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기본으로 돌아가자] “재판은 법정에서…장외공방 그만하자“

2020-01-0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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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 ‘공판중심주의’는 근대 사법제도의 기본…피의사실 공표는 중대한 문제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증거능력, 무조건 인정되면 안돼

지난해 12월 15일 청와대는 서면브리핑 형식으로 최근 진행되는 검찰수사와 관련, “청와대 내부인사들에게 쏟아지는 의혹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잇따르는 ‘검찰발‘ 기사에 대한 대응차원이었다. 앞서 검찰은 같은 달 13일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을 기소하면서 “비리혐의 중 상당부분은 청와대 특별감찰반 감찰과정에서 이미 확인됐거나 확인이 가능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청와대는 유 전 부시장 관련 의혹, ‘하명수사’,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등 ‘검찰발 기사‘들이 근거 없는 억측에 의한 것으로 “허위보도를 중단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자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번엔 검찰이 매몰차게 반박하고 나섰다. 검찰은 "청와대가 당사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발표했다"며 “수사결과를 보면 수긍이 갈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했다.

평소 검찰발 기사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던 청와대이지만 이때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음 날 청와대는 “언론보도에 대해 해명한 것인데 왜 검찰이 나서서 반박하느냐“며 “이해할 수 없다”고 검찰의 행보를 꼬집었다.

이처럼 청와대와 검찰이 날선 공방을 이어가자, 법조계 안팎에서는 안타까워하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수사상황을 여과 없이 언론에 흘리는 검찰과 ‘더 이상은 못 참겠다’며 반박에 나서는 청와대의 행보 모두 정상적인 재판절차를 무시한 것으로, 우리 사법제도를 뿌리째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검찰의 수사결과나 청와대의 반박은 모두 법정에 먼저 제출돼야 하고 공판절차에 따라 증거와 합리적인 논증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인데,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법정 밖에서 승패를 가르려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4일 오후 청와대에서 고민정 대변인이 김기현 전 울산시장 비리 의혹 제보 경위 및 문건 이첩에 관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판중심주의 정착, ‘피의사실 공표’ 사라져야

모든 증거는 공개법정에 제출돼야 하고, 법정에서 절차에 따라 조사를 거친 것만이 증거능력을 갖게 되며, 증거를 바탕으로 당사자의 구술변론을 거쳐 유무죄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을 ‘공판중심주의‘라고 한다.

우리 형사소송법에서도 ‘판결은 법률에 다른 규정이 없으면 구두변론에 의거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제37조와 전문증거의 증거능력 배제를 규정한 제310조의2, 증거조사 시 법정에서 증거서류를 낭독하고 증거물을 제시하도록 한 제292조 등 관련규정을 두고 있다.

이 밖에 법관에게 선입견을 줄 수 있는 첨부물을 미리 제출할 수 없도록 규정한 형소법 118조 2항(공소장 일본주의)도 공판중심주의의 핵심조항으로 본다.

이에 따르면 법정에 제출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공판 전에 미리 유출된 자료도 경우에 따라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어렵다. 법관에게 선입견을 줄 수 있는 사정이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재판에서 검찰에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피고인 측에 반증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검찰발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나온다고 해도 재판에 영향을 주기 어렵게 되는 셈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피의사실 공표‘ 논란은 공판중심주의만 정착돼도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는 셈이다.

법조계에서는 ‘공판중심주의야말로 우리 사법제도의 기본’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법전 속에만 있는 공판중심주의

하지만 우리 법정의 실정은 공판중심주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오히려 법이 정한 바와는 정반대로 왜곡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구두변론 대신 검사와 변호사가 제출하는 의견서로 재판이 진행되고, 시간절약을 이유로 증거물의 낭독도 생략되기 일쑤다. 공소장 내용도 숙지하지 않고 법정에 나와 더듬더듬 공소장을 읽는 검사가 있는가 하면 증거목록을 꼼꼼하게 살피려 한다는 이유로 표정이 일그러지는 판사도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변호사들이 생길 정도다.

이와 관련, 법조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검찰의 신문조서 증거능력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현행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검찰에서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는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증거능력이 인정된다(312조). 심지어 피의자가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더라도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자백이 담긴 진술조서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힘들여 수사를 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런 진술조서가 있는데 어느 검사가 공판에 집중하겠느냐는 것이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에서는 이 조항이 심각하게 공정성을 잃은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법정에서 피고인과 검찰이 동등한 자격에서 공방을 벌여야 하는데, 이미 한쪽의 주장이 증거로 인정돼 버리면 동등한 공방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처음부터 사라진다는 것이다.

검찰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의자에게 자백을 받아내려 하는 것이나 전체적인 진술취지와 상관없이 특정한 발언만 따로 떼내어 조서를 작성하는 등 무리한 수사를 하는 것도 이 제도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상당하다.

이와 관련해 지난 8월 국회에서 진행된 토론에서 한림대 박노섭 교수는 “현행 조서제도가 공판중심주의에 취지에 맞지 않는다“면서 “법개정 등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3일 국가인권위원회도 “다른 수사기관의 조서와 같이 피의자가 내용을 부인하면 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도 증거능력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변호사와 판사, 검사들 중에 ‘공판중심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각 직역에 따라 ‘공판중심주의’를 바라보는 입장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공판과정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할 피고인의 인권이 가장 도외시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경자년 새해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의 출발점은 법정에서 모든 것을 다투는 '공판중심주의'를 제자리에 세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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