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동안 일하고 번 돈으로 계란 2개를 간신히 살 수 있는 나라가 있다. 바로 베네수엘라다. 지난해 물가 상승률은 170만%에 달했으며, 올해는 1000만%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생필품과 의약품은 사치품이 된 지 오래고, 국민은 식량난에 허덕인다. 매일 5000여명의 국민이 콜롬비아 등 다른 나라 국경을 넘는다.
역설적이게도 이 같은 상황이 베네수엘라를 암호화폐 성지로 만들었다. 베네수엘라 국민은 더이상 정부 시스템을 믿지 않는다. 정부가 발행하는 법정화폐가 '휴지조각'이 됐기 때문이다. 대신 베네수엘라 국민은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암호화폐를 거래수단으로 삼고 있다. 암호화폐 가격이 폭락하더라도 자국 통화보다 낫다는 판단에서다. 베네수엘라 국민은 투자가 아니라 '살기 위해' 암호화폐를 사용한다.
하지만 암호화폐를 대하는 전세계 정부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다. 법정화폐의 지위가 흔들리는 나라를 중심으로 암호화폐 결제가 활성화되고 있다. 주요국 정부는 디지털화폐(CBDC) 도입을 추진 중이거나, 추진을 위한 연구에 돌입했다. 시장에서는 암호화폐의 근간이 되는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특허권 출원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 법정화폐가 '휴지조각'으로…돈 대신 암호화폐 거래
지난 6일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테크핀 아시아 2019 콘퍼런스'에서는 비트코인이 금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란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역사적으로 비트코인의 가격 추이가 초기 금 시장의 시세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내놓은 한대훈 SK증권 애널리스트는 특히 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 등을 꼽으며 "정치 경제 상황이 불안정한 국가일수록 암호화폐 수요가 증가한 것은 이 같은 배경"이라고 말했다. 해당 국가의 화폐보다 암호화폐의 변동성이 더 작아 유통되기 쉽고 암호화폐가 환 헤지 및 인플레이션 헤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경제위기가 악화하며 법정화폐 지위가 흔들리는 국가를 중심으로 암호화폐 거래가 활성화되는 추세다. 이는 암호화폐를 현금으로 바꿀 수 있고, 반대로 현금을 비트코인으로 바꿀 수 있는 암호화폐 전용 자동입출금기(ATM)가 설치된 사례에서 엿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지난해 9월 암호화폐 ATM이 설치되며 주목을 받았다. 아르헨티나의 지난해 연간 물가상승률은 47%에 달한다. 휴지조각이 된 자국 통화 대신 암호화폐 사용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ATM 수는 현재 1000개 이상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베네수엘라 역시 올 3월 콜롬비아 국경 인근에 암호화폐 전용 ATM을 설치했다. 베네수엘라 국민은 콜롬비아 국경을 넘기 전 이 ATM에서 암호화폐를 콜롬비아 화폐인 페소화로 환전한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큰 국가에서는 암호화폐에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고 있다. 반(反)중국 시위가 격화하고 있는 홍콩이 대표적이다. 현재 홍콩에서 비트코인은 전세계 평균 시세보다 5%가량 높은 가격에서 거래 중이다. 홍콩의 자산가들이 비트코인을 통해 자산을 해외로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며 생긴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앞서 지난 6월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는 비트코인 가격이 8만 달러 부근까지 치솟았다. 당시 글로벌 비트코인 시세(1만1000달러)와 비교하면 600% 이상 높은 값이다. 짐바브웨 정부가 외화 사용 및 거래를 제한하자 비트코인 거래가 급증하며 가격이 폭등했다.
