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반정부 시위 배경엔 두 번째 '잃어버린 10년'?

2019-11-1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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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정체·투자 부진·1인당 소득 감소...1980년대 '잃어버린 10년' 닮아

지난 12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 도심 한가운 데 반정부 시위대가 놓은 불이 170년 된 교회를 집어삼켰다. 칠레 정부가 반정부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재정지출 확대, 내각 개편, 개헌을 약속했지만 시위대의 분노가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나라를 혼돈으로 몰아넣는 반정부 시위가 비단 칠레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규모 시위는 정부의 정치적 성향을 가리지 않고 볼리비아, 에콰도르, 아이티,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전역을 휩쓸고 있다.

알베르토 라모스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는 "중남미 국민들은 남쪽 끝에서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봉기에 나서고 있다"면서 "몇년 동안 곪아왔던 분노가 한 번에 터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시위의 이유가 나라마다 다르지만 취약한 경제에 공통된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6년 동안 중남미 국내총생산(GDP)의 실질 성장률은 연평균 0.8%에 불과했다. 인구 증가세를 고려하면 1인당 소득이 사실상 줄어든 셈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중남미 국가들이 '잃어버린 10년'을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16일(현지시간) 지적했다. 중남미의 '잃어버린 10년(La Década Perdida)'은 장기 경기침체에 빠졌던 1980년대를 말한다. 과다한 외채 부담으로 경제 성장률이 멈춰서고 높은 인플레이션에 몸살을 앓았던 시기다.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1인당 소득도 하락했다.

FT는 이번 '잃어버린 10년'의 시작이 2014년 글로벌 원자재 호황이 막을 내린 2014년부터일 것이라고 짚었다. 원자재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원자재 수출에 재정을 의존하던 중남미 국가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일례로 2014년 배럴당 100달러가 넘던 국제유가는 53달러까지 떨어졌고, 이듬해 1월에는 배럴당 36달러까지 곤두박질쳤다.

원자재 호황기에 좌익 성향 정부들은 온건 사회주의 물결을 의미하는 이른바 '핑크 타이드'(pink tide)를 타고 정권을 잡았지만 선심성 재정 지출을 확대하면서도 장기 경쟁력을 높이는 구조개혁이나 인프라, 교육 등에 대한 투자엔 충분히 나서지 않은 탓에 추후 경제적 충격을 피하지 못했다.  

취약한 경제는 최근 중남미 전역을 혼돈으로 몰아넣은 반정부 시위의 배경이 됐다. 경기가 호황일 때 중산층에 편입됐던 수많은 시민들은 수년째 실질소득이 줄어들고 미래 전망마저 악화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불만을 쌓아왔고 이것이 결국 시위로 터져나온 것이다. 좌파·우파 등 정부의 성향에 관계없이 반정부 시위의 초점이 부의 분배, 부정·부패 해결 등 민생 문제 해결에 모아져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남미 중 가장 위태로운 건 베네수엘라다. 지난해 대선 조작 의혹이 제기되면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불복 시위가 장기간 이어지는 베네수엘라에선 경제가 붕괴되고 있다. 이미 450만 명 넘는 국민들이 민생고에 자국을 등졌다.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이 94%에 이른다는 유엔의 통계도 있다. 

연평균 4% 성장률을 구가하면서 남미 경제 성공사례로 통하던 칠레도 급격한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단독 30페소(50원)의 지하철 요금 인상 결정이 행정 마비 상태에 빠뜨릴 정도로 빈부 격차와 소득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상실감이 컸던 것으로 드러났다.

핑크 타이드의 대표주자로 통하던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대선 개표 조작 논란으로 촉발된 대규모 시위로 지난 10일 하야를 선택, 14일 통치의 막을 내렸다.

앞서 남미 에콰도르에서도 지난달 초 정부가 유류 보조금을 폐지하면서 석유 가격이 오르자 빈곤층을 중심으로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정부는 유류 보조금 폐지를 백지화하면서 시위를 가까스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앞으로 수년간 중남미 전망이 더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몇 년간 중남미 경제를 근근이 떠받치던 글로벌 경제 성장이나 해외 투자 유입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어서다. 또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은 사회의 응집이나 합의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FT는 덧붙였다. 

 

지난 6일(현지시간) 칠레 산티아고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도로 바리케이드에 불을 질렀다. [사진=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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