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 개원 연설...브렉시트 시한까지 일정 빠듯
영국에서는 통상 의회 회기가 시작될 때 여왕이 참석하는 개회식을 연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53년 즉위한 이후 거의 매 회기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리는 개회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여왕은 정부가 마련한 발표문을 읽어내려간다. 다음해 주요 입법계획을 발표하는 일종의 개원 연설로, 개회식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이른바 '퀸스 스피치(Queen's speech·여왕의 연설)'다.
영국 정계를 뒤흔든 것이 바로 이 '퀸스 스피치'다. CNN 등 외신에 따르면 존슨 총리는 28일(현지시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오는 10월 14일에 연설해줄 것을 요청했다. 여왕은 이 요청을 수락했다. 이에 따라 9월 3일 회기를 시작하는 영국 의회는 여왕 연설이 발표되는 10월 14일까지 한 달가량 정회된다. 그 날짜까지는 의회가 굴러갈 수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날짜다. 예상대로 10월 14일 새로운 회기가 시작되면 브렉시트 시한인 31일까지는 불과 20여일이 남는다. 주말을 제외하면 딱 2주밖에 시간이 없다. 더구나 10월 17~18일에는 EU 정상회의가 열린다. 브렉시트 방향을 정하기에 내부적으로 논의할 만한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부족한 것이다.
거기다 존슨 총리는 퀸스 스피치 날짜를 왜 10월 14일로 정했는지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야당을 비롯한 정치권에서 존슨 총리가 '노딜'을 밀어붙이기 위해 의회 정회 카드를 꺼낸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다. 정회의 명분을 만들기위해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여왕을 끌어 들였다는 데 대한 분노도 적지 않다.
◆노딜 브렉시트 우려 고조...증시·파운드화 약세
존슨 총리가 벼랑 끝 전술을 꺼낸 데는 두 가지 목표가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당초 노동당 등 야당은 개회 이후에 '노딜 브렉시트'를 저지하는 법안을 제출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퀸스 스피치까지 장기 정회되는 만큼 법안을 통과시키기에 시간이 많지 않다. 10월 14일 의회가 재개되면 총리 불신임안을 제출할 가능성도 있지만 브렉시트 시한을 며칠 앞두고 있는 만큼 정치적 무리수가 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EU를 압박하기 위한 카드라는 해석도 나온다. 당초 브렉시트 시한은 3월 29일이었다. 존슨의 전임자인 테리사 메이 당시 영국 총리는 브렉시트 시한을 며칠 앞두고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브렉시트 시한을 미뤄 노딜 브렉시트 상황을 막았다. 존슨 총리는 현재 브렉시트 합의안의 핵심 쟁점인 '안전장치(백스톱·backstop)' 폐기와 브렉시트 합의문 재협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노딜 브렉시트를 불사하겠다는 존슨 총리와 달리 EU는 최대한 노딜 브렉시트를 막겠다는 입장이다. 존슨 총리의 정회 카드에는 브렉시트 시한까지 최대한 EU를 압박해 원하는 바를 이끌어낸다는 뜻이 담겼다는 것이다. 물론 10월 말까지 영국과 EU가 새로운 이탈 조건에 타협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다만 백스톱에 대한 입장차가 여전한 만큼 교착 상태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브렉시트와 관련,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 등은 '노딜 브렉시트'가 영국의 결정일 뿐 EU의 뜻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노딜 브렉시트를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지만, 재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할 경우 그 책임은 영국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존슨 총리는 의회 일정을 감안할 때 브렉시트 시한까지는 총리직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입장을 이미 밝힌 상태다. 블룸버그통신은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가 치러진 3년 전과 비교할 때 파운드화 가치가 18% 하락했다고 전했다. 노딜 브렉시트 우려가 높아지면서 유럽 증시의 주요 지수도 대부분 하락했다. 영국 런던 증시의 경우 내수주 중심의 FTSE250지수는 이날 전날보다 0.69% 내린 1만9202.99에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