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면, 외부 의견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내부의 건의나 충고는 무시하는 경우가 귀이천목이다. 또 미국이나 유럽의 제품이나 인물들에 대해 열광하면서 국내 제품이나 인물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낮춰 평가하는 태도 또한 그렇다. 공자나 맹자 같은 옛사람들은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동일하거나 비슷한 주장을 하면 귀담아 듣지 않는 것 또한 그렇다. 소크라테스처럼 아주 훌륭한 사람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는 것도 귀이천목이다. 집토끼보다 산토끼가 더 좋아보이는 경우도 그렇고, 이미 잡은 물고기보다 놓친 물고기가 더 커보이는 것도 그런 이치다.
이 말은 한나라 초기의 사상가 환담(桓譚, BC24~AD56)의 언행이 담긴 '환자신론(桓子新論)'에 등장한다. 당시 세태를 꼬집은 것인데 貴耳賤目 貴古賤今(귀이천목 귀고천금)이라 했다.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 본 것보다 귀로 들은 소문을 진짜로 여기며, 옛날에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일들은 팩트로 생각하고 요즘의 일들은 가볍게 여긴다는 얘기다.
643년에 당태종의 명령으로 편찬한 진서(晉書)에도 이 구절이 보인다. 所謂末學膚受 貴耳而賤目者也(소위말학부수 위이이천목자야). 세상에서 이르기를 배우는 자들이 속뜻은 이해도 못하고 겉만 읽고 전하니, 귀를 귀하게 여기고 눈을 천하게 여기는 자들이란 의미다. 옛사람의 생각이 훌륭하고 옳다 할지라도, 그 깊은 뜻을 읽지 못하고 그저 감탄사만 붙여서 전하면 그게 무슨 학문이냐는 얘기다. 전해진 것을, 자신의 눈으로 읽어내서 그 뜻을 부연하고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며 그 지적 깊이를 더하는 것만이 학문하는 자의 도리가 아닌가 하는, 아주 귀담을 말이다.
진서가 나온지 200년쯤 뒤 당나라 중기에 이고(李翺, 771-~841)라는 학자가 있었다. 한유(韓愈)의 제자로 당시 철학적 기조였던 숭유억불을 주창했으나 실제로는 불교 선종에 대해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유학에 불교사상을 받아들여 인간 본성을 논했던 학자로 성리학의 한 줄기를 이룬다. 그가 낭주(현재 호남성 상덕시)자사로 근무할 때 유엄(惟儼, 760~829)선사의 명성을 듣고 그를 여러 차례 초청했으나 선사가 응하지 않았다. 그는 해주 약산으로 그를 찾아갔는데, 스님은 그를 본체만체 하면서 책만 읽고 있었다. 성격이 급했던 조고는 중얼거렸다.
견면불여문명(見面不如聞名).
(얼굴을 보니 이름을 듣는 것만 못하구나.)
그때 선사가 문득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하득귀이천목(何得貴耳賤目).
(어찌하여 귀로 들은 것은 귀하게 여기고 눈으로 본 것은 천하게 여기는가.)
이고가 번쩍 정신이 들어 손을 모으고 사죄한 뒤 "도를 물으러 왔다"고 말하자 선사는 손으로 위와 아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이고가 모르겠다고 말하자, "운재천 수재병(雲在天 水在甁,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화병에 있다"고 말한다. 이 일이 있은 뒤 이고는 이 상황을 시로 남겼다.
鍊得身形似鶴形(연득신형사학형)
千株松下兩函經(천주송하양함경)
我來問道無餘說(아래문도무여설)
雲在靑天水在甁(운재청천수재병)
수련을 오래하여 몸의 모양이 흡사 학을 닮았는데
천 그루 소나무 아래에 두 박스의 책이 들었네
내가 와서 도를 물었더니 다른 말씀은 없고
구름에 푸른 하늘 있고 항아리에 물이 있다 하네
선사가 말한 도를 모두 짐작하긴 어려우나, 진리는 그것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에 있으며 그 사물의 격을 따져 인식에 도달한다는 격물치지의 정신을 설법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일화 속에 약산의 스님이 대꾸한 '귀이천목'이야 말로, 이 말이 가장 멋지게 쓰인 용례가 아닐까 한다.
'견불여문(見不如聞, 보는 것이 듣는 것만 못하다)'이라고 함부로 말해버리는 이 유학자의 오만에, 숭유억불 시절에 폄하된 불교의 정수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분위기를 질타한다. 이때 쓰인 '귀이천목'은 소문으로만 듣고 짐작으로만 아는 불교로 매도하지 말고, 실제로 생동하는 가르침이며 수련으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현장 속의 리얼 불교를 발견하라고 뒤집어 꾸짖는 일갈이기도 하다. 졸지에 '얕은 안목'이 되어버린 유학자 이고가 머쓱해질 만하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