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파르헤지아']대통령과 조국장관에게 부끄러움을 묻다

2019-09-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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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의 '국유사유(國有四維)'와 2년전 대통령취임사를 읽으며

문재인 대통령 부부.[사진=연합뉴스]

* 파르헤시아(Parrhesia)는 고대 그리스어로 '두려움 없는 발언'이란 뜻입니다. 미셸 푸코는 민주주의가 꽃피던 그리스에선 흔히 쓰였던 이 낱말이, 그 이후 유럽 사회에서 사라지는 과정을 주목해 연구한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필자>



전 정권이 무너질 때 ‘이게 나라냐’란 분노가 있었고, 새 정권이 들어서서 난국에 봉착할 때 ‘이건 나라냐’는 탄식이 있다. 그럼 무엇이 나라인가. 국민들이 진짜 ‘나라’가 뭔지 몰라서 질문한 것은 아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에 하자가 있어서 하는 말도 아니다. 그 질문은, 국가의 면모를 갖추는 건전한 기강과 상식적인 가치가 작동하느냐를 따지는 물음이다.

# 국민에 대한 예의는 있나, 스스로에 대한 염치는 있나

관자(管子) 목민편은 ‘나라엔 네 줄기 밧줄이 있어야 한다(國有四維)’고 통찰한다. 그 네 가닥의 밧줄(維는 벼리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물의 코를 꿰는 줄이다, 그물을 펴고 오므리는 긴요한 존재를 의미한다)은 뭔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예의염치(禮義廉恥)’다. 예(禮)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우는데, 백성이 지도자를 비웃는 ‘무례’의 나라다. 의(義)가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로운데, 백성이 공권력을 비웃는 ‘불의’의 나라다. 염(廉)이 끊어지면 나라가 뒤집히는데, 온갖 잘못을 숨기는 ‘파렴(破廉)’의 나라다. 치(恥)가 끊어지면 나라가 망하는데,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무치(無恥)의 나라다. 어렵게 말할 것 없다. 국민에 대한 예의가 있느냐, 자신에 대한 염치는 있는가. 이 두 가지의 질문이다. 앞쪽이 없으면 국민이 비웃고 뒤쪽이 없으면 무대의 혓바닥만 춤을 춘다.

지금 이 나라에 무엇이 무너졌으며 무엇이 없는가. 국가가치를 지탱하는 핵심밧줄인 ‘염치’가 실종됐다는 자각이 ‘이게 나라냐’와 ‘이건 나라냐’의 본질이다. 이 염치 잃은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 ‘언행불일치’ 조국과 노회찬이 다른 결정적 이유

조국 법무장관과 노회찬 전 정의당대표의 공통점은 언행불일치였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불일치의 ‘크기’도 다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불일치가 드러났을 때 드러낸 부끄러움의 유무가 아닐까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이 사회의 개혁을 외쳐온 사람이다. 개혁은 옳은 말을 행동화하는 실천이기에, 옳은 말이 그대로 행동으로 이어지는 일관성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 일관성의 가치를 놓쳤다고 생각했을 때, 노회찬은 죽음으로 부끄러움을 표현했다. 그를 아까워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죽을 만큼 치명적인 부끄러움이었던가 라고 물으며 옷깃을 여몄다. 진보의 ‘살아있는 염치’를 일깨워준 그를 잊을 수 없다.

정치는 말로 시작하며 말로 완성된다. 그 말의 힘은 이미 갖춰진 권력에 대한 부정(否定)과 비판에서 생겨난다. 부정과 비판을 통해 대중의 공감을 얻고 권력을 쥔 ‘언어의 투사’는, 어느 날 그 말들이 죽지않고 모두 살아나 자신을 감시하고 자기를 공격해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비판할 때의 잣대가 누군가에게서 자신이 비판받을 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그를 당혹케 한다. 상대를 향한 비판이 많았고 격했을수록 위험은 더하다. 부메랑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고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을 달고 있을지도 예측불허다. 노자가 말한 다언삭궁(多言數窮)은 뒤탈을 만들지 않는 ‘처방전’이다. 말을 많이 하면 궁지에 처할 가능성이 높으니 조심하란 얘기다. 조국 장관은 적어도, 노자의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은 듯하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 부끄러움의 법이 망가지면, 세상의 법을 비웃게 돼 있다

그의 언행불일치는, 앞에 한 말을 뒤에 지키기 어려운 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거창한 말을 하고 있으면서 이미 행동은 다르게 하는 가식과 위선의 혐의가 있기에 더욱 심각하다. 그는 ‘법’만이 그를 구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법의 눈을 피하고 법의 조항을 비켜가면, 모든 문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처럼 여긴다. 부끄러움은 법보다 촘촘하고 일상적이다. 부끄러움의 법이 망가지면, 자신을 성찰하고 과오를 뉘우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최근 그를 통해 실감한다. 관자의 관점으로 ‘예의염치’를 상실한 조국의 말을 들여다보자.

