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7)구원받겠다고 믿는 건 참종교 아니다

2020-03-09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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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에 믿음의 역사를 이뤘다

영화 '예수 그리스도(The King of Kings, 1927년작)'의 한 장면.



서른 즈음에 믿음의 대역사가 이뤄졌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는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about thirty) 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성서기록을 바탕으로 따져보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때가 32세쯤 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인류가 경험한 영적인 신념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강력한 믿음을 수립한 이가 30대 초반이었으며, 그분이 이룩해놓은 역사(役事)가 인류의 신앙을 2000년 동안 이끌어온 큰길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늘의 성자를 내는 데 인간의 '나이'가 깨달음을 가늠할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30대 초반은 신체의 성장이 거의 멈추고 영적인 성장이 이뤄지는 '청년기'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비로소 어떤 일에도 움직이지 않는 신념이 서게 되었다는 바로 그 나이다.

류영모가 38세 조만식에 이어 31세의 나이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한 일은 한 인물의 이력 중 하나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 의미를 넘어선 영성 개안(開眼)의 모멘텀으로 읽을 수 있다. 오산학교는 창립 기념행사로 운동회를 했는데, 갑자기 상부에서 '운동가'(이광수가 지은 노래였다)가 불온하다며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교장 류영모는 급하게 '운동가'를 지었다. 이 노래에 대한 기억은 학생이었던 함석헌이 살려낸 것이다. 함석헌은 노랫말을 생생하게 외고 있었다.
 

[다석 류영모]



오산학교 운동가를 지은 류영모

저 하늘에 해와 달도 돌아다니며 이 땅 위에 물과 바람 또한 뛰노니
천지 사이 목숨불을 타고난 우리 얼센 힘에 번뜩이며 빛을 내이자

(물이나 불이 모두 다 우리의 놀거리 뛸 터라
다물은 입 한 번 열면 우뢰 울리고 내렸던 손 들게 되면 번개 치리라
힘을 모읍고 맘 다스려 이김 얻도록)

뫼(산)란 데는 범만 뛰게 둘 것 아니오 바다란 덴 고래만 놀릴 것이랴
물과 뭍에 우리 운동 자주자재해 얼센 힘을 번뜩이어 빛을 내이자

저 공중이 어찌하여 독수리 꺼며 이 물 밑이 아무려믄 해조의 터랴
공중 날고 물밑 기기 또한 능하니 얼센 힘을 번뜩이어 빛을 내이자

                                     류영모의 '오산학교 운동가'

31세의 청년이 작사한 노랫말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랍다. 소요유(逍遙遊)를 말하던 장자가 떠오른다. 신체를 단련하는 체육의 노래를, 우주와 만물을 동원해 인간 본유의 생명활동으로 풀어내고 있는 사람. 함석헌은 당시 이 노래를 접한 학생들이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는 철학적인 운동가"라며 감탄했다고 증언한다.

우주를 넘나드는 '영혼의 운동가'였다

인간의 신체운동이 해와 달이나 물과 바람의 운동과 같은 것이며, 목숨의 불꽃과 정신이 빚어내는 힘과 빛의 운동이라는 인식은 심오하고 광대하다. 물과 불, 우레와 번개가 놀듯 운동의 놀이 또한 대자연이 노는 것과 같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힘을 모으고 마음을 다스려 극기하는 것이라고 밝혀놓은 대목은 가히 인간 운동의 철학을 밝혀놓은 명언이라 할 수 있다.

2절과 3절에서 뫼와 바다, 공중과 물밑을 오가며 모든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호명하면서, 사람은 이 모두를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정신'이 강력한 존재임을 돋운다. 이 운동가에서 우리가 얼핏 맛볼 수 있는 것은 청년 류영모의 어마어마한 정신적 지향과 사고의 지평일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저 광대무변의 우주론 속에서 '존재운동'을 시작하고 있었을까. 우주 속에서 오직 단독자로 나아가고 있었던 류영모는 이미 '성자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오산학교 기숙사에는 교장(조만식)과 장로(조형균)의 방이 따로 있었다. 두 사람은 학교 사감(舍監)을 겸하였다. 조만식 교장의 방에는 후임자인 류영모가 들어왔다. 조만식과 류영모는 일본 유학 시절 이웃에 하숙을 하여 자주 오가며 만났던 사이다. 재일본 한국YMCA에서 함께 예배도 봤다. 오산학교에 와서 잠깐 같이 방을 쓰기도 했다. 조만식 교장이 오산학교에 나라사랑을 심었다면, 류영모 교장은 진리사랑을 심었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이 나라와 삶의 근본에 대한 애정은 깊었지만, 굳이 두 사람을 비교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일본 교과서를 덮고 강의한 류영모의 '수신(修身)'교육

류영모는 걸을 때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인 채 걸었다. 겸양이 몸에 밴 동작이었다. 학생들과 마주치면 반드시 이름을 부르고 여러 가지를 묻기도 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남에게 시키는 법이 없었다. 학생들에게 함부로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방 청소는 스스로 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도 직접 다 했다. 그는 남에게 일 시키기 좋아하는 '양반놀음'을 비판했다. 제 몸은 제 손으로 거둬야 한다고 말했다.

