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문화행각] 추사 세한도와 자전거 탄 소녀가 공존하는 이유

2019-08-0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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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애의 '기억의 공간'展, 7일부터 장은선갤러리서…시간과 기억을 해체한 화가의 눈



1953년 27세였던 헨리는 어린 시절부터 앓던 간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측두엽 절제 수술을 받는다. 당시엔 정신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뇌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이 새롭게 도입되고 있었다. 정신질환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때였는지라, 이런 수술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 문제는 몇 명의 환자가 뇌 절제술로 효과를 보기도 했다는 점이었다.

헨리도 그랬다. 뇌에 있는 해마를 제거하자 발작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기억이 30초 이상 지속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방금 나눴던 대화, 방금 보았던 사물, 조금 전에 만났던 사람들조차도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30초 이상 기억할 수 없는 남자. 헨리는 죽을 때까지 과거가 없는 오직 순간만을 살았던 '기억없는 사람'이 됐다.

우리가 오래 기억을 할 수 있는 것은 뇌 속의 어떤 부위에 그것이 저장되기 때문이다. 기억은 두 가지 형태로 나뉘는데 하나는 서술적 기억이며 다른 하나는 절차적 기억이다.

서술적(declarative) 기억은, '서술되는 명제로 표현될 수 있는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어렵지 않다. 이야기와 지식이다.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들(이야기)은 에피소드 기억이라 하고, 책이나 교육을 통해 습득되는 것들(지식)은 시맨틱(semantic) 기억이라 부른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대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거나, 공부하여 습득한 것이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다'는 기억은 에피소드 기억이고, '우리 민족의 시조는 단군'이라는 기억은 시맨틱 기억이다.

이런 기억들 말고 조금 다른 기억이 있다. 그것을 절차적 기억(procedual)이라 부른다. 이 말도 어려워 보이지만 어렵지 않다. 우리가 흔히 노하우라고 부르는 '방법'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절차적 기억이다. 아주 어린 시절 배웠던 자전거 타는 법을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다시 탔을 때 쉽게 기억해내는 것은, 절차적 기억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를 하는 절차를 기억해내는 일은, 인간 행위 질서를 관장하는 동적인 기억으로 존재하는데, 위의 서술적 기억들과는 다른 뇌부위에 저장된다고 한다. 기억 저장소가 다른 셈이다.

아까 '30초 남자' 헨리의 경우를 봐도, 인간이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기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다면 공간 밖에 인지할 수 없다. 시간이 전혀 없는 공간은, 헨리의 30초 기억보다 훨씬 끔찍할 것이다. 삶의 인식 자체가 성립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간을 인식하는 것은, 시간을 넘어서 저장하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간이 0인 스틸사진의 경우는 어떻게 우리가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사진에는 시간이 없지만, 인간은 그 사진 속에 기억을 집어넣어 그 공간을 기억 속의 공간으로 번역(해석)해 낸다.

인간의 기억은, 공간들의 내부를 아무렇게나 구성하지 않는다. 기억의 폴더들이 공간을 나눠서 분류하고 구분하여 기억이 주장하는 논리에 맞게 배치를 한다. 폴더 하나하나가 저마다 맥락이 맞게 구성된다는 얘기다. 기억의 폴더들이 헷갈려 공간이 섞이면, 시간적 배열에 차질을 빚는다. 어떤 에피소드가 있어야할 자리와 어떤 지식이 있어야할 자리, 또 어떤 노하우가 있어야할 자리가 정해져 있다는 얘기다. 시간의 가지런한 배치가, 기억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강력한 규율이다.
 

[Unknown Time, 조현애 작 (2019)]



이 당연한 기억질서에 충격을 가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서양화가 조현애 작가다. 그는 기억 속에 '문법'처럼 촘촘히 존재하는 '시간'을 해체해서 공간을 낯설게 한다. 그가 오랫 동안 이런 작업을 해온 까닭은 뭘까. 시간 속에 배열되는 기억의 가지런함이란, 우리가 시간 속에서 살면서 시간을 관리하는 의식의 강박증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의식의 끈을 놔버린 초(超)의식과 무의식에 존재하는 '시간' 혼재의 공간에서 탐미(探美) 행각을 벌인다. 이 풍경은 그가 창조해낸 자의적인 인위(人爲)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계 저 안쪽에서 뒤엉킨 채 쿨렁이고 있는 기억의 진면목일 수도 있다.

