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눈]'불후의명곡' 백청강이 부른 '누가 울어'와 독립군 아들 가수 배호의 비밀

2019-11-16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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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같이 11월에 타계한 두 가수, 차중락과 배호

우연이었을까.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른 가수 차중락은 1968년 11월10일 급성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을 부른 배호는 1971년 11월7일 신장염으로 눈을 감았다. 둘 다 공교롭게도 11월에 운명했고, 차중락은 26세 배호는 29세로 아까운 요절이었다.

16일 KBS2TV ‘불후의 명곡’은 한국 가요계의 명실상부한 전설 차중락과 배호의 노래를 불러 깊어가는 늦가을의 추억을 돋웠다. 두 사람 중에서 지금도 ‘최고의 가수’로 손꼽히는 배호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 그가 타계한지 10년이 된 1981년에 MBC여론조사에서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에 오를만큼 사후에도 명성을 유지해온 독보적인 스타다. 2005년 광복60주년 기념 KBS가요무대 여론조사에서 뽑은 ‘국민가수 10인’에 그는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배호의 부친 배국민 선생(1912~1955) 광복군 제3지대 중사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던 점도 특기할 만하다. 우선 배호는 타계 4개월 전에 ‘사망설’이 나돌아 나라를 발칵 뒤집었던 기억이 있다. 어찌된 일이었을까.
 

[가수 배호]

# 사망 넉달전에 '사망설'에 시달린 배호

1968년 7월 TV ‘가요일번지’의 정봉화PD 작업실에 전화가 울렸다. “가수 배호가 사망했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이미 통곡을 한 뒤인지 목이 잔뜩 쉰 여성의 전화였다. 이날 정PD는 같은 질문의 전화를 50통 가량 받았다. 갑자기 불거진 ‘배호사망설’의 자초지종은 이랬다. 배호가 지방의 공연을 펑크내자 흥분한 관객들이 난동을 부렸다. 엉겁결에 나선 사회자가 “전날 갑자기 병이 재발되어 입원했는데, 그만....”이라고 얼버무렸다. 이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좌중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소문이 번지자 확인 전화가 방송국으로 몰려온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의 요절을 예고하는 듯 했다.

1942년 4월24일 중국 산동성에서 태어난 배만금(배호의 본명)은 광복군이었던 배국민씨의 장남이었다. 전쟁 직후 아버지를 여의고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외삼촌 김광빈을 통해 드럼을 배운다. 1963년 외삼촌이 작곡한 ‘굿바이’를 발표할 때 ‘배호’라는 예명을 쓴다. 64년 낙원동 프린스 카바레에는 ‘배호와 그 악단’이란 12인조 밴드가 명성을 떨쳤다. 그는 드럼을 치며 ‘두메산골’을 불렀다.

60년대는 슬픔과 희망이라는 두 가지 트랙이 함께 돌고 있던 시절이었다. 전쟁과 가난은 쥐어짜는 아픔의 농촌 트로트를 피워올렸고 조국 근대화를 타고 들어온 서구 동경은 스탠다드 팝을 번성시킨다. 최희준에게서 냇 킹 콜의 분위기가 나고 패티김에게서 패티 페이지의 냄새가 나는 건 그런 유행 때문이었다. 배호는 기묘했다. 도시의 모던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골의 향수를 깊이 자아내는 매력이 있었다. 그 시대의 ‘카운터 컬쳐(반문화)’라 할 만한 ‘배호스타일’은 한 시절을 사로잡았다. 배호는 이렇게 말했다. “제 창법은 잘 모르겠지만 처음 노래 부를 때 ‘참 건방지게 멋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 참 건방지게 멋있다는 말을 들었죠

66년 신장염이 발병했다. 요즘 같으면 큰 병도 아니라지만, 당시엔 치명적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그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누가 울어’와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 빅히트를 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67년 3월 장충동의 녹음실에선 몸도 못 가누는 배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 소절 부르고는 주저앉고 다시 일어나 부르고는 주저앉았다. 한 시간 남짓 힘겨운 녹음을 마치고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그는 그곳을 나간다. 그날 부른 노래는 ‘돌아가는 삼각지’였다. 용산구 한강로 1가에 세워진 입체교차로를 노래한 곡이다. 이 교차로는 94년 철거되고 배호 노래비만 남았다. 당시 삼각지에는 배호 노래 때문에 선술집이 늘었고 술집 아가씨들의 사연도 많아 노래가 현실이 되었다.
 