방에 앉을 때는 방석 대신 딱딱한 널빤지를 깔고 앉았다. 교장실의 회전의자를 치운 뒤 일반의자를 가져와 의자등받이를 잘라버리고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업무를 보았다. 당시 식사는 하루 두 끼니를 먹었다. 아직 일일일식(一日一食)을 시작하지 않을 때였다. 과식은 결코 하지 않았고 술과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다. 날마다 냉수마찰을 했는데, 아무리 추워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는 감기에 걸린 적이 전혀 없었다. 같이 교단에 섰던 이광수는 류영모를 가리켜 '시계보다 더 정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람과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기 때문이다.

류영모 교장은 '수신(修身, 윤리도덕)'을 가르쳤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수신 과목을 맡았을 때, 일본인들의 교과서를 쓰고 싶지 않았어요. 일단 그들의 수신 책을 덮어놓고 생각나는 대로 강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성경부터 시작해 톨스토이 얘기까지 두루 소개했죠. 우치무라 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노자 도덕경 얘기만 한 것도 아니에요. 정해놓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함석헌은 수신시간에 배운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한번도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가장 많이 말씀하신 것이 노자 도덕경이고 홍자성의 채근담에서 뽑아서 가르친 때도 있었지요. 우치무라 선생의 책으로 강의한 적도 있고, '애음(愛吟, 즐겨 읽는 시)이라는 책을 가져오셔서 칼라일의 '오늘'이란 시를 읽어주기도 했습니다. 그 시를 가르쳐주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그가 말한 칼라일의 '오늘'은 "자, 오늘도 또 한번 푸른 날이 밝았다/생각하라 어찌 이 날을 쓸데없이 보내랴/이날은 영원에서 탄생되어/밤이면 영원으로 돌아가리라"로 시작되는 시였다. 

'수신'만 제대로 해도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의 강의는 윤리도덕에 관한 단순한 소개를 넘어서 스스로가 깨달은 삶의 가치와 기준들을 학생들과 함께 논의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잡아주는 '생각의 훈련' 현장이었다. 유학의 경전인 <대학>에 등장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수신해야 제가하고 제가해야 치국하고 치국해야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는 단계적인 의미의 수행을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의 핵심은 오로지 수신(修身)이다. '수신'을 하면 모든 것이 다 이뤄진다는 얘기다.

누구든 스스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닦을 수 있는 '수신'을 이루면, 그것을 가족들이 본받아서 집안이 잘 돌아가고, 그 가족을 지켜본 사람들이 저마다 그 행실을 따라서 하기에 나라가 평안해지고, 그 나라를 거울 삼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수신을 하기 때문에 동시에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수신(도덕과 윤리의 삶 실천)'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묘안이다. 이 모든 위대한 '세상경영'이 오로지 자기 한몸의 경영에서 나온다는 진리가 바로 '수신'의 철학이다. 류영모는 스스로가 맡은 강의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학생 하나하나가 모범이 되어 이 겨레 전부의 수신으로 이어지도록 씨알을 심는 일이었다. 그 씨알의 핵심은 영성(靈性)이었다. '얼센 힘에 번뜩이며 빛을 내이자'는 오산학교 운동가는 영성을 키우는 그의 뜻을 담고 있었다.

 

[영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3)의 한 장면.]



다석어록 = 예수 믿는다는 건 십자가 믿는다는 게 아니다

"예수는 바람을 영원한 생명의 운동으로 비유하고 있다. 성령의 바람은 범신(汎神)이다. 범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운동이다. 사람은 사는 동안에 지나친 욕심을 지니고 산다. 신선이 되어 영생불사하기를 바라는가 하면, 예수 믿으면 예수가 내려와서 죽지 않도록 살려서 하늘로 구름 타고 올라가기를 바라고 있다. 몸으로 살 욕심 때문에 이런 것을 믿는다. 예수의 영생의 정의는 이렇다. 오직 하나이신 하느님을 아는 것과 그가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이다(요한복음 17:3). 이를 기도할 때는 언제나 외워야 한다. 절대 유일(唯一)을 알고 거기에 붙잡히는 것이 영생이다. 여기에 삶의 참맛이 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믿는다는 말이 아니다. 영생한다고 하는 것은 피와 살과 뼈가 사는 게 아니고 성령인 말씀이 사는 것이다."

다석의 제자 박영호는 이렇게 부연한다. "성경에 오류와 오해가 있다면 성경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마음에 부담이 안 될 수 없다. 그러나 9할이 잘못되었고 1할이 바로 되어 있다고 해도 그 1할을 찾아내면 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문자화되기 전의 말씀인 성령이 내 마음속에 와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성경 연구를 하려면 예수의 말대로 하느님 아들이 되어서 연구하여야 바르게 할 수 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단어나 문법만 안다고 성경 연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인 성령은 성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 성경은 성령이 스치고 지나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이 하느님 아들인 그리스도다. 사람들은 예수의 영원한 생명인 성령은 제쳐놓고 예수의 육체를 그리스도로 알고 있다. 이런 무지한 일이 어디 있는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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