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대신 미국 손 잡고 싶어 하지만...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강경파로서 일찌감치 '영국의 트럼프'라는 별칭을 갖게 된 존슨 총리는 브렉시트 시한을 70여일 앞두고 EU에 연일 강경 발언을 내놓고 있다. 19일에는 총리실을 통해 EU에 "브렉시트 시한인 10월 31일을 기준으로, 현재 적용되는 '이동의 자유'가 종료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통지했다.
현재 28개 EU 회원국의 국민들은 영국 국경에서 검문·여권 검사 면제 등의 혜택을 받고 있다. 영국 정부의 새로운 방침대로라면 10월 31일 이후 업무나 학습 등의 목적으로 영국에 거주하는 EU 회원국 국민들은 비자를 따로 신청해야 한다. '이동의 자유'가 EU와 영국 간 브렉시트 협상에서 주요 쟁점 중 하나인 점을 감안하면 거센 반발이 불가피하다.
하드 브렉시트(영국과 EU 간 완전 결별)가 가까워지자 경제적으로도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영국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 분기 대비 0.2%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경제 5위권인 영국의 GDP가 감소한 것은 2012년 4분기 이후 6년여만에 처음이다. 영국은 제조업과 건설업, 농업 등이 역성장하는 가운데 3분기에는 GDP 감소로 경기침체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재 영국이 믿는 구석은 '미국'이다. 존슨 내각은 미국 정부를 사로잡기 위해 일찌감치 물밑작업에 들어갔다. 일단 지난 7일 리즈 트러스 영국 국제통상부 장관과 도미닉 랍 영국 외무장관을 미국으로 보내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을 만나게 했다.
노딜 브렉시트(영국이 아무런 합의없이 EU를 이탈하는 것)를 불사하겠다고는 했지만 브렉시트 이후 경제·무역 관련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미국도 대화의 장을 열어 두었다. 최대한 빠른 시점에 새로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할 준비가 돼 있다는 말로 영국을 안심시켰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가 그간 보여준 행보를 염두에 둘 때 이런 청사진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할 경우 존슨 내각은 대부분의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일시적으로 면제한다고 했으나 미국이 이익으로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는 탓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미국과의 단합을 꿈꾸지만 미영 간 특수 관계를 고려할 때 '노딜'의 경우 파급 효과가 폭발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시험대 오른 경제정책, 트럼프도 힘든데...
이런 해석은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정책이 시험대에 올라 있다는 전제 하에 나온 것이다. '제 코가 석자'라는 얘기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미국발 경기둔화 우려를 하루 빨리 해소하는 게 당면 과제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정책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른 나라의 부양 속도에 맞추려면 연준이 최소 1% 포인트 이상 금리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시장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문제는 연준이 아니라 미·중 무역전쟁과 한국·일본 대상의 군사분담금 인상 등 트럼프 대통령의 과도한 보호주의 정책에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20일 노동자 급여나 주식 등 자본소득 관련 세금의 인하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항상 검토했던 정책이라며 경기침체 우려에 따른 부양책으로 비춰질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다만 현지 언론들은 불황 우려를 진정시키고 경기를 진작하기 위한 카드로 보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행정부가 급여세를 포함, 부유층 투자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만한 자본소득 관련 세율 인하 계획도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브렉시트는 트럼프 행정부에게 놓인 또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G7에서 존슨 총리와의 만남'에 기대감을 나타냈지만 존슨 총리가 브렉시트 방향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미·영 양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얘기다.
미·중 통상 갈등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미·영 갈등까지 겹치면 글로벌 통상에 악영향이 불가피하다. 미국과 영국은 정치를 넘어 군사적으로 강력한 동맹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RIIA)의 유럽 프로그램 책임자인 토마스 레인즈는 "브렉시트를 앞둔 시점에서 영국은 기후변화·국제 무역·이란 핵거래 등 주요 이슈에 대한 입장과 관련, 미국보다는 EU에 훨씬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영국이 미국과 유럽 사이에서 불편을 겪을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