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 이 시국의 멀미에, 초월적 지성이 필요했다
촛불정부를 반대하는 촛불이 등장했다. 어느 촛불이 진짜인가. 적폐청산을 주창해온 권력의 뒤안에 뜻밖의 '반칙'들이 노출되자 국민들이 착잡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칼을 쥔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사회는 날마다 깊은 반목과 갈등으로 거친 말들을 쏟아낸다. 혐오와 증오가 가득하다. 왜 이렇게 됐는가. 경제는 갈수록 동력을 잃어간다. 선진국 문턱에서 왜 이러는가. 북한은 왜 우리 대통령을 함부로 조롱하며, 일본은 왜 이 나라를 신뢰가 없다고 경제 압박으로 몰아붙이는가. 트럼프는 왜 한국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며, 중국과 러시아는 왜 사드와 공군기로 옆구리를 찌르는가. 문제가 우리 정부에 있는가, 그들의 탐욕과 오만에 있는가. 주변국 외교의 틀이 무너지고 있는 건가. 명쾌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사면초가(四面楚歌)의 불안을 느낀다.
이 한 시대 멀미 같은 어지러움에, 상황을 꿰뚫어 보는 초월적 지성이 필요했다. 갈피를 잡아줄 단단한 눈이 필요했다. 중심을 잡아줄 '두터운 생각의 켜'가 필요했다. 베이징대 출신의 철학자 최진석 교수(도가철학 박사, 1959년생)와 얘기를 나눈 것은 그 갈증이 찾아낸 일단(一端)이다. 그는 최근 공식 출범한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의 주축이다. 그 법인의 이름이 말하고 있듯,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원인은 '헌 말 헌 몸짓'이다. 우리가 혁신이라고 말한 것은 곰곰이 살피면 구태(舊態)를 구태로 극복하겠다고 나선 꼴이라는 게 그의 성찰이다. 철학은 일상의 삶 속에서 언어와 태도와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파하는 그는 수십만 조회수의 파워유튜버이기도 하다. 카랑카랑한 음색에 실린 말들은 듣기 좋은 음악적인 리듬을 지니고 있었지만 깊은 사유에 기반한 거침없는 언어의 촌철(寸鐵)이었다.
-교수님은 노장(老莊)철학의 권위자로, 일상의 삶에서 노자의 정신이 체화돼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현재의 우리 사회와 정치적 지형을 노자가 봤다면 어떤 진단을 내릴 수 있었을지요.
"노자가 2500년 전 사람이라 시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노자 경전 자체에서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고요. 응용해서 말한다면 정치적인 상황에서 노자는 국가를 '신령스런 기물(器物)'이라 합니다. 작은 생선을 굽듯이(若烹小鮮, 약팽소선, 노자 도덕경 제60장)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된다고 했습니다. '신령스런 기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자기의 가치관이나 신념이나 이념으로 해석되지 않거나 통치자의 그것과 전혀 다른 영역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어떤 신념에 갇혀 있으면 그 신념에 들어오지 않는 세계는 마치 나라에 없는 세계, 혹은 있으면 안 되는 세계로 치부해 버리거든요. 그런데 그런 자기 신념과 다른 영역도 분명히 존재하는 거고, 그런 것들까지 합쳐서 이 나라가 운영이 되는 거거든요. 어떤 신념에 의해서 정책을 펼 때 그 신념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 많아요. '항상 대립면(對立面)과 공존하는 것이 이 세계의 진실'이라는 것을 좀 깊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도덕경 제2장의 유무상생(有無相生,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상대하기에 생겨날 수 있다)이 떠오르는군요. 노자의 생각과 현대의 민주주의나 자유주의가 비슷한 대목이 많습니다.
"그렇죠. 맞습니다."
# 한국은 '민족' 개념이, '국가' 개념에 비해 너무 강해졌다
국가와 민족의 서로 다른 개념을 언급하면서 현재의 정부나 사회에서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진단을 하셨는데 여기에 대해서 좀···.