□ 예불유절(禮不踰節, 예의란 절제해야 할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 2012년 4월 조 장관의 트위터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직업적 학인(學人)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논문 수준은 다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도 논문의 기본은 갖추어야 한다. 학계가 반성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잠을 줄이며 한 자 한 자 논문을 쓰고 있는 대학원생이 있다.” 그의 딸은 이 글을 쓰기 3년 전에 2주 인턴으로 대한병리학회 논문 제1저자로 등재됐다. 조국은 딸의 상황에 대해 구구하게 설명할 일이 아니라,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시점에서 어떻게 자신의 선택과는 다른 말을 할 수 있었는지를 해명해야 할 판이다. 그가 비판한 ‘논문의 자격과 기본’을, 딸의 반칙을 통해 훌쩍 넘어가 버린 듯하다.

□ 의불자진(義不自進, 정의는 제자리를 지켜 함부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 2007년초 한겨레에 쓴 칼럼은 이렇다. “유명 특목고는 비평준화 시절 입시명문 고교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초등학생을 위한 특목고 대비 학원이 성황이다. 이런 사교육의 혜택은 상위계층에 속하는 학생들이 누리고 있다.” 같은 해 조 장관의 딸은 특목고인 한영외고에 진학했다. 이후 외고와는 상관없는 고려대 이공계열로 진학했고, 거기다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종잡기 어려운 ‘입시 합격 과정’을 거친다. 그가 비판한 사교육 변칙에서 선구자처럼 앞서 나갔다.

# 정유라를 인용하며 ‘돈도 실력이야’란 말 언급한 조 장관

□ 염불폐악(廉不蔽惡, 염치는 이미 저지른 잘못을 가리고 호도하지 않는 것이다) = 그해 비슷한 무렵의 트위터에는 이런 글이 있다. “장학금 지급기준을 성적 중심에서 경제상태 중심으로 옮겨야 한다.” 3년 뒤 의전원에 진학한 딸은 성적이 좋지 않았고 가정형편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두 학기를 유급하고도 1200만원의 장학금이 나왔다. 2017년 1월 트위터에서 조 장관은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는 정유라의 말을 인용하며, “바로 이것이 박근혜 정권의 철학”이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딸의 장학금에 대해 딸의 실력이 출중해서인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대학에서 줬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 치불종왕(恥不從枉, 부끄러움이란 그릇된 줄 알면서 그것에 편승하지 않는 것이다) = 2010년 한 신문칼럼에서 “위장전입은 좋은 학군으로 이사하거나 주소를 옮길 여력이나 인맥이 없는 시민의 마음을 후벼파는 소리”라고 주장했다. 1999년 그는 부산 해운대구에서 서울 송파구로 주소지를 이전한다. 한 달 뒤엔 다시 부산으로 돌아간다. 이 급박한 주소지 이동과 관련해 당시 취학연령이었던 딸의 서울 학교 배정을 위한 위장전입이란 논란이 일었다. 오래 전 그의 ‘전입’ 문제를 들춰 그가 저지른 비행이나 불법을 드러낸 것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자신 또한 자유롭지 않을 수도 있는 그 문제에 관해, ‘마음을 후벼파는 소리’라고 남의 얘기처럼 내뱉을 수 있는 천연덕스러움이 무섭다는 얘기다. 그가 자신의 일이 ‘흔한 불법’인 위장전입에 해당되는 걸 몰랐을 리 없다. 다만 그걸 스스로 해놓고도 남을 비판하는 데는 가차없었던 그 점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 부끄러움을 아는 게 왜 용기인가, 조 장관에게 없는 건 뭔가

공자는 ‘知恥(지치)는 近乎勇(근호용)’(중용 20장)이라 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용기에 가깝다는 뜻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일은, 태도를 바꾼다. 조 장관이 지난 인사청문회 때 했던 그 태도를 180도로 돌리는 일. 그에겐 그 용기가 필요했다. 공자를 추앙한 주희는, 저 말에 대해,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곧 용기는 아니다”라고 거꾸로 풀면서, 하지만 공자가 말한 뜻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지식인의 마음가짐을 바로세우는(起儒, 기유) 일을 해낼 수 있기에, 용기에 가까운 일이라고 해석을 달았다. 조국의 무치(無恥)는, 우리 사회 지식인 정신이 쓰러지고 있는 풍경이다. 진영의 문제도, 여야의 문제도, 혹은 조국 개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가책이 사라진 지식인이 스스로 정의를 자임하려는 일이 정상적인 세상을 어떻게 난도(亂刀)할지 어찌 알겠는가.