[가수 배호]



68년 봄 그는 거짓말같이 멀쩡해졌다. “병마가 내 몸에서 사라진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해 늦가을 최희준과 남진의 인기를 앞지르면서 가요계 판도를 뒤흔다. 이 해에 영화 ‘남정임, 여군에 가다’에 중절모에 뿔테 안경을 쓰고 위문공연단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방송 출연, 업소 출장, 지방 공연이 잦아지던 69년 병이 재발했다. 12월 MBC 10대 가수상 수상 때는 동료가수 이상렬이 그를 업고 출연했다. 그 해에 부른 ‘안녕’이란 노래에는 가래 끓는 소리가 처연하게 묻어나온다.

# 노래하다가 죽겠다며 숨 헐떡이며 가창

70년에는 다시 잠깐 회복이 되어 연말 가수상 시상식에 스스로 걸어서 나왔다. 71년 병세가 악화되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에 ‘0시의 이별’과 ‘마지막 잎새’를 취입한다. “죽어도 노래하다가 죽겠다”면서 숨을 헐떡이면서 노래를 부른다. 초인적인 의지였다. 어떤 때엔 입이 떨어지지 않아 음악만 틀어놓고 무대에 그대로 서 있는 경우도 있었다.

71년 10월20일 M,BC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 출연이 마지막이었다. 11월 낙엽이 바람에 후두둑거리던 저녁에 운명했다. 11일 예총회관(현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 가수협회장으로 치른 장례식에는 소복입은 젊은 여인들이 수백 미터나 늘어서서 지켜보았고 그의 묘지에도 팬들이 매일같이 몰려들었다. 그가 돌아간지 48년. 노래방과 유튜브에선 아직도 배호 노래가 흘러나오고 인터넷에는 수많은 팬클럽이 여전히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서울 삼각지, 양주군 장흥면 묘지, 경주시 현곡면, 강릉 주문진, 인천에 그의 노래비가 서 있다. 배호가 부른 곡 중에 가사에서 비가 내리는 것이 30여곡, 안개가 낀 것이 10여곡이나 되는 건 우연일까.

임종 직전 배호가 누운 병상에는 1년 가까이 떠나지 않고 그를 간호해온 여인 한 사람이 있었다. 대구 공연 때 이 가수에게 꽃다발을 걸어준 사람이었다. 이름은 옥이. 나이는 배호보다 7세 연하. 죽기 하루전 배호는 자신의 손목시계와 반지를 건네주면서 그녀를 설득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녀는 병실 문에 기대서서 울부짖었지만 사람들에게 떠밀려 밖으로 나왔다.

# 배호의 병상을 지킨 7세 연하의 여인 옥이

구효서의 소설 ‘달빛 아래 외로이’는 배호마니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수 지망생인 그는 사기를 당해 재산을 다 날리지만 배호의 노래를 들으며 괴로운 삶을 견딘다. 한 팬은 그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아 밤새도록 술을 먹으며 엉엉 울었다는 고백을 털어놓고 있다. 너무나 짧은 삶을 살다 훌쩍 가버린 전설의 가수. 가수 생활 5년 사이에 무려 300여곡을 남긴 엄청난 열정과 투혼의 삶. 노래는 멈췄는데 혼자 돌고 있는 LP바늘의 잡음처럼 추억은 멈추지 않는다. 안개낀 장충단 공원을 걸으며 새겨보는 그의 기억은 깊이 영혼을 긁는다.
 

['불후의명곡'에서 배호의 '누가 울어'를 열창하는 가수 백청강.]


# 암 앓았던 조선족 가수 백청강이 부른 배호 노래 '누가 울어'

16일 불후의 명곡에서는 그룹 포레스텔라, 바버렛츠, 먼데이키즈, 남성듀오 유리상자 멤버 이세준, 가수 백청강, 그룹 엔플라잉 멤버 유회승이 출연해 배호와 차중락의 명곡을 불렀다. 이날 최종 우승을 거머쥔 사람은 배호의 ‘누가 울어’를 부른 백청강이었다. 이 가수는 연변에서 태어난 조선족 중국인으로 2011년 MBC오디션 프로그램으로 가수 데뷔를 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2012년 직장암 판정을 받고 2년간 투병 끝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번 ‘불후의 명곡’무대는 그의 재기무대이기도 했다. 배호와 백청강이 부른 ‘누가 울어’는 1968년 MBC PD이던 라규호가 가사(작사가 전우가 지었다)를 받고, 방송국에서 근무를 하면서 배호를 생각하다가 문득 악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백청강은 자신의 삶이 투영된 것처럼 애잔한 슬픔으로 드러내며 이 노래를 불렀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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