"예. 국가가 국가로 운영이 될 때 가장 기본적인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했습니다.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 간의 개념은 프랑스혁명 이후에 프랑스에서 정리가 됐죠. 한 국가 안에 있는,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즉 국민이 민족이다 하는 데서 민족국가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국가에서 중요한 단어는 '국가'거든요.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철저히 법률에 의해서 운영합니다. 국가는 법률의 대상이지만 민족은 법률의 대상이 아니에요. 민족이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민족을 관리하는 것이죠. 우리나라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강해져서 우리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범위와 대한민국의 법률과 대한민국의 전통을 넘어서서 거기(민족)에 더 주안점을 두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니 국가 운영에 혼선이 빚어지게 되는 거죠. 국가는 철저히 그 헌법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의 공동체로서 배타적 특성을 갖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대한민국의 헌법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이념을 근거로 하고 그것들을 잘 지키며 따라야 합니다. 이것에 더 철저해져야 하고, 이것에 의해서 민족도 관리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일제 때의 '민족'은 국가 잃은 나라가 매달렸던 개념
-현실적으로, 아주 적확하게 그 문제를 분별(分別)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민족과 국가를 이렇게 나눠 생각하게 되고 그런 것들에 대해 새롭게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이 최근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왜 '민족' 개념이 갑자기 비대해졌는가의 원인을 찾는 일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민족 개념이 중요해졌던 것은 일제 때였기 때문이죠. 당시 우리는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민족이 흩어져 있었기에 민족이라는 개념에 주안점을 둘 수밖에 없었죠. 그 식민지 상황에서는 수치스런 일이지만, 일본이 '국가'였으니 말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개념 갈등 속으로 회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역사로 회귀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고, 그런 역사가 잘 정리되지 않은 채로 살아온 것도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 수립 이전까지 우리에게 가장 적대적인 타자(他者)는 일본이었죠. 일본과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서 생존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국가도 없었던 시절이었고 일본이란 국가 속에서 우리 나름대로 동질성을 유지하고 존속하려면 민족이라는 개념에 기대야 했고 민족이란 개념에 더 철저해야만 독립이란 꿈을 이룰 수 있었죠. 일제 때는 '민족'이 우리의 동질성을 확보하는 유일한 관념이었죠. 그 다음에 문제가 생긴 것은 민족이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으로 나뉘어져 국가로 만들어진 상황 때문입니다. 국가의 현실 인식은 '나뉘어져 국가가 만들어졌다'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민족이 나뉘어진 것이 마치 대한민국의 잘못으로 이해되는 것도 문제가 있으며, 대한민국의 헌법을 넘어서서 '민족'을 중심에 놓는 일은 대한민국에는 맞지 않는 것이죠."
-그 말씀의 핵심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현 정부의 대북 인식이라든가 혹은 북한에 대해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환상들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보입니다.
"그럴 수 있죠. 그런데 북한과는 언젠가 통일이 돼야 하고 함께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념은 사실상 남북한을 통일시키는 데 가장 큰 동력입니다. 민족관념이 약해지면 통일에 대한 바람도 약해질 수밖에 없죠. 그런데 통일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인정해야 될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통일이란 점입니다. 통일을 이뤄야 할 주체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말이죠. 법적 주체인 국가와 국가가 통일을 이루는 것이지, 민족 관념이 통일을 이루는 일은 없거든요. 지금 우리가 통일을 지향하더라도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근거로 해서 통일로 나아가야 통일에 대한 효율성도 커진다는 거죠. 대한민국이 통일을 할 주체인데, 대한민국 주체를 약화시키고 민족 관념을 등장시키면 통일을 해나갈 법적 주체의 통일 활동력을 약화시켜 버리는 거죠. 오히려 통일에 더 방해가 된다고 봐요."
# 적폐청산이 아니라, 수평적 레벨의 정치청산일 뿐
-지금 우리는 한국 역사의 변곡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 이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는데 민주화의 주체세력이라 할 수 있는 운동권이 주도하는 정부가 등장해서 과거에 쌓인 적폐를 청산하는 일을 진행해 왔습니다. 적폐청산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적폐청산은 다른 모양으로 정권마다 다 있었습니다(박근혜 정부 때 적폐청산이란 말이 나왔죠).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과거에 있었던 폐단들과의 전쟁은 항상 있어왔죠. 적폐청산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건국세력이 건국을 이루면서 낳은 폐단을 산업화세력이 일소하거나 극복하면서 나라가 발전하고, 산업화 세력이 낳은 폐단을 민주화 세력이 극복하면서 또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건국세력은 산업화세력에 의해 도태되고, 산업화세력은 민주화세력에 의해 도태되면서 국가의 선한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진화하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민주화세력을 도태시킬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민주화세력이 시도하는 적폐청산은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발전의 새로운 어젠다를 등장시키면서 하는 적폐청산이 아니라 수평적 레벨에서 하는 정치투쟁적 성격이 강하죠.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적폐청산을 하는 사람들이 적폐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행동이나 결과를 만들어내죠. 그래서 "이게 나라냐?"라면서 등장했다가 "이건 나라냐?"라는 소리를 듣는 거죠. 언론을 바로 세운다면서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바꾸기만 합니다. 이것은 적폐청산이 아니라 사람청산, 정치청산으로 귀결되어 진정한 업그레이드를 위한 적폐청산으로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
-반대편 정파를 제압하는 데 적폐청산을 쓰고 있다는 말씀인지요.
