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파르헤시아]여수의 배은망덕 시험과 보이텔스바흐 합의

2019-12-1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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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한 고교에서 출제한 한문 시험지. [사진=TV조선 캡처]]


지난 3일 전남 여수의 한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 한문 시험지가 공개되어 사람들을 뜨악하게 했다. 예문에는 조국 전 장관과 금태섭 민주당의원을 거론하고 있다. 금 의원이 인사청문회에서 조국을 향해 언행불일치라며 비판한 것에 대한 조국의 심정을 나타내는 사자성어를 묻고 있다. 정답은 배은망덕이었다. 또 한국당 장제원 의원의 아들이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것과 관련해 장 의원의 심경을 묻는 사자성어도 있었다. 답은 유구무언이었다.
 
지난 10월 서울 인헌고 학생들은 '일부 교사가 반일을 강요하고 조국 전 장관에 대한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가르쳤다'면서, 친여 성향 정치의식을 주입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선거권 연령을 현재의 만 19세에서 18세로 낮추는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이 법안은 당장 내년 총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해당되기 때문이다. 자칫 학교 교실이 선거운동의 또다른 무대가 되는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다. 특히 최근 학교에서 일어난 위와 같은 교사들의 행태 또한 학생의 정치관뿐만 아니라 선거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문제행위가 될 수 있다.
 
독일은 세계 1·2차대전 이후 극심한 이념대립을 겪은 나라다. 국민들은 두 진영으로 갈라져 서로를 헐뜯고 비방했다. 학교에서의 정치교육 또한 양쪽의 이견으로 학생들이 큰 혼란을 겪었다. 1976년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교육자, 정치가, 학자 등 양쪽 진영대표자 10명이 보이텔스바흐라는 도시에 모였다. 자라나는 세대들의 균형 잡힌 교육을 위한 지침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것을 보이텔스바흐 합의(Beutelsbacher Konsens)라고 부른다. 참가자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특정 정권에 치우치지 않는 교육을 목표로 하는 지침을 만들어냈으며, 이것이 학생 정치교육(민주시민교육)의 원칙이 된다. 처음엔 학교 정치교육 지침으로 제시되었으나 지금은 모든 공교육 영역으로 확대 적용해, 이 나라 정치교육의 '헌법' 구실을 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으면서 치열하게 '교과서의 이념 쟁탈전'을 벌여온 한국의 경우, 늦었지만 독일처럼 정치교육의 엄격한 원칙을 세울 필요가 커졌다. 정권을 잡은 '진영'이, 정치적이고 당파적인 목적을 위해 국가 대계가 되어야 할 교육을 농단하고 '가치 기준'을 독점하는 것을 막을 장치가 절실하다.
 
보이텔스바흐에서 합의한 3대 원칙은 명쾌하고 지혜롭다. 첫째는 강제성을 금지한다. 올바른 견해라는 이름으로 학생을 압박할 수 없으며 그들 스스로의 판단 능력을 방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즉 학생들에게 특정이념이나 가치관을 주입하기 위해 강압적인 교화 교육을 시킬 수가 없다. 강제성 금지를 위반한 교육에 대해서는 학생들이 받지 않겠다고 말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는 셈이다. 교사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관점을 교육의 이름으로 학생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원칙은, 지금 이 땅에서 시급히 천명되어야 할 중대한 방침이다.
 
둘째는 논쟁성의 유지다. 즉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가치나 비전에 대한 관점은 현실적으로 논쟁이 불가피하며 그런 점에서 견제하고 타협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이다. 그런 현실을 교육 현장에도 그대로 들여와 수업 중에도 실제와 같은 '논쟁적 특성'을 억압이나 강제성 없이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문과 정치에서 다투는 쟁점들은 학교의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재현되어야 한다. 서로의 이견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셋째는 학생들의 정치적 행위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정치'라는 현실 행위에서 배제되거나 보호조치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 의견과 입장을 지닌 '시민'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당연히 교사와도 논쟁을 벌일 수 있으며, 그것 또한 교육의 정당한 장면이다. 학생은 정치 상황과 자신의 이익상태를 따져보는 능력을 지닐 수 있도록 충분히 교육적 안내를 받아야 한다.  정치적 견해와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선택을 교육 현장인 교실에서도 충분히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합의의 취지다.

이 합의가 지향하는 목적은 자발적인 '정치적 판단'을 교육하는 일이다. 학생들에게 '합의'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합의되지 않은 논쟁' 그 자체를 충분하게 이끌어가는 힘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교실이 민주적 공론장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들은 학생들을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주체로 보았다. 단순한 시민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장을 해나가는 각각의 민주시민이다. 수업 중에 사회 현안에 대한 활발한 토론은 필요하지만, 단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을 키우고 주체적인 의견을 기꺼이 제시할 수 있는 자유로운 발언장이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이텔스바흐 합의의 주요 내용이 대한민국 학교교육의 기틀이 되어야 정권마다 교과서를 '탈취'하려 하고, '역사교육'을 뒤바꾸려 하는 행태를 중지시킬 수 있다. 또 수업 중에 이념이나 정치적 견해를 주입시켜 교육 외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음험한 교사들을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 게다가, 정치적 유불리를 고려하여 선심 쓰듯 내놓거나 혹은 '자신들의 치적'을 남기기 위해 불쑥 들이미는, 입시제도와 교육 관련 '변덕'들로 인한 폐해도 줄일 수 있다.
 
정치진영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된 공교육이 이 나라의 '미래'를 정치에 휘둘리지 않게 하는 혁신의 제1보다. 이게 안 되면, 입시제도는 정권이 바뀌면 어김없이 곧 또 바뀌며 편향교육은 진영의 완장만 바뀐 채 계속 교실로 침투할 것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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