조국 법무장관을 여론의 역풍에 아랑곳않고 기용한 문재인 대통령은, 굳센 소신을 지닌 분임에 틀림없지만 그 일이, 스스로 한 말들을 얼마나 많이 식언(食言)하는 일인지 깨닫지 못했을지 모른다. 대통령의 말 중에 취임사만큼 국민의 뇌리에 박히는 것도 드물 것이다. 조국 사태는 이 취임사의 신용을 누덕누덕한 누더기로 만들어 놨다. 지금 다시 읽으면 행간마다 조 장관이 떠오를 만큼, 언행 불일치의 치명타를 입혔다.
 

문재인 대통령



# 조국 임명 강행에 누더기 된 ‘문대통령 취임사’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예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힘들었던 지난 세월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고 물었습니다. 대통령은 바로 그 질문에서 새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대학생들까지 촛불을 들고 ‘이건 나라냐’라고 묻고 있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끝나야 합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직접 대화하겠습니다. 야당은 국정운정의 동반자입니다.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습니다.”(지금만큼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격해진 때가 있었던가. 정상적이고 성의있는 여야 대화채널은 언제 있었던가. 야당은 광화문에서 문정권 심판을 외치고 있고, 대통령 지지자는 중앙지검 앞에 몰려가 검찰총장을 향해 수사 똑바로 하라고 외치고 있다.)

“전국적으로 고르게 인사를 등용하겠습니다. 능력과 적재적소를 인사의 대원칙으로 삼겠습니다.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 일을 맡기겠습니다.”(정치 원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그들이 ‘탕평인사’를 말했을 때 뭐라고 답변했던가. 적폐청산부터 해놓고 고려하겠다고 시간을 물리지 않았던가.)

# ‘기회 평등, 과정 공정, 결과 정의’ 이 말을 비웃는 지금

“거듭 말씀드립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상식대로 해야 이득을 보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소외된 국민이 없도록 노심초사 하는 마음으로 항상 살피겠습니다.”(조국의 딸이 받은 ‘특혜와 반칙’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에 대해선 과연 살폈는가.)

“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선거 과정에서 제가 했던 약속들을 꼼꼼하게 챙기겠습니다. 대통령부터 신뢰받는 정치를 솔선수범해야 진정한 정치 발전이 가능할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 치지 않겠습니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습니다. 공정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조국 법무장관의 수사와, 국민여론, 그리고 장관 임명과정을 돌이켜보면 이 말이 적절했는가.)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낮은 사람, 겸손한 권력이 돼 가장 강력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광화문시대 대통령이 되어 국민과 가까운 곳에 있겠습니다. 따뜻한 대통령, 친구 같은 대통령으로 남겠습니다.”(교수들이 3000명 이상 서명을 하고, 대학에선 촛불을 들고 기회의 불공평을 따지고, 야당에선 줄줄이 삭발을 하고 특검을 거론하며 장관 해임을 외치는데, 낮은 사람이 되려는 대통령은 어떤 소통을 했던가.)

# 도덕적 권위 무너지면 개혁의지 불타도 결국 공염불

2017년 5월 10일에 했던 말을, 2019년 9월 25일에 읽는 마음에는 참담함이 일어난다. 2년 4개월 만에 대통령의 말이 스스로 얼마나 멀어져 왔는지를 돌이켜 부끄러워할 수 있다면, 아직 염치가 남은 나라일 것이다. 지금 조국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문제가 아니라, 진짜 ‘나라’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나라가 나라여야, ‘검찰개혁’도 의미가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개혁은 쉽지 않다. 전 중국 역사를 통틀어 성공한 개혁으로는 전국시대(기원전 403~221) 딱 두 번밖에 없다고 한다. 진(秦) 효공 때 상앙이 한 변법개혁과 조(趙) 무령왕의 호복(胡服)개혁을 꼽는다. 진나라를 부국으로 만들어 훗날 천하통일의 기틀을 다진 변법개혁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누구보다 솔선해야 할 태자가 법을 어겼다. 상앙은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까닭은 위에서부터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태자를 처벌하려 했다. 차세대 제왕을 벌줄 수는 없었기에 태자의 스승과 비서를 엄벌에 처한다. 이 소문이 퍼져나가자, 진나라 백성들은 법을 목숨처럼 지켰다. 저 전제군주의 나라에도 그게 통했다. 굳이 효공을 문대통령, 태자를 조국장관, 상앙을 윤석열총장이라고 연결할 필요는 당연히 없다. 개혁은, 오직 국민의 신뢰에 기반한 도덕적 권위에서 나온다는 것을 역사는 오늘 대한민국에게 가만히 말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두면 될 일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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