"지금은 그렇게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낙하산 인사를 했던 것이 적폐죠? 적폐청산을 하려면 낙하산 인사라는 그 자체가 없어져야 적폐청산이죠. 그런데 이 낙하산을 저 낙하산으로 바꾸는 것은 적폐청산이 아니죠."
# 세계 일류에 닿아야 진정한 선진국이 된다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국이란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일등국가와 일류국가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겁니다. 우리는 한계에 갇혔다. 한계에 갇혔다는 이 말을 ‘중진국 함정에 갇혔다’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중진국 최상위 레벨입니다. 이 레벨이면 보통 민주화가 완성됩니다. 중진국 최상위 레벨에 도달한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은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길밖에 없어요. 선진국으로 올라선다는 의미는 '선도력을 가진 높이'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선도력을 가진 나라가 선진국이죠. 선도력은 필연적으로 창의성과 관련이 됩니다. 창의성은 가장 앞선 것이면서 고유한 것이면서 유일한 것입니다. 고유하고 유일한 것으로 어떤 힘을 가지는 것, 그것을 우린 일류라 말합니다. 그리고 고유하고 유일한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도 하는 것, 이것을 함께 경쟁해서 더 잘하는 것, 이것을 일등이라 말합니다. 중진국 상위레벨에 도달한 지금, 도처에 일등들은 많습니다. 세계일등 말입니다. 세계에 고유한 것, 유일한 것. 아직 우리가 이걸 못 갖춘 거죠. 아직 우리는 일류에 닿지 못한 것입니다. 적폐청산이 됐든 뭐가 됐든,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진영의 생각' 을 대변하고 있으면서 자기 삶을 산다고 착각
-그게 창의성 하고 관련있는 거죠? 국가나 국민의 창의성을 더 열어주는 사회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인지요? 독립성과 종속성은 어떤 개념입니까.
"독립(獨立)은 독자적인 힘으로 우뚝 서는 걸 말합니다. 독립적 사고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가 쌓은 지적 역량으로 내 말을 하는 것이 독립적 사고죠. 내가 쌓은 지적 역량으로 내 생각을 하는 것. 그런데 독립적이지 않으면, 집단이 공유한 생각을 내 생각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생각을 내 생각으로 착각하죠. 정지되어 있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 어떤 진영에 갇혀서 진영의 생각을 대변하고만 있으면서 자기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우리나라는 사고나 정치행위가 집단적이며 오직 ‘우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진영싸움만 하는 것이지 자기 독립적인 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 독립적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독립적인 말과 독립적인 사고는 항상 새로운 빛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집단적인 생각은 멈춰있지만 자기 욕망은 개방적이에요. 새로움은 독립적 주체로부터 나오지 집단적 우리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집단적 사고를 하는 습관으로 진영에 갇혀서, 진영을 대변하는 삶을 자기 삶으로 착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야만 한 단계 상승한 세계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정파적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은 독립적인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우리'에 갇혀 있는 꼴이군요. 언론도 그 프레임에 갇혔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이런 건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일 듯합니다.
"극복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삶의 습관이 이미 진영에 갇혀 있는 채로 몇 십년 살아왔으니까요. 진영을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독립적 주체가 양성되지 않았어요. 언론도 전부 진영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진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 언론인이시니 직접 되물어봐도, 아마 어렵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존재기반을 진영에다 두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면 자기 존재가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삶의 틀을 극복하는 일이 쉽겠습니까. 여기서 벗어나려면 사회가 극단적인 충격을 받든지, 한계에 갇힌 상황을 훌쩍 건너뛰어 더 높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방향을 제시하고 거기에 헌신할 수 있는 매우 수준 높은 지도자를 갖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상당히 어렵죠." <다음면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