그의 한 작품(2019. Unknown time)에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등장한다. 1800년대에 유배를 간 추사가 고독 속에서 그렸던 그림이다. 주위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당시의 심경을 드러낸 정신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낯익은 그림을 하단에 배치한 그는, 풍선기구처럼 가볍게 부유하는 거대한 분홍 꽃송이를 중심에 띄워 놓았다. 꽃송이는 꽃자루로 가는 허리 쯤에 슬쩍 부러져 이미 낙화한 뒤 떠오른 것 같다.

꽃자루 한쪽에는 시계의 복잡한 얼개를 연상케 하는 것이 반쯤 지워지면서 표현되어 있다. 이 시계의 회전원리로 보자면, 나팔꽃처럼 생긴 꽃송이는 시침과 분침이 결합된 듯한 느낌을 준다. 위로 갈수록 짙어지는 하늘에는 세한의 눈이 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눈이 그친 맑은 하늘에 별들이 돋은 것 같기도 하다. 오른쪽 하늘 상단 쯤에 서양의 어떤 복합 건물인 듯한 것이 아주 작게 들어 앉아 있다. 왼쪽 하단 쯤에는, 또렷하고 정밀하게 맥고모자를 쓴 소녀가 치마를 입은 채 붉은 자전거를 타고 하늘 저쪽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다.

이 그림 속에 배치된 것들은 각기 다른 기억의 폴더에 저장되었던 것들이 무의식의 주머니 속에 들어와 뒤섞이면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재배치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추사가 사무치게 보고 있던 세한도는 화가가 어느 경로로인가 학습한 풍경의 기억이다. 저 소녀는 자신일 수도 있고, 그가 추적하는 다른 누군가일수도 있다. 거대한 꽃의 시간은, 기억을 흔들어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풍경을 제시한다.

그의 그림들이 확고한 '굳은 공간'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허공이라는 비교적 자유로운 유동공간을 설정하고 있는 것 또한, 기억이 소속되어 있는 답답한 폴더를 해체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 자전거 타는 사람이 자주 표현되는 것은, 기억 중에서 오래 가면서도 강렬한 '절차적 기억'이 무의식에서 자주 돌출되기 때문일지 모른다.

조현애의 작업들이 전통에서 차용되거나 입력된 기억들과 현대적 혹은 서구적 모티프들이 함께 표현되는 걸 즐기는 까닭은, 충돌하는 시간들의 모순들에 비하여 서로 다른 기억들의 요소들이 새롭게 조응하는 풍경은 뜻밖에 그것들이 조화롭게 참신한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하기 때문이 아닐까. 착종된 듯한 기억들은, 서로를 분발시켜 오히려 새로운 생명성을 확보하는 듯 하다.

때로 그 그림들에서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고집'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겠지만, 내겐 다르게 다가온다. 달리의 기억은 치즈처럼 잠깐 늘어진 기억들에 대한 권태와 진저리에 가깝지만, 조현애의 기억은 더 많은 근원적이고 사변적이고 비현실적인 기억들을 동시 소환하고 새로운 시계 위에 그 공간을 째각거리며 돌아가게 한다. 이쪽이 더욱 진행된 '시간 감각'을 구사하는 놀이로 여겨지기도 한다. 굳이 그의 기억을 엿보기 위해 '해석'에 끙끙거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기억들의 길 잃은 회랑을 돌아보는 즐거움이면 충분하다. 시간에 치여사는 우리를 잠깐 석방시키는 기억 해체의 진지함으로, 그 놀이는 그야 말로 시간 가는 걸 잊게 한다. 
 

[조현애의 작품]



[전시메모] 조현애 초대전 '기억의 공간'(2019.8.7~8.24), 장은선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작가메모] 조현애, 여성화가, 홍익대 미술대학원 졸업, 한국미술협회 및 세계미술협회 임원.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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