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시샘]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엔 유신항쟁 운동권 배신자가 울고 있다

2019-07-24 16:15
  • 글자크기 설정
[빈섬의 시샘] 황지우 읽기
 

[1979년 10월 부마항쟁 학생시위대들.]



오 망국은 아름답습니다 인간세 뒤뜰 가득히 풀과 꽃이 찾아오는데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야유회 갔습니다 우리 세상은 국경에서 끝났고 다만 우리들의 털 없는 흉곽에 어욱새풀잎의 목메인 울음 소리 들리는 저 길림성 봉천 하늘 아래 풀과 꽃이 몹시 아름다운 채색으로 물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른 체 했습니다 우리는 불면의 잠을 잤습니다 지친 사람들은 꿈을 꾸고 흉몽의 별똥들이 폭죽 쏘는 태평성대 국경 근처 다른 나라의 방언을 방청한 풀과 꽃이 자꾸 어떤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그 신호의 푸른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며 우리 허리에 걸친 기압골이 남단으로 내려갔습니다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1'


어서 가라
이 쑥밭의 땅에서
괴로워하는 쑥굴헝 가시 덩굴 헤치고
그대의 어린 가족들 데리고
어서 가라
저 만수산 상상봉으로
세세손손 짙푸른 넝쿨을 잡아당겨
그대의 환청 속에
수천의 조종을 울리는
저 만수산 어서 가라
이 쑥밭의 땅에서
가시덩굴 쑥굴헝 헤치고
어린 것들 아내와 노모를 데리고
어서 가라
이곳에 더 이상 씨 뿌리지 말고
이곳에 더 이상 아이 낳지 말고
이곳에 더 이상 사람 묻지 말고
더 이상 노래하지 말라 오 살균된 땅에
더 이상 벌레 울음 소리 들리지 않으므로
더 이상 울지 말라 울지 말고
어서 가라 초토를 버리고
이곳의 온갖 이름과 언약을 버리고
납세고지서를 주민등록증을 버리고
오 화해할 수 없는 이 지상을
벗어나가라
밤마다 그대 도려낸 흉곽의 응달에
세세손손 푸른 넝쿨 내리고
세세손손 맑은 물줄기 타고
그대의 환청 속에 수천의 조종으로
떠내려오는 만수산으로
어서 가라
어서 가라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2'


본시 소생은 무지몽매 고집불통의 영악한 넝쿨이오 더러울수록 따뜻한 이 두엄 땅에 뿌리박고 내일이 없는 하늘 아래 갈갈이 찢어져 시시로 청풍 나뭇잎 소리에 입속말을 나누며 킥킥거리며 푸른 등꽃을 피운 적도 있고 갯땅쇠 땅 개새끼 마을을 불질러 그놈들을 사슬로 묶어서 삼복 더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녔고 다만 절개 없는 놈들 그들의 변절을 용서했소 용서한 죄 밖에 없소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3'

오 넝쿨이여
핏줄이여
쇠사슬이여

산 전체가 뫼똥이다
거기까지 거적때기에 질질
끌려간 자국이 나 있다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4'




■ 황지우의 이 시는 작곡가 이건용에게 영감을 줬다. 국악 관현악곡 '만수산 드렁칡'은 일제 강점기 만주땅에서 고난을 헤치며 살아가던 우리 겨레의 애환을 담았다고 한다. 연작시1에서 길림성 봉천땅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하지만 당면한 세상의 모순과 치열하게 불화하던 20대 황지우가, 만주 벌판의 우리 겨레를 굳이 호명한 까닭은 뭘까.