◇ CBDC 도입 위해 발벗고 나선 중앙은행
최근 글로벌 암호화폐 시장에는 CBDC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CBDC는 중앙은행이 발급하는 전자 화폐로, 현금과 같이 지급과 동시에 결제가 가능하다. 누가 이 시장을 선점하느냐에 따라 '디지털 화폐전쟁'의 선두에 설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 중심에는 중국이 있다. 중국 인민은행은 2014년 CBDC 연구팀을 신설하는 등 CBDC 발행을 적극 준비해 왔다. 아직 구체적인 발행 일정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내년 1분기께에는 시범 운영이 시작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중국 CBDC의 발행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파급력은 작지 않다. 달러 중심의 국제 통화 체계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미국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은 지난달 하원의원의 서면질의에 대한 답변서한으로 "현재 CBDC 발행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지만, 발행에 따른 비용·편익 분석과 함께 소규모 기술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미국이 이미 상당 부분 CBCD 개발을 마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유럽 국가들도 CBDC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빌루아 드 갈로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는 지난 5일 "내년 1분기 전 CBDC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중앙은행(ECB)도 "민간에 대한 안전하고 효율적 지급수단 제공을 목적으로 ECB가 자체적 CBDC를 발행할 수 있다"는 문건을 작성했다.
터키는 금융 인프라를 강화하고 이스탄불을 국제금융도시로 성장시키려는 목적으로 CBDC를 추진 중이다. 터키 정부에서는 2020년까지 파일럿 테스트를 완료할 예정이다.
스웨덴, 우루과이, 튀니지 등 일부 국가에서는 △현금 이용의 감소 △화폐 제조 비용 절감 △금융포용 제고 등을 위해 CBDC 도입을 검토 중이다.
다만, 일본과 한국은 아직 소극적인 입장이다.
일본은행은 "단기간 내 CBDC 발행을 계획하고 있지 않으나, 현금 없는 사회에 대비하고 지급결제시스템 개선 방안 마련을 위해 관련 연구를 지속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은행도 최근 암호화폐 관련 전문가 채용에는 나섰지만, "당장의 발행 필요성은 느끼지 않고 있다"며 "내부적으로 연구를 수행 중인 단계"라고 말했다.
◇ 블록체인, 이제는 특허권 전쟁
블록체인은 4차산업혁명의 큰 줄기나 다름없다. 이 시대의 근간 기술로 인정받으면서 특허권을 둘러싼 경쟁도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사실상 전 세계가 이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승기를 잡은 곳은 역시나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다.
일본 리서치 업체 아스타뮤제가 진행한 블록체인 관련 특허출원 조사에 따르면 2009~2018년 블록체인 관련 특허출원 누계건수 조사에서 중국이 7600여건으로 전체(1만2000여건)의 60%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파악됐다.
2014년까지 중국의 특허 출원은 연간 100~200건 정도에 그쳤지만, 2015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해 2016년부터 미국을 제쳤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특허를 가진 기업 역시 중국의 대표 IT기업인 알리바바로, 이곳에서만 500건이 넘는 블록체인 특허권을 갖고 있었다.
이는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이다. 중국은 향후 금융거래, IoT(사물인터넷) 분야 등 블록체인 기술 응용 확대에 대비해 기술우위 선점을 위한 지원정책을 추진 중이다.
이 외에도 중국 최대 스마트폰 업체 화웨이와 텐센트, 바이두 등 중국 거대기업들이 특허 출원에 열을 올리는 등 블록체인기술 특허기업 상위 20개 중 14개가 중국에서 나왔다.
2016년부터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크게 밀려 2600여건의 특허권을 갖고 있다. IBM, 마스터카드, 구글, 인텔, 페이팔 등이 순위에 올라있다.
이 중 IBM은 총 248개의 특허를 취득했다. 1년 사이 300% 증가한 수치다.
IBM은 올해 초 미국 특허청을 통해 자율주행 자동차를 위한 데이터 관리를 실행하는 특허를 받았으며, 최근에는 블록체인 기반의 웹브라우저 특허를 출원했다.
한국은 1150여건으로 3위를 차지했다. 코인플러그와 KT, 삼성SDS 등이 특허를 출원했다. 뒤이어 영국과 일본이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