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광복절입니다. 일흔 네 번의 광복절 중에서 아마도 이날만큼 각별한 날도 드물 것입니다. 지금 일본과 겪고 있는 갈등은 해방 이래 가장 격할 뿐 아니라, 한·일 관계의 미래가 걸린 중차대한 시험대이기도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내놓을 경축사에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 발언 하나하나가 당면한 위기를 푸는 해법이며 나라의 내일을 결정짓는 방향타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모이는 자리마다 ‘문 정부 외교’가 단골메뉴입니다. 청와대도 부쩍 귀가 간지럽지 않았는지요.
본지 편집국 기자들과 논설실의 필진은 ‘광복절에 대통령에게서 듣고 싶은 말들’에 대해 다양한 오피니언 리더들의 의견을 청취했고, 추출한 의견들을 여러 차례의 내부 논의를 거쳐 여섯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일본을 향해 불필요한 자극을 하지 마십시오. 한·일이 각각 화이트리스트에서의 제외를 밝히며 서로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발언과 행동의 실리를 고려해야 합니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결기를 가지되 냉정하면서 또 근본대책까지 생각하는 긴 호흡을 갖자고도 했습니다.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 남북 평화경제로 일본을 따라잡겠다’고 한 지난번 발언은 ‘문 정권의 한반도 구상이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서이냐’라는 부적절한 오해를 낳은 바 있습니다. 모두가 예민하게 듣고 있을 광복절 기념사를 우리 국민들만을 위한 대내용(對內用) 언급으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셋째, 경제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손해가 비할 나위없이 크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참에 우리가 일본에 종속적으로 의지해 왔던 산업 사슬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경제독립을 꾀하겠다는 취지는 백번 옳으나, 문제는 기회비용입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디지털경제 생태계에 매진하던 동력이 분산되고, 각종 리스크들이 기업들의 의욕을 꺾을 수 있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돈을 버는 일에 전력을 쏟아야 할 기업들이 정치적인 슬로건 아래 등 떠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일본 또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버티기나 굴복의 게임은 한쪽의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양쪽의 패배를 낳을 뿐입니다. 국민들이 그런 싸움의 무익한 지속을 원하고 있을까요. 총선에서의 정파적인 승산을 염두에 둔 발언들이 국민들을 어이없게 만든 기억도 있습니다.
넷째, 대북관계와 대미관계도 심각합니다. 북한과 미국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독립국가’의 위상을 견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은 최근 잇단 미사일 도발과 관련해 “미국 대통령까지 주권국가로서의 우리 자위권을 인정했는데 도대체 남조선 당국이 뭐길래 중단 촉구니 뭐니 하며 횡설수설하는가”라고 말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이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미사일 발사를 언급하면서 “어느 나라나 다 하는 작은 것”이라며 “미국의 위협이 아니다”라고 말한 점을 의식한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소년 시절)임대아파트에서 114달러의 돈을 받아내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 달러(방위비)를 받아내는 것이 더 쉬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언행은 한국의 위상과 최근 외교 전반에 대한 국민적 회의감을 부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에 관해 우리의 입장과 그 어처구니없는 발언들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모른 체하는 것은 결코 관용이 아니며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무시할 수 있는 내용을 넘어서 있습니다.
다섯째, 대통령은 이 광복절을 기해 진짜 국민적 자존심을 되찾도록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일본에 치이고, 미국에 돈을 뜯기고, 북한에 미사일 협박을 당하고, 러시아 공군기의 출몰에 놀라고, 중국의 사드 재협박에 가위눌리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독립국가라면, 국가지도자가 어느 대목에 어떻게 발언하고 제대로 대응해야 하는지 명쾌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외교적 선택들이 뒤틀리고 꼬여 무력감과 혼란과 위기감을 느끼는 현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 발언이 대통령에게서 나와야 국민들의 불안이 줄어들 것입니다.
여섯째, 이 나라가 당면한 소용돌이가 단순히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2019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라는 인식도 있습니다. 한·미·일과 북·중·러로 ‘이념 안보’의 라인을 형성하던 전시대의 대결상황이, 트럼프의 미국을 중심으로 한 복잡한 ‘글로벌 정글’ 게임으로 변모하면서 한반도가 그 난기류에 봉착했다는 지적입니다. 이 ‘빅체인지’의 시대와 더불어 빠른 발전 속도로 달려온 한국의 경제력에 대한 견제와 국가 간의 관계 조정이 불가피해졌다는 거시적 당위론도 등장합니다. 이런 글로벌 역학과 국가적 성장통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냉철한 철학 또한 국민에게 전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17년과 201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 대통령은 상당 부분을 대북 문제에 할애해 평화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올해는 최소한 저 여섯 가지 문제들을 짚어주기를 바라는 목소리들이 시정(市井)을 떠돌고 있습니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