길림성 봉천땅은 이 시의 불온성을 흩기 위한 일종의 성동격서(聲東擊西)인 것은 말할 나위 없다. 만수산은 개성부성의 서문 밖에 있는 산으로 고려 권력들이 뒷배로 삼던 송악산의 다른 이름이다.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하여가(어떠하리의 노래)'를 부를 때 송악산이라 하지 않고 굳이 만수산이라 한 것은 그 이름에 들어있는 만수(萬壽) 때문이다. 만수무강의 만수다. 만수산 드렁칡이 저렇게 얽혀 있으니 만수를 누릴 수 있듯, 포은 형님도 뜻을 꺾고 뭇사람과 비슷하게만 얽혀주면 내가 10000세의 100분의 1은 누리는 것을 보증하겠다는 말이다. 정몽주가 상황을 판단해보니, 저 회유에 넘어가더라도 100세 보험은 커녕 지금껏 쌓아온 순수한 네임밸류만 먹칠하는 치욕만 얻을 것이란 걸 파악했다. 마치 이방원을 조롱하듯 나를 1년에 한번씩 죽여서 그 백세 동안 100번을 죽여봐라, 내 뜻을 바꿀 것 같은가,로 응수한다. 이 기개는 철퇴 아래 선죽교의 핏덩이로 흐르고 말지만, 권력자의 강력한 회유와 그 회유에 대한 촘촘한 조롱이 담긴, 이 역사적 담판의 긴장감은 황지우에게도 강인한 인상을 줬던 것 같다.

'만수산 드렁칡'은 만주 독립운동도 아니고 고려의 자존심 예찬도 아닌, 20세기말의 민주화운동권과 공안당국 간에 벌이던 회유와 겁박의 취조현장을 긴급한 리포트처럼 거친 방식으로 휘갈겨놓은 시다. 만수산 드렁칡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풀어쓸 수 있는 고문 취조 전문가의 '회유'의 멘트들이다. 드렁칡은 나무를 타고 엮으며 올라가는 보통의 칡과는 달리, 골짜기의 지형을 타고 저희들끼리 얽고 엮으며 번잡하게 뒤엉키는 '산두렁'의 기어가는 칡넝쿨이다.

오 망국은 아름답습니다 인간세 뒤뜰 가득히 풀과 꽃이 찾아오는데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야유회 갔습니다 우리 세상은 국경에서 끝났고 다만 우리들의 털 없는 흉곽에 어욱새풀잎의 목메인 울음 소리 들리는 저 길림성 봉천 하늘 아래 풀과 꽃이 몹시 아름다운 채색으로 물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른 체 했습니다 우리는 불면의 잠을 잤습니다 지친 사람들은 꿈을 꾸고 흉몽의 별똥들이 폭죽 쏘는 태평성대 국경 근처 다른 나라의 방언을 방청한 풀과 꽃이 자꾸 어떤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그 신호의 푸른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며 우리 허리에 걸친 기압골이 남단으로 내려갔습니다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1'


만수산 드렁칡1은 악마의 노래다. 망국과 길림성 봉천, 그리고 국경 때문에 독립운동을 읊은 것으로 연상케 해놓았지만, 봉천은 1975년 캠퍼스를 옮긴 서울대가 있는 곳이다. 풀과 꽃은 민주화 투쟁을 벌이는 남녀 학생들이고 망국과 인간세 뒤뜰과 털없는 가슴팍에 어욱새 풀잎 비명소리 들리는 곳은, 폭압과 고문과 테러의 풍경들이다. 폭죽은 최루탄이고 다른 나라의 방언은 외신에서 들어오는 뉴스들이다. 허리에 걸친 기압골이 남단으로 내려갔다는 건, '허리하학(下學)'적인 고통과 수치를 주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두려움과 고통을 못이겨 동지를 외면하고 배신하고 돌아눕는 풀들, 잠들지 못하는 잠을 자는 그 치열한 현장에서 그들의 귀에 환청처럼 들리는 저 회유의 악마 목소리,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어서 가라
이 쑥밭의 땅에서
괴로워하는 쑥굴헝 가시 덩굴 헤치고
그대의 어린 가족들 데리고
어서 가라
저 만수산 상상봉으로
세세손손 짙푸른 넝쿨을 잡아당겨
그대의 환청 속에
수천의 조종을 울리는
저 만수산 어서 가라
이 쑥밭의 땅에서
가시덩굴 쑥굴헝 헤치고
어린 것들 아내와 노모를 데리고
어서 가라
이곳에 더 이상 씨 뿌리지 말고
이곳에 더 이상 아이 낳지 말고
이곳에 더 이상 사람 묻지 말고
더 이상 노래하지 말라 오 살균된 땅에
더 이상 벌레 울음 소리 들리지 않으므로
더 이상 울지 말라 울지 말고
어서 가라 초토를 버리고
이곳의 온갖 이름과 언약을 버리고
납세고지서를 주민등록증을 버리고
오 화해할 수 없는 이 지상을
벗어나가라
밤마다 그대 도려낸 흉곽의 응달에
세세손손 푸른 넝쿨 내리고
세세손손 맑은 물줄기 타고
그대의 환청 속에 수천의 조종으로
떠내려오는 만수산으로
어서 가라
어서 가라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2'


