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들으며 쓴 소설, 읽으니 그 음악이 들렸다

2019-08-2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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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선율로 찾아낸 원수에게 복수한 보르헤스의 주인공

목소리로 20년 전 약속을 상기한 나보코프의 등장인물

[마르케스]

 
 
 

 


​<책에서 책으로> 13. 소설가들의 음악 이야기


“줄곧 한 음악만 틀어놓고 소설을 썼더니 소설에서 그 음악이 흘러나오더라는 사람들이 있더군.”

이런 ‘뻥’ 같은 이야기를 천연스레 한 사람은 1967년 발표한 <백년의 고독>으로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다. 음악이 흘러나왔다는 소설은 1975년 출판된 그의 여섯 번째 장편 <족장의 가을>, 이 소설을 쓰면서 그가 줄곧 들었다는 음악은 헝가리 출신 작곡가 벨라 바르토크(1881~1945)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다. 마르케스의 이 이야기는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에 나온다.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의 아주 젊고 부지런한 음악가 둘이 나의 그 소설과 바르토크의 그 피아노 협주곡 사이에 놀랄 만한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해서 내게 커다란 놀라움을 선사했다. 내가 이 소설을 쓸 때 그 음악을 줄곧 들은 것은 확실하지만, 내 글에 그 음악이 드러나 있을 정도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마르케스는 <족장의 가을>을 쓴 4년 동안 바르토크의 이 음악만 줄곧 들은 이유에 대해 “이 음악이 나에게 아주 특별하고 조금은 특이하기까지 한 정신 상태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음악에 대한 관심이 성게의 가시처럼 다양한 나는 유튜브로 이 음악을 들으면서 마르케스가 느꼈던 특이한 정신 상태를 경험해보려 했으나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단지 “아름다운 음악이며, 2악장 아다지오는 서정적이었고, 3악장 알레그로 비바체는 끝으로 갈수록 격렬해 약간 흥분될 정도였다”는 평범한 감상문을 남길 수는 있다.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발사, 악화한 한·일 관계, 청문회를 앞둔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추문 등등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신경을 긁는 오만가지 지저분한 이야기에서 벗어나려고 음악 이야기를 쓰려는데 생각만큼 되지 않는다. 그래도 참을성을 갖고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을 위해 계속 써보련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마르케스를 비롯해 대부분의 현대 남아메리카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 한 토막을 남겼다. “가족을 살해한 원수가 깊이 사라져 복수의 길을 놓쳐버린 한 사나이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뒷골목을 걷다가 우연히 원수를 찾아내 가슴 깊이 칼을 찔러 넣었다. 그날 밤 그를 원수에게로 이끈 것은 원수만이 뜯을 수 있던 기타의 구슬픈 선율이었다”라는 내용이다. 이 짧은 한 토막 이야기를 읽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뒷골목 풍경이 떠올랐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격정과 열정이 담긴 탱고가 들렸다고 말하면 글을 멋지게 쓰고 싶어 하는 나의 부질없는 ‘과장’인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의 자전적 소설 <재능>에도 음악의 귀가 밝은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는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 소파에 누워서 오페라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시곤 했어요. 한번은 아버지가 그 자세로 누워 계셨는데, 옆방에 누군가 들어와 엄마랑 이야기한 적이 있었죠. 그런데 아버지는 내게, ‘어 이 목소리는 바로 그 사람, 20년 전 체코의 칼스바트에서 만났던 사람의 목소린데, 그가 언젠가는 날 만나러 오겠노라고 약속했었지’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버지의 청각은 그 정도였어요.”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도 소설에 악보를 그려 넣을 만큼 음악에 조예가 깊은 작가였다. 하지만 쿤데라 소설 속의 음악에 대한 서술은 너무 진지해서 한 토막씩 옮기기엔 벅차다. 다른 기회에 소개할 수 있기를 기다려야겠다.)

보르헤스도 좋고, 나보코프도 좋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 솜씨, 사실을 뻥처럼, 뻥을 사실처럼 늘어놓는 이야기 솜씨는 아무래도 마르케스가 최고이지 싶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한밤중 공동묘지에서 바이올린을 켰는데, 그럴 때면 무덤 속의 시체들이 감동해 울었다.” 무덤 속 시체를 울릴 정도인 아버지의 바이올린 솜씨에 어머니가 넘어갔으며, 그래서 자기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다.

음악 이야기를 쓰고자 했지만, <족장의 가을> 이야기도 안 할 수 없다. 마르케스의 작품 중 가장 저평가된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 이 소설은 1992년에 한국어 번역이 나왔으나 절판된 지 오래다. 영어로 읽을까 했으나 긴 문장이 우리말로도 읽기 쉽지 않다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못지않다고 해서 포기했다.

여기저기 검색해보니 독재자 이야기다. 남미 한 나라, 군인 출신 독재자(족장)가 반대자는 물론 가족과 최측근 참모(실세)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기업에 이권을 주는 대가로 거액을 뜯고, 수없이 많은 여인과 황음(荒淫)에 빠지고, 종교를 탄압하고, 처형된 자들의 인육으로 파티를 벌이고, 그러다가 다른 독재자에게 밀려 권좌에서 쫓겨나고···.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1936~ )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염소들의 축제> 줄거리와 흡사하다. 요사의 소설에서 도미니카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1891~1961)는 마르케스의 족장과 똑같은 악행을 벌이다가 암살된다. 하지만 암살자들은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트루히요의 아들에 의해 잔인한 고문을 받다가 끔찍하고 무참히 세상을 떠난다.

웃기는 건, 독재자를 미워한 공통점 때문인지 아홉 살 아래 요사와 매우 친밀히 지내던 마르케스가 어느 날 요사의 스웨덴 출신 부인에게 수작을 부리다가 요사에게 눈에 멍이 들 정도로 한 방 얻어맞았다는 거다. 마르케스는 우리 식으로 평가하면, 성에 관대한 게 아니라 지저분한 구석이 없지 않은 사람이다. 10대 초반부터 사창가를 드나들었으며, 그때의 이야기는 만년에 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 녹아 있다.

더 웃기는 건, 독재자를 그렇게도 비난했던 마르케스가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와 깊은 교분을 맺고, 하바나에서 살았으며, 카스트로의 정치·외교 사절 역할을 맡았다는 점이다. 작가와 작품은 다를 수 있다고 하지만, 오늘날의 남아메리카 작가들 가운데는 이런 이유로 마르케스를 낮게 보는 사람이 꽤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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