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타임머신②]도쿄 가즈코의 방엔 세한도가 있었다

2019-07-1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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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자택 거실에 앉은 고마다 가즈코 여사.]



오늘 중요한 손님이 한국에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전부터 부산했으리라. 무엇 하나 흐트러짐 없는 깨끗하고 반듯한 공간들과 물건들. 자잘하고 어여쁜 것들을 좋아하여 구석구석 틈마다 장식해놓은 조각품이나 미니어처들. 응접을 생각하며 차려 입었을 갈색에 밝고 어쩐지 부끄러운 기운이 도는 빛깔의 원피스엔 창밖에서 들어온 빛과 실내의 등불이 비쳐 단정한 앉음새를 돋우는 조명을 만들어낸다. 

이제 사람들의 물음이 쏟아지고 나는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몇년간 뵙지 못했던 터라, 다소 긴장감이 있다. 그의 옆에서 청동시대의 어떤 씩씩한 무사 같은 형상의 조각이 그에게 힘을 내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창밖의 볕들은 시간을 따라 가만히 흐르고 있다.

고마다 가즈코(駒田和子). 자택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가즈코는 후지쓰카 아키나오의 조카딸이고 지카시에겐 손녀다. 기증을 약속한 아키나오가 추사 김정희 자료를 양도하기 전에 숨을 거뒀기에 나머지 일은 가즈코가 맡았다. 그 또한 추사 문화의 '대이동'에 손을 보탠 일본 사람이다. 지난 5일 점심 나절에 그를 만났다. 작년 이맘때도 그를 만나려 했으나 당시 병세가 짙어져 볼 수 없었다. 

가즈코를 다시 만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는 2년전쯤 유방암 진단을 받았고, 그것이 목과 어깨에 전이되어 생사를 건 수술을 받았다. 이번에 우리와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고비를 넘겼기에 가능했다. 여전히 거동이 쉽지 않고 체력이 많이 소진되어 아키나오의 기일에도 묘소엔 가지 못했다.

우리가 추사의 작품과 자료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저절로 된 일이 아니다. 추사는 자신의 작품을 후세에 남기는 일을 부끄러워했다. 두 차례에 걸쳐 그것들을 불태웠다고 한다. 남은 것은 타인에게 써준 글씨나 소품의 저작들, 함께 나눈 시와 편지글이 거의 전부다. 그나마 천지에 흩어져 찾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와 있던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가 1920년대에 한-중-일 지성사의 최고봉에 이른 추사의 유작들을 찾아 나선다. 보이는 대로 주머니를 털어 사들였다고 한다. 이분이 없었으면 우린 추사의 향기조차 제대로 맡지 못할 뻔했다. 

추사 - 지카시 - 아키나오 - 최종수(당시 과천문화원장) - 가즈코. 한국과 일본에 걸친 헌신적인 '문화연결자'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땅이 낳은 인문(人文)의 높은 경지를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저기 앉아있는 고마다 가즈코는, 대를 이어 추사의 '문화'를 지켜온 일본 사람이며 그것이 한국에서 제대로 보존되고 다시 꽃피기를 바라는 할아버지 지카시와 외삼촌 아키나오의 염원을, 한국의 '추사 마니아' 우리 일행에게 전해주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저는 할아버지와 외삼촌이 한 일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한국에 그토록 훌륭한 문화를 남긴 분이 있었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죠. 그리고 그분의 많은 자료들을 우리가 잘 보존해서 전할 수 있었다는 게 참으로 뿌듯해요. 한국의 여러분들이 찾아오신 걸 외삼촌이 알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비록 여기가 일본이지만, 저기 벽에 걸린 세한도도 있고...추사의 향기가 날 거예요."

그날, 우리 일행은 헤어지며 그녀를 저마다 꼬옥 안아주었다. 다시 보는 일이 늘 기적인 인연이다. 

                                              글 · 사진 도쿄(일본) = 이상국 논설실장
 

[5일 코마다 가즈코를 안아주는 최종수선생.]

[도쿄 가즈코 여사의 방에 걸려 있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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