만수산 드렁칡2는 포기의 노래다. 회유에 굴하지 말고,가 아니라 차라리 회유에 굴하여 만수산으로 그냥 가라는 역설의 풍자다. 모든 항의를 살균해버린 정치적 압살에 굳이 항거하지 말고, 씨도 뿌리지 말고 자식도 낳지 말고 더 이상 죽어 파묻히지도 말고, 시절을 그냥 건너가라는 자포자기로 드러낸 한탄가이다.

본시 소생은 무지몽매 고집불통의 영악한 넝쿨이오 더러울수록 따뜻한 이 두엄 땅에 뿌리박고 내일이 없는 하늘 아래 갈갈이 찢어져 시시로 청풍 나뭇잎 소리에 입속말을 나누며 킥킥거리며 푸른 등꽃을 피운 적도 있고 갯땅쇠 땅 개새끼 마을을 불질러 그놈들을 사슬로 묶어서 삼복 더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녔고 다만 절개 없는 놈들 그들의 변절을 용서했소 용서한 죄 밖에 없소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3'

만수산 드렁칡3은 실토의 노래다. 고문에 못이겨 온갖 선대의 죄상까지 과장해 털어놓는 갯땅쇠 땅은 전라도의 비칭이다. 갯땅은개펄을 말하고 갈고리 한 자루만으로 먹고 사는 뻘밭 노동자들을 갯땅쇠라 불렀다. 갯땅쇠 개새끼는 고문전문가들의 발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처음엔 드렁칡의 생리를 말하는 정도로 시작하다가, 여순 사건의 트라우마까지 들어가 아버지를 기소하고 조상을 팔아 고통을 던다.

오 넝쿨이여
핏줄이여
쇠사슬이여

산 전체가 뫼똥이다
거기까지 거적때기에 질질
끌려간 자국이 나 있다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4'


만수산 드렁칡4는 인간드렁칡의 노래다. 결국 투사는 배신자가 되었고 몸은 넝마가 되었고 영혼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초주검에 이르러 풀려났으나, 남은 것은 자부심도 애국도 민주화도 아닌, 멍한 눈과 실성한 소리와 상한 몸과 끝없는 공포감 뿐이다. 넝쿨이 핏줄이 되고 그게 쇠사슬이 된다. 핏줄은 조상을 말하기도 하고 피투성이의 신체를 말하기도 한다. 그게 쇠사슬이 되는 것은 취조현장의 쇠사슬이기도 하지만, 그를 따라붙는 긴긴 족쇄이기도 하다.

뫼똥은 묘지를 가리키는 전라도 말이다. (경상도에선 뮈땅이라고 한다). 만수산 전체는 한 왕조(고려)를 죽인 거대한 무덤이듯이, 이 시대 만수산은 그 수많은 운동권 드렁칡들의 영혼과 육체를 압살한 뫼똥이 아닌가. 거적대기에 실려 질질 끌려간 자국은, 지난 전쟁 때의 참극과 겹쳐진 유신항쟁 시절의 극한 비극의 장면이다. 항쟁과 발언이 부른 죽음이 저렇게 처리되고 그 무덤이 산이 되던 시절을 우린 통과해왔다.

그 거적대기 속의 '회유 당한 영혼'이 죽어서도 중얼거린다.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이상국 논설실장(시인 이빈섬)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