 살아가는 일상들에 대한 구급. 이런 것들이 많은 우리들에게 필요하지 않던가. 교회가 종교의 본질보다 형식에 치우치고, 처음에 시작한 아름다운 뜻을 놓치고 권위적이고 세속적인 욕망들을 끌어모으고 있을 때, 문득 그 의미없어진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국가나 공동체 또한 그 소속원들의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무관심하고 오로지 권력이나 소유 자체의 가치에 몰두할 때, 살벌하고 외롭고 어지러운 나날에 내몰리는 듯한 시민들 또한, 까닭도 모를 우울과 분노를 어떻게든 좋이 풀고 싶지 않겠는가.
추수는 '신의 저녁콜'을 새치기 하는 일
추수꾼 혹은 추수라는 말은 섬뜩하다. 추수는 가꾼 곡식을 거둬들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이들이 부자들의 밭고랑에서 저녁답에 주워가는 이삭줍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부자종교들이 흘리고간 이삭을 주우러 다니는 것이다. 이삭을 주워서 똑같은 부자행세를 하겠다는 희망을 품는 신흥종교라면, 그것은 비극의 악순환이며 끝없는 확장일 수 밖에 없다.
여러 가지 프리즘으로 저 상황을 볼 수 있겠지만, 신천지의 추수 작업이 가능한 까닭은 교회가 그 신도의 본질적인 희원(希願)을 채워주지 못하고 삶의 핵심 문제들을 건드려주지 못하는 종교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나 공동체 또한 그렇다. 종교의 본질과 국가의 본질에서 심각하게 이탈하는 그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깊은 방황을 그 '추수'들이 증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가치와 믿음의 가치의 치명적인 누수가 있기에 그걸 챙기려는 추수가 있는 것이다. 이 깊은 책임에 대해, 논의해보는 '신천지 비판론자'는 어디에 있는가.
아이라 스탠필(1914~1993) 목사는, 아내를 잃고 두번째 아내가 저녁답에 마을 골목에서 놀고 있는 아이에게 "얘야, 저녁 먹을 시간이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복음성가 '서퍼타임(SUPPER TIME)'을 썼다. 두번째 아내의 그 목소리는 첫번째 아내와의 단란했던 시절에 들었던 정겨운 목소리와 겹쳐 들렸기에 그를 눈물짓게 했다.
어머니가 저녁답에 아이의 허기를 채워주려고 음식을 해놓고 다정하게 부르는 '콜'이야 말로, 인간에게 주는 '신의 복음'의 핵심이라고 스탠필 목사는 생각했다. 복음성가의 뒷부분은, 인간 삶의 저녁답에 하느님이 가만히 인간을 호명하는 소리로 대체된다. 그것은 신과 인간이 왜 '아버지'란 혈육의 관계어로 연결되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기도 하다.
신천지의 추수는, 저 '저녁 콜'이 없는 틈을 타서 누군가가 그 역할을 새치기 하는 유혹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신앙의 근본은 따뜻하다. 예수는 오직 이타의 사랑을 말했을 뿐이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가치를 믿으라고 했을 뿐이다. 그 삶의 가치야 말로, 죽음을 극복하는 열쇠라고 생각해본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에 감돌고 있는 인간의 깊은 고독과 메마른 관계들을 불심검문하고 